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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83)화 (83/159)

83화

체이서는 눈 앞에 펼쳐진 끔찍한 광경에 인상을 찌푸렸다.

목격자에 의하면 열 마리가 넘는 마물이 갑자기 등장하여 거리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더니 해결하기 위해 나타난 기사단이 제압하던 순간, 그들의 몸이 폭탄 터지듯 터져 나갔다고 한다.

연달아 무너진 2층 건물들 사이로 폭발에 휘말려 찢긴 마물의 살점 일부가 떨어져 있었고, 마찬가지로 대피하던 민간인 부상자가 끊임없이 속출하고 있었다.

“부상자 사이에 마물에 감염된 자가 있는지 확실히 색출해 내야 한다. 겁박하지 말고 부드럽게 회유하여 어떻게든 따로 격리하도록 해. 단 한 명도 빼먹어서는 안 돼. 그렇다면 더 큰 참사가 발생한다.”

“예, 알겠습니다.”

“또한 언제 어디서 마물이 나타날지 모르니 여유 인력까지 모두 끌어당겨 번화가부터 빈민가까지 배치해. 필요하다면 다른 기사단에 인력 보충 요청하고.”

부관에게 명령을 내리는 와중에도 주변에서 고통 어린 비명과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병원은 부상자들을 더는 받아 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때 다른 부관이 뛰어와 심각한 현 상황을 전했다.

“병실이 부족하고 또 마물 감염성의 위험이 있기에 환자를 받아 줄 수 없다고 하더군요.”

“쯧, 수도 외각에 내 명의로 된 별장 하나가 있으니 그곳에서 부상자들이 치료받을 수 있게 해. 병원에는 의사를 파견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게 하고, 별장 주위에 기사단을 배치해. 이해하겠나?”

“예, 수행하겠습니다!”

금세 병원 쪽으로 뛰어가는 부관을 보며 체이서는 얌전히 기다리던 또 다른 부관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모든 기사들에게 폭발에 휘말릴 위험이 있으니 최대한 안전거리를 확보하여 제압하라 하게.”

“예, 단장님께서는 이곳을 맡으실 예정입니까?”

“그래, 나는 이 화려한 거리를 지켜야지.”

체이서는 지긋지긋함이 드러나는 얼굴로 폭발에 휘말려 처참해진 거리를 훑어보았다.

“이쪽은 나와 데몬스로 충분하니 다른 쪽에 적당히 분배해서 담당하도록 해.”

부관마저 자리를 떠나고, 데몬스가 슬쩍 체이서의 곁으로 다가왔다.

“형님, 괜찮을까요?”

“괜찮게 만들어야지. 예방을 못 했으니 사후 처리라도 제대로 해야 해.”

“……도대체 이 전염병은 어디서 발생한 걸까요? 원인을 알면 예방이라도 가능할 텐데.”

데몬스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엉망이 된 거리를 보다 질끈 눈을 감았다.

“일단은 이 상황을 마무리 짓는 것부터가 우선이다. 거리를 살피고, 마물이 나타나면 제압해. 제압이 힘들면 죽여도 좋으니 더 이상 피해가 늘어나게 하면 안 돼.”

번뜩 뜬 두 눈에 서린 짙은 살기에 데몬스는 불안한 표정을 지우고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능력을 너무 과도하게 사용하지 않도록 주의해라. 저주가 언제 갑자기 발동할지 모르니.”

“……예,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데몬스는 등을 돌려 사라졌다.

체이서는 그가 사라진 반대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조각이 난 시체들을 보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계속 안고 가는 것도 참으로 불쾌해.’

체이서는 표정을 굳힌 채 처참하게 흩어진 마물의 시체를 내려보았다.

현재까지 확인된 감염자들의 공통점을 확인해 본 결과 대부분 연고가 없거나 혹은 가정에 급하게 돈이 필요한 사정이 있는 이들 뿐이었다.

‘이게 정말 자연적으로 발생한 문제일까?’

아무리 조사하여도 마물화의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내가 놓친 게 무엇이 있을까?’

만약 이 상황이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누가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사건이라면 그의 목적은 무엇일까.

체이서의 눈은 평소보다 더욱 날카롭고 매섭게 빛났다.

‘적어도 당분간은 저택에 못 들어가겠군.’

에블린과 내일 식사를 함께 하기로 하였는데 아무래도 약속을 지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걱정되니까 저택을 오래 비울 것 같으면 연락을 달라고 했었지.’

과거 에블린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체이서는 블러드윈을 찾으려고 했다.

“사, 살려 주세요.”

그때, 무너진 건물 아래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발 도와주세요……. 몸이 너무 아파요, 제발, 제발…….”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이 간절한 목소리를 들은 것은 자신이 유일한 듯싶었다.

‘아직 구조되지 못한 부상자가 있는 건가.’

체이서는 혀를 차고서는 소리가 들리는 무너진 건물 자재 쪽으로 다가갔다.

*** 

에블린은 평정심을 잃은 사람처럼 별관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누군가 뒤쫓는 것도 아닌데 무엇이 불안한지 자꾸만 뒤를 돌아보던 그녀는 겨우 별관에 도착하고서야 멈출 수가 있었다.

고지를 눈앞에 두고 있는데 어째서 이리 불안한지 에블린은 잠깐 숨을 고르고서는 곧바로 별관 안으로 들어갔다.

경비라고 하나 과연 사람이 오가기 시작한 덕인지 지난번과 달리 조명도 켜져 있고, 공기 자체가 따스하게 느껴졌다.

‘마물이 있는 곳이 따사롭게 느껴지다니. 내가 죽을 때가 되긴 한 모양이다.’

에블린은 마물이 갇혀 있는 방을 찾아 지하로 내려갔다.

그때와 같은 인물들이 문을 지키고 서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들의 표정이 그때보다 더욱 창백하였다.

“오셨습니까, 마님.”

두 사람은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면서도 불안한 시선으로 힐끔힐끔 문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가주님께서는 함께 오지 않으셨습니까?”

“부관이 찾아와 잠시 자리를 비웠네. 데몬스 님도 함께 자리를 비운 터라 안에 들어갈 생각은 없고 문만 살짝 열어 안을 지켜볼 생각이네.”

“그렇군요.”

두 사람은 홀로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말에 안심했는지 서로 시선을 마주 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둘의 표정이 좋지 않은데.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나?”

“다름이 아니라……. 안에서 자꾸 이상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상한 소리라니?”

“분명 마…물의 울음소리만 들렸었는데 어젯밤부터 자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와요. 꺼내 달라, 배고프다 소리를 지릅니다.”

두 사람은 용맹한 공작가의 기사단답지 않게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환청일 수도 있지 않은가.”

“아닙니다! 교대한 전 팀도 똑똑히 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님께서 오시기 전까지만 해도 배고프다며 자꾸만 우는 소리를 내었어요. 그런데 그게 꼭…….”

“꼭?”

“선대 공작님의 목소리와 똑같았습니다.”

불쌍해 보일 정도로 떨고 있는 기사들의 모습에 에블린은 그들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쉽사리 보고할 수 없었겠구나. 고생이 많았네.”

이 둘에게 허락된 것은 이 앞을 지키는 것이지 문을 열 수 있는 권한까지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내가 왔으니 문을 열어 확인해 볼 수 있겠군. 정말 사람이 낸 목소리인지 아니면 환청이었는지.”

두 기사는 결의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천천히 문을 열기 시작했다.

에블린은 환청이라고 단정 지었지만, 서서히 드러나는 방 안의 모습에 문득 전생에 보았던 재난 영화의 클리셰가 떠올랐다.

‘마물이 진화하고 있다고 하는데 혹시 사람을 불러들이려고 일부러 낸 목소리는 아니겠지?’

마물을 앞에 둔 순간 방심하면 정말로 목숨을 잃을 수가 있다.

‘가주의 반지도 사용하지 못한 채 죽을 수는 없지.’

에블린의 눈이 서슬 퍼렇게 변하는 찰나, 그녀는 활짝 드러난 감옥 내부를 보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감옥 안을 꽉 채우던 마물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태산만 한 몸체도 먹잇감을 보는 징그러운 눈동자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열렸다, 드디어 열렸어!”

마물 대신 감옥 안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이었다.

“내게 물을 다오, 먹을 것을 다오! 제발 나를 이곳에서 꺼내 다오!”

말라비틀어진 목소리로 환호하는 엉망인 몰골의 중년 남성.

“고, 공작 각하?”

당황한 기사의 중얼거림을 놓치지 않은 에블린은 다급히 그를 붙들고서 외쳤다.

“당장 가서 집사를 불러오도록 하게! 은밀히 불러와야 하네. 사안이 중한 일이니 어서!”

“예? 예, 알겠습니다!”

명을 받은 기사가 빠른 발걸음으로 복도를 뛰기 시작했다.

에블린은 충격에 굳어 버린 다른 기사를 향해 말했다.

“아무래도 안으로 들어가 확인을 해 봐야 할 것 같네.”

“예? 안 됩니다! 홀로 안으로 들어서는 것은 허락되지 않은 일입니다!”

“안에 있는 게 아직도 마물로 보이나? 선대 공작 각하시지 않은가!”

에블린은 그를 질책하다가 표정을 누그러트리며 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럴 때가 아니지. 경은 당장 주방으로 달려가 물과 음식을 챙겨 오게.”

“하, 하지만…….”

“어서!”

에블린이 언성을 높이자 기사는 안절부절못하더니 결국 몸을 틀어 동료와 마찬가지로 달려 나가려고 했다.

“잠시만.”

에블린은 당장 뛰쳐나가려는 그를 붙잡고서는 작게 속삭였다.

“작은 단검 같은 건 없나? 혹시 모르니 호신할 무기를 가지고 있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은데.”

“아, 있습니다!”

기사는 품속에서 검집에 넣어져 있는 단검 하나를 꺼내어 에블린에게 건네주었다.

“마님, 최대한 빠르게 돌아올 테니 너무 가까이서 대화하시면 안 됩니다. 위험할 것 같으면 곧바로 마도구 사정거리로 들어오셔야 해요.”

“명심할 테니 어서 다녀오게.”

기사는 불안한 얼굴로 몇 번이나 뒤를 보다가 이내 빠르게 달려갔다.

멀리 사라진 그를 보며 에블린은 다급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신이 주신 기회나 다름없다.’

필사적으로 앞을 지키는 기사들마저 따돌렸고, 목숨을 끊을 무기도 손에 얻었다.

이제 가주의 반지만 찾으면 모든 것이 완벽해질 것이다.

에블린은 덜덜 떨리는 몸을 이끌고서는 감옥 근처로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양 볼이 움푹 팰 정도로 야윈 중년의 사내가 퀭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선대 공작은 감옥의 창살을 부여잡은 채 그녀가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그의 손가락에는 반지가 보이지 않았다.

‘반지, 반지는 어디 있지?’

그러던 그때, 선대 공작의 두 눈동자가 징그러워 보일 정도로 크게 떠지더니 곧 감격에 찬 듯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급격한 감정의 변화에 에블린이 저도 모르게 다가가던 걸음을 멈추던 찰나 그가 조용히 물었다.

“호, 혹시 너 에블린이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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