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별관을 지키는 기사들에게도 말해 두었으니 가도 출입을 막지 않을 거야.”
“…….”
“대신 혼자 가는 건 위험하니 나와 함께 가도록 해. 내가 시간이 안 된다고 하면 데몬스를 데려가도 좋아.”
사과도 했고, 외출 금지령도 풀었고, 미뤘던 별관 출입도 허가해 줬는데, 기뻐할 줄 알았던 에블린으로부터 예상했던 반응이 보이지 않았다.
“싫은가? 이제 마음이 변했어?”
“아니, 그런 건 아니에요. 그저 조금 놀라서…….”
“놀라다니?”
“이렇게 갑작스럽게 허락해 줄 줄 몰랐으니까요. 꽃다발을 가져온 걸 보니 다시 싸우자는 건가 싶었는데…….”
에블린은 조금 전 화를 내며 흥분했던 것이 민망해져 체이서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했다.
“당신, 정말 화해할 생각이었나 보군요.”
머쓱해 보이는 반응에 체이서가 물었다.
“그렇게나 이 꽃다발이 별로였나?”
“굳이 똑같은 걸 사 올 필요는 없지 않았나 싶긴 하죠.”
최대한 돌려서 말했지만, 체이서는 곧바로 눈치채고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실수군.”
“이걸 가져오면 정말 제가 화낼 걸 예상 못 했었나요?”
에블린의 물음에 체이서는 말을 아꼈다.
차마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는지 신중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네가 내가 준 선물을 아끼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었어.”
조심스럽게 뗀 입술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그의 진심이 쏟아져 나왔다.
“지난번 티파티 때 내가 준 꽃에 신경 써 주는 모습이 다시 보고 싶었지.”
에블린은 갑작스러운 말들에 놀라 반응하지 못한 채 눈만 깜빡였다.
“그래, 화해할 생각이었으면서도 끝까지 내 욕심만 부렸어. 그 점이 불쾌했다면 이 또한 사과하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사과에 불쾌감이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솔직한 모습에 에블린 또한 자연스럽게 사과를 건네었다.
“저도 과민반응을 한 건 사실인걸요. 그때 그렇게 심한 말 해서 미안해요.”
그리고는 조금 뜸을 들이더니 꽃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런데 왜 꽃은 붉은 러넌큘러스로 사 왔나요? 이 꽃이 아니어도 됐잖아요.”
“누구보다 네가 이 꽃과 잘 어울릴 테니까.”
고민조차 하지 않고 말끔히 답한 체이서는 어정쩡하게 품에 안겨 있던 꽃을 바로 잡더니 다시 에블린을 향해 내밀었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으리라 약속할게.”
이제는 저물어 가는 옅은 노을이 두 사람이 서 있는 정원에 가득 물들었다.
“당신을 믿을 테니 내 사과를 받아 주지 않겠어?”
살랑이며 불어오는 바람 탓인지 아니면 별 의미 없이 준비한 꽃 때문인지 몰라도 가슴이 이상하게도 울렁였다.
‘저 꽃이 내게 잘 어울린다는 뜻은 뭘까?’
세자르와 마찬가지로 붉은 러넌큘러스의 꽃말을 잘 아는 이가 일부러 이 꽃을 준비한 것에는 또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닐까.
‘이러면 안 되는데.’
체이서가 제게 관심이 있다고 해서, 자신을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들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왜 심장은 눈치 없이 빠르게 뛰는 것인지 모르겠다.
꽃다발을 받으면 이 상황이 모두 마무리될 텐데 어째서 이리 망설이는 걸까.
에블린은 떨리는 손으로 체이서가 내민 꽃다발을 받아들였다.
무의식적으로 소중히 품에 안으니 체이서의 입가에 만족이 담긴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역시 네게 가장 잘 어울리는 꽃이군. 앞으로는 내가 꽃을 준비해 줄 테니 침실을 꾸며 줘.”
싱숭생숭한 에블린과 다르게 체이서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마음이 편안해 보였다.
“오래간만에 밖에 나왔으니 조금만 걷다 들어가고 싶지만, 시간이 너무 늦었군. 산책은 내일 함께 하도록 하지.”
“내일요?”
“그래, 내일. 떨어져 있던 만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에블린이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에 체이서는 더욱 진한 미소를 지으며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붙잡고는 팔짱을 꼈다.
“요새 식사는 제대로 하고 있나? 어째 살이 더 빠진 것 같은데.”
“하, 하고 있어요.”
“야윈 얼굴로 그리 말하면 신뢰가 없지 않나. 그래, 앞으로는 저녁도 나와 함께 먹도록 해.”
체이서는 통보하면서도 연신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여유로움이 가득해 보이는 그 모습에 에블린은 괜히 꽃다발을 꽉 움켜쥐고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혼란스러운 감정을 다스릴 시간이 필요했기에 말을 아끼는 것이 현명했다.
“이만 들어가지.”
그렇게 함께 저택으로 들어가려던 그때.
정원 입구 쪽에서 누군가 거칠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 계셨군요, 단장님!”
기사단에서 체이서와 대화를 나누었던 사내가 다급한 얼굴로 두 사람 앞으로 뛰어왔다.
“이 시간에 공작저에는 무슨 일이지?”
“다름이 아니라…….”
부관이 에블린의 눈치를 살피자 그녀는 중요한 이야기가 오갈 것을 짐작하고 체이서에게서 팔짱을 빼고서는 뒤로 물러나 주었다.
부관은 곧바로 체이서에게 무어라 속삭였고, 점차 체이서의 얼굴이 살벌하게 일그러졌다.
그와 동시에 저 멀리 번화가 쪽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젠장.”
먼 이곳까지 땅이 울릴 정도의 거대한 충격에 에블린이 깜짝 놀라 귀를 막자 체이서가 다급히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에블린, 지금 당장 저택으로 들어가도록 해. 그리고 내가 돌아올 때까지 절대로 공작저 밖으로 나오지 마.”
“무,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
“아무래도 테러가 일어난 것 같아. 그러니 절대로, 절대로 공작저 밖으로 나오면 안 돼.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지?”
급박한 물음에 에블린이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걱정하지 마시고, 체이서야말로 조심하세요.”
당장 위험한 현장으로 달려가야 하는 것을 알기에 에블린이 걱정을 토해 내자 오히려 체이서는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야말로 걱정하지 말고 있어. 금방 해결하고 돌아올 테니까.”
“……다치면 안 돼요.”
“걱정하지 말라니까.”
체이서는 피식 웃으며 에블린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오늘은 무리지만 적어도 내일 저녁은 함께 할 수 있을 거야.”
여유로워 보이는 체이서와 달리 에블린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저도 곧바로 안으로 들어갈 테니 어서 가 보세요.”
뒤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부관의 모습에 에블린은 그의 어깨를 밀었다.
“무사히 다녀오세요.”
그 말에 체이서는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부관과 함께 빠른 걸음으로 정원에서 벗어났다.
연달아 들리는 작은 폭발음에 에블린은 입술을 거세게 물었다.
‘체이서가 다치면 어떻게 하지?’
에블린은 불안한 마음에 불규칙적으로 뛰는 심장 위를 꾹 눌렀다.
그럼에도 날뛰는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 에블린의 눈에 아슬아슬하게 들린 러넌큘러스 꽃다발이 들어왔다.
“젠장.”
체이서가 그랬던 것처럼 낮게 욕을 내뱉은 에블린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더 마음을 독하게 먹었어야 했는데.”
아무리 이성이 붙잡아도 제멋대로인 마음은 에블린의 의지를 따라 주지 않았다.
언제나 강자였던 체이서가 제 앞에서만 약한 모습을 보이면 이리도 쉽게 마음이 흔들리니 얼마나 자신은 나약한 사람인지.
밀려오는 자책감에 절로 머리가 아파 왔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지금의 기회를 놓치면 자신은 반지를 찾아 소원을 빌지 못할 것만 같다고.
‘감히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건 아니지, 에블린?’
자신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수도원 가족들을 생각하면 그런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되었다.
에블린은 울컥 치솟는 설움을 삼키고서는 꽃다발을 품에 끌어안았다.
향기로운 꽃내음에 이상하게 눈물이 고였지만 애써 참아 내고는 잠시 뒤 꽃다발을 빈 벤치 위에 올려놓았다.
“안녕, 체이서.”
에블린은 꽃다발에 이별을 전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목적지는 별관이었다.
***
“그러니까 루이사 공작 부인이 계속 저택에서 칩거하고 있다 그 말인가?”
세자르의 물음에 그의 부관인 에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날 이후로 저택 밖을 나선 것을 본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혹시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걱정이 가득한 세자르의 물음에 에릭은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왜 편지에 대해 답장조차 주지 않는다는 말인가!”
루이사 공작저에서 아예 편지를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세자르는 답답함에 크게 언성을 높였다.
“아마도 불온한 소문이 퍼지는 것을 원치 않기에 답장을 삼가시는 건 아닐까 싶습니다.”
“……불온한 소문?”
“예, 소공작님께서 루이사 공작 부인 앞으로 보냈다는 소식이 사교계에서 알음알음 퍼져 나가고 있다고 합니다.”
“……고작 그것 때문에 내 편지에 답을 하지 않는 거라 이 말인가?”
“소공작 각하, 혹 루이사 공작 부인께 연심을 품으신 겁니까?”
“……그렇지 않다.”
세자르의 심기를 거스를 것을 알면서도 에릭은 바른 충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사적인 연락은 삼가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 두 분 모두를 위해서 말입니다.”
괜한 소문이 덧붙여지면 에블린의 평판은 떨어지고, 세자르의 혼삿길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에릭의 뜻을 이해한 세자르는 낮게 침음했다.
‘친분을 다지는 것 또한 불가능하단 말인가.’
답답함에 크라바트를 풀어 헤치는 세자르를 보며 에릭은 그를 설득한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때 갑자기 세자르의 집무실의 문에 누군가 다급히 노크하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집사?”
“허락 없이 들어와서 죄송합니다, 소가주님. 다름이 아니라……. 가주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뭐?”
당황한 세자르가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찰나 집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속한 기사단의 단원이 그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단장님! 지금 디센트라 거리 한복판에 마물들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와 동시에 수도의 번화가 쪽에서 커다란 폭음이 들려왔다.
수도를 혼란스럽게 만들 테러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