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체이서는 며칠 전보다 야윈 에블린을 보며 손에 든 꽃을 꽉 움켜쥐었다.
‘외출하지 말라고 했지, 굶으란 소리는 하지 않았는데.’
아무리 각방을 쓰고 있다고 한들 사용인들이 얼마나 공작 부인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으면 며칠 사이에 저렇게 야위었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산책 말고 함께 식사하자고 할 걸 그랬나.’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는데 그때 에블린이 다가오던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시선은 체이서가 손에 들고 있는 꽃다발에 향해 있었다.
체이서는 꽃다발을 전해 주려다가 며칠 전 싸웠을 때와 같이 살벌하게 굳은 에블린의 표정을 보며 의아해졌다.
‘역시 꽃다발은 마음에 안 드는 건가?’
하소의 조언을 들을 때만 해도 싸움의 원흉이 된 꽃다발을 선물해 줄 생각은 없었다.
괜히 화만 돋울 바에 빈손으로 오는 것이 훨씬 좋은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꽃다발을 들고 온 것은 순전히 체이서의 욕심이었다.
꽃다발을 볼 때마다 첫 티파티 주최의 축하를 위해 겉치레로 사 온 꽃다발을 보던 에블린의 얼굴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하녀에게 맡겨도 되건만 스스로 나서서 무심한 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제가 선물한 꽃다발을 손질하는 모습이 계속해서 눈에 밟혔다.
직접 정돈한 꽃을 화병에 꽂아 방에 장식했을 때는 화병만 보면 이상하게 속이 울렁거려 일부러 침실을 찾아가지 않기도 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싫은 감정은 아니었기에, 또다시 그렇게 제가 준 선물을 소중히 여겨 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꽃다발을 사 들고 오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에블린의 표정을 보니 좋은 선택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체이서의 생각대로 에블린은 속에서 열불이 끓는 상태였다.
입을 달싹이면 금방이라도 큰 목소리가 튀어 나갈 것 같아서 마음속의 화를 삭여야만 했다.
애초에 자신들이 싸운 원인이 저 러넌큘런스 꽃다발이지 않았나.
‘내가 꽃을 뺏겨서 화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에블린은 체이서의 생각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고, 괜히 더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아 꽃다발에서 시선을 뗐다.
그 모습에 체이서는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꽃다발을 주려니 에블린이 노골적으로 싫은 기색을 보이고 있고, 그렇다고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당장 꽃다발을 바닥에 떨구면 그때와 똑같은 일의 반복이나 다름없었다.
침묵 속에서 체이서는 답지 않게 에블린의 눈치를 보다 슬쩍 꽃다발을 등 뒤로 숨겼다.
“꽃은 절 주려고 가져온 것 아닌가요?”
“……받아 줄 건가?”
‘아차.’
체이서가 입을 열 때까지 절대로 먼저 말을 할 생각이 없었는데, 갑자기 꽃을 숨기는 등 뜬금없는 행동에 불쑥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당연하게도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꽃다발을 슬쩍 내밀었다.
“꽃을 보니 에블린 네 생각이나 나도 모르게 구매하고 있더군.”
붉게 물든 러넌큘런스는 세자르가 선물해 주었던 꽃다발보다 더욱 탐스럽고 아름다웠다.
“화를 키울 생각으로 사 온 건 아니야. 그저…….”
“그저?”
만약 여기서 체이서가 미안하다고 말을 한다면 에블린은 그의 사과를 받아 줄 의향이 충분히 있었다.
비록 꽃다발은 마음에 안 들지만 그럼에도 사 온 성의를 생각해서 말이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뇌물이 필요할 것 같아서.”
하지만 체이서는 교묘하게 사과를 피해 가며 제가 원하는 것만 주장하고 있었다.
방을 나설 때만 해도 직접 데리러 오지 않았음에 서운했던 감정은 바싹 말라 사라졌다.
“그러기에는 뇌물 선택을 잘못하신 것 같은데요?”
체이서의 말에 에블린은 기가 막혀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또 사과하려고 부른 줄 알았더니.”
자꾸만 열이 올라 분노에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게 느껴졌다.
에블린은 후 하고 거친 한숨을 내뱉고서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정말 같이 산책만 할 생각으로 부른 건가요? 산책이 필요해 보일 때 이렇게 불러서 함께 산책하고 다시 저를 방에 가두게요? 이게 어딜 봐서 부부인가요?”
조곤조곤 쏘아붙이는 말에 체이서가 황당하다는 얼굴을 하였으나 에블린은 이왕 마을 꺼낸 김에 참지 않기로 하였다.
“제가 볼 때는 그냥 저를 애완동물이라 생각하고 키우는 것 같은데.”
“에블린, 선을 넘는 발언은 하지 마.”
체이서의 낮은 경고에 에블린은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실언했어요. 체이서는 자신이 기분 상한 것만 생각하고 제 기분은 생각도 하지 않으시죠. 애완동물보다 못한 취급을 받고 있는데 비유가 과했네요.”
“에블린.”
나지막이 들려오는 이름에 에블린은 왜 부르냐는 양 입을 다물고선 고요히 그를 쳐다보았다.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잖아. 이렇게 부른 것도 널 욕보이려고 한 게 아니야.”
“글쎄요? 제 눈에는 그리 보였는데.”
스트레스로 인한 편두통에 에블린이 이마를 짚으며 인상을 찌푸리자 손 틈 사이로 아직도 체이서의 손에 들려 있는 꽃다발이 보였다.
“꽃다발을 안겨 주면 제가 적당히 눈치 보며 화를 풀 거라 생각했나요? 그렇다면 당신은 정말 날 우습게 본 거예요.”
에블린은 체이서의 손에 있던 꽃다발을 확 잡아채 가져갔다.
“선물 받았으니 제 마음대로 해도 되겠죠?”
에블린은 체이서가 그랬던 것처럼 꽃다발을 바닥으로 내팽개치기 위해 높이 들었다가 그와 눈을 마주쳤다.
한껏 구겨진 얼굴에 당황한 눈빛.
숨겨지지 않은 표정에 에블린은 차오르던 분노가 식을 만큼 맥이 빠지고 말았다.
결국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됐어요. 필요 없으니 가져가요.”
꽃다발을 다시 체이서의 품에 안겨 주니 그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물었다.
“당장이라도 바닥에 패대기치려고 하더니?”
“내가 당신만큼 예의 없는 사람이 아닌가 보죠.”
꽃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눈치 없이 꽃다발을 사 온 체이서의 잘못이지.
체이서는 조금 전에 보여 주었던 모습들과 다르게 멍하니 꽃다발을 내려보다가 에블린을 따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산책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었네요. 저 이만 돌아가고 싶은데,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세요.”
당분간 체이서의 얼굴을 볼 생각이 없다는 의사 표현에 그가 침묵을 유지하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내가 알아보지도 않고서 화냈던 건은 정말 미안해.”
그의 입에서 절대로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사과를 들은 에블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몇 번이고 세자르를 조심하라고 말했음에도 경계심 없어 보이는 모습에 화가 나 못 할 말을 했어.”
“화를 낸 이유가 정말 그것뿐인가요?”
“우리 사이가 계약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너는 내 아내인데 세자르가 감히 내 것을 탐냈잖아. 그게 나를 우습게 보는 거와 다름없지 않나?”
결국은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려서 기분이 나쁘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하긴, 뭘 기대했어.’
사과받았는데 오히려 더 기분이 나빠지고 말았다.
“외출을 금지시킨 것도 미안해. 세자르에게 정식으로 항의 서한을 넣었고, 앞으로는 내 눈치 보지 말고 수도 어디든 자유롭게 돌아다니도록 해.”
“그래요, 사과 잘 들었어요.”
에블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체이서는 그녀가 자신의 사과를 받아 준다고 생각하였는지 조금 전보다 편해 보였다.
“필베르타 소공작에게 항의를 넣든 말든 그건 체이서가 알아서 하세요. 그리고 저는 그때 했던 말 다 진심이에요.”
“……보통 이런 경우에는 네 잘못한 점을 이야기하며 화해하는 분위기로 흘러가지 않나?”
“글쎄요. 저는 그러고 싶지 않은지라.”
“사과를 받아 주겠다며.”
“사과 잘 들었다고 했지, 받아 주겠다고 한 적은 없어요.”
팔짱을 낀 에블린이 더 대화할 의지를 보이지 않자 체이서의 미간이 다시 처참하게 구겨졌다.
“그래서 계속 각방을 쓰자고?”
“네, 앞으로도 계속.”
“나는 싫은데.”
어린애의 칭얼거림처럼 느껴지는 목소리에 에블린은 성질을 참지 못하고 조금 전보다 소리를 높여 물었다.
“왜 싫은데요? 체이서도 제가 없으니 편하게 잤을 것 아니에요.”
“너는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니야.”
체이서가 굳게 팔짱을 낀 에블린의 한 손을 잡아 빼내더니 자신의 뺨 위에 살포시 얹었다.
“평소보다 까칠하지 않나?”
‘……까칠하네.’
“네가 없으면 잠이 잘 안 와. 네가 내 곁에서 아니, 내 품에서 자는 게 익숙해졌나 봐.”
손바닥에 뺨을 기대며 가련하게 눈을 내리까는 모습에 에블린은 홀릴 뻔한 정신을 잡고서 손을 확 빼냈다.
“그런데 어쩌죠. 나는 당신과 더 이상 같은 침대를 쓰고 싶지 않은데. 또 강요할 생각인가요? 외출을 금지할 때처럼?”
이어지는 비아냥에도 체이서는 더 화를 내지 않았다.
“하소에게 이미 들었다지?”
“뭘요?”
“별관 출입 관련해서 말이야.”
갑작스러운 새로운 주제에 에블린은 눈을 매섭게 떴다.
‘또 어떤 핑계를 대려고.’
에블린의 눈이 세모꼴로 변함에도 체이서는 조금 전보다 여유로운 목소리로 제 사정을 이야기했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마물을 대할 때마다 위험에 처했으니 트라우마가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걱정되어 내 생각을 정리하고 하소에게 말하려고 했던 거야.”
일부러 숨기려고 했던 건 아니라는 말과 함께 체이서는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미루기만 할 수 없다는 것 알아.”
‘아, 설마……?’
에블린은 뒤에 나올 말을 예상하고서 놀란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이제부터 별관을 출입해도 좋아, 내가 허락하지.”
기나긴 공방의 끝.
결국 먼저 백기를 든 건 체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