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뭐?”
체이서는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평소에 보지 못한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아니요, 제대로 들으신 것 맞아요.”
에블린은 목소리를 키워 제 의견을 내뱉었다.
“저를 의심하는 당신과 더는 한 침대를 쓰고 싶지 않아요. 같은 방에 있는 것도 이제는 끔찍해서 버틸 자신이 없어요.”
에블린의 말에 체이서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금방이라도 저를 위협할 것만 같은 분위기에 에블린은 떨리는 몸을 감추기 위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나는 당신이 신경 쓰이지 않도록 외출금지령이 끝날 때까지 방 안에서만 지낼게요. 그러니 호위를 붙이든 감시인을 붙이든 맘대로 하세요. 어차피 저는 방 안에, 홀로 있을 거니까요!”
에블린의 단호함에 체이서는 화를 내던 것도 잊었는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각방을 쓰면 소문이 어떻게 날지 몰라? 네 지위가 불안해질 만한 일이 될지도 모르는데?”
“어차피 언젠가 이혼하면 이 자리는 내 것이 아니게 될 텐데요, 무얼. 그깟 소문 당신이나 신경 쓰세요. 애초에 대단하신 루이사 공작이니 신경이나 쓰일지는 모르겠지만요.”
에블린은 체이서를 따라 하듯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서는 그를 비웃었다.
“만약 각방을 쓰기 싫다면 조금 전의 말을 사과하고, 외출금지령을 철회해 주세요. 그렇다면 저 또한 각방을 쓰자 요구하지 않을게요.”
***
체이서는 기어코 사과하지 않고 각방을 쓰든지 말든지 멋대로 하라며 침실을 나섰다.
서로 언성을 높일 때까지만 해도 속 시원히 하고 싶은 말을 모두 꺼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아니었나 보다.
오히려 화를 내기 전보다 가슴이 더욱 답답한 것이 괜한 말을 했나 하는 후회가 들 정도였다.
‘하지만 더 참을 수가 없었는걸.’
애초에 체이서는 에블린을 믿지 않는다.
그러니 하소를 핑계 삼아 제게 거짓말을 하였고,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생각에 별관의 경비 또한 늘렸겠지.
‘……갑작스럽게 입을 맞춘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겠지.’
체이서는 알고 있던 것이다.
그렇게 입을 맞추면 에블린의 마음이 뒤숭숭해질 것을.
‘입맞춤 또한 내가 눈치채지 못했던 계획 일부분이었을 텐데. 나는 변덕적인 그의 행동에 설레기나 하고 말이야.’
어쩌면 빌어먹을 원수에게 설렜던 저를 한심하게 여긴 신이 벌을 내려 주기 위해 이런 상황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보다 세자르는 도대체 무슨 의미로 그런 꽃을 전해 준 걸까.’
에블린이 꽃말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더라면 절대로 그 꽃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에블린과 다르게 귀족가에서 성장한 세자르는 체이서의 말대로 분명 그 꽃말을 알고 있었을 테다.
‘그런 사람으로 안 보였는데.’
진심으로 고맙다고, 위안받았다고 하는 따스한 웃음에 에블린은 그를 오해를 했다는 사실에 부끄럽기까지 하였기에 더욱 배신감이 들었다.
‘더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에블린의 시선이 엉망으로 흐트러진 꽃 더미에 닿았다.
‘내 기분은 저것보다 더 엉망이겠지.’
에블린은 힘없이 어깨를 늘어트리며 굳게 닫힌 침실 문을 열자 그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마야와 로피를 마주칠 수 있었다.
‘침실 안에서 큰 소리가 들렸으니 놀랄 법도 하지.’
“마야, 내가 예전에 머물던 방을 준비해 주렴. 당분간 그곳에서 지낼 테니.”
“네? 바, 방을 따로 쓰신다고요?”
당황한 마야는 많은 것을 궁금해하는 눈빛이었지만 에블린은 더 설명해 줄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부탁할게.”
힘없는 미소만 지을 뿐.
***
에블린은 외부의 소식을 단절한 채 조용히 침실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었다.
정말로 방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않고 묵묵히 침묵을 유지하는 모습에 결국 먼저 지친 것은 체이서였다.
체이서는 일주일이 되었을 때 에블린을 찾아갔다.
“언제까지 이렇게 각방을 쓸 생각이지? 외출은 마음대로 해도 좋으니 이만 원래 네 방으로 돌아와.”
“이곳이 원래 제 방이 아니었던가요? 부부가 함께 침실을 써야 하지 않냐며 저를 설득하러 오신 거라면 돌아가세요.”
그러나 에블린은 단호하게 체이서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렇게도 나와 같이 생활하기가 싫은 건가?”
“네, 눈치 볼 사람이 없으니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심지어 솔직하기까지 했다.
“저는 앞으로 이곳에서 계속 지낼 생각이니 공작님도 적응하세요.”
입에 이름마저 담기 싫다는 듯 호칭까지 바꾸는 태도에 체이서는 무어라 항변하지도 못한 채 그대로 방에서 내쫓길 수밖에 없었다.
각방을 쓰기 시작한 이후, 체이서의 기분은 항상 저조하였고 그 모습을 보다 못한 하소가 다른 기사들을 대표하여 겁 없이 물었다.
“요새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 혹시 공작 부인과 싸우신 건 아니죠?”
“…….”
“오우, 맞나 보군요.”
“시끄러워, 닥치고 나가.”
“제가 보기보다 입이 무겁잖습니까. 괜찮다면 도움을 드릴까요?”
“나가.”
매정한 축객령에 하소는 머쓱한 얼굴로 뺨을 긁적였다.
“싸우셨다면 꽃다발이라도 들고 찾아가 사과하세요. 그리고 부인의 화가 풀렸다면 그 후 솔직한 대화를 나누면 되지 않습니까.”
하소는 나름 진지하게 조언하였으나 체이서로서는 이 사건의 원흉이 되었던 빌어먹을 꽃다발이 떠올라 절로 욕이 흘러나왔다.
“그놈의 꽃다발.”
“예?”
체이서는 며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듯 까칠한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잘못은 세자르가 하였는데 왜 자신이 에블린과 각방을 써야 하는지 그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먼저 사과하라고 했을 때 해야 했나?’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세자르와 에블린을 떨어트릴 방법은 외출을 자제하는 것밖에 없지 않은가.
주제도 모르고 자신의 것을 탐내는 세자르는 교활하게 에블린에게 접근할 테고, 그의 속내를 의심조차 못 할 정도로 순진한 에블린은 뭣도 모르고 그의 호의를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이상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다면 소문에 괴로워지는 건 에블린이 될 것이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이때다 싶어 그녀를 욕할 사람들이 하나둘씩 등장할 텐데 체이서는 그 꼴을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다.
‘그렇게까지 화낼 법한 일이었나?’
“하소.”
“예, 단장님.”
“아니, 아니다.”
체이서는 무심코 하소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려고 했던 제 모습을 깨닫고선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마야의 말로는 그 꽃을 로비에 둘 생각이었다고 했지. 확실히 먼저 묻지도 않고 화를 낸 건 기분이 나쁠 수도 있겠어.’
“꽃다발이 싫으시다면 선물이라도 드리며 사과를 전달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렇게까지 내 상태가 안 좋아 보이나?”
“요새 들어 능력을 더욱 자주 사용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도 집에서 쉬고 돌아오시면 좀 괜찮아 보였는데 최근은 그렇지도 않습니다.”
확실히 에블린과 침실을 따로 쓰면서 과도하게 능력을 사용한 뒤 찾아오는 두통이 더욱 심해지기는 하였다.
‘어쩔 수 없이 사과해야겠군.’
하소의 말처럼 선물을 사 들고 찾아가면 화해하고자 하는 의도를 알아볼 테니 그래도 지난번과 같이 매정하게 쫓아내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지, 방에만 있느라 답답했을 테니 함께 산책이라도 하자 해야겠어.’
에블린이 처음 공작저에 왔을 때만 해도 기뻐하는 얼굴로 산책하고는 했었는데 최근 들어 함께 할 시간이 부족하기는 하였다.
‘그러니 세자르 같은 놈들이 꼬였던 거겠지.’
애초에 마음을 비친 것은 세자르였는데 에블린에게 화를 내고 말았으니 그녀가 화내는 것도 타당했다.
‘사과해야겠군.’
이번에야말로 에블린이 기대했던 대로 별관에 드나들 수 있게 허락을 해 줘야 할 때인 것 같다.
“먼저 퇴근하마. 내일 하루 휴가를 낼 테니 급한 일 아니면 찾아오지 마.”
“예, 푹 쉬고 돌아오십시오.”
하소의 경례를 받으며 체이서는 단장실을 나섰다.
‘내가 사과하면 어떤 표정을 지으려나.’
분명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 놀랬다가 어이없이 웃을지도 몰랐다.
혹은 인제 와서 사과하냐며 화를 낼 수도 있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다정하고 착한 에블린이라면 분명 체이서의 사과를 받아 줄 것이다.
‘오늘은 같은 침실에서 잘 수 있겠지.’
빌어먹을 각방은 앞으로 없을 것을 다짐하며 체이서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
“갑자기 산책하자고 했다고?”
평소보다 퇴근하기 이른 시간, 체이서는 돌아오자마자 에블린에게 함께 산책하러 갈 것을 권유했다.
“예, 이번에야말로 사과하실 모양입니다.”
“체이서가 그럴 리가 없지 않니?”
그날의 사정을 들은 마야가 에블린의 뾰족한 마음을 누그러트리기 위해 말했으나 그녀는 믿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애초에 찾아올 때마다 했던 말이라고는 사과 대신 다시 방으로 돌아오라는 것뿐이었고.”
“오늘은 다를 겁니다, 마님.”
마야는 두 손을 꼭 쥐고선 평소보다 씩씩한 얼굴로 그녀의 옷시중을 도왔다.
에블린은 체이서에게 말한 대로 일주일이 넘도록 정말 단 한 걸음도 방 밖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었다.
‘뭐, 덕분에 오래간만에 밖을 나가니까 좋네.’
여전히 체이서에게 화가 난 상태였지만 그래도 좀 시간을 두고, 거리를 두다 보니 그때의 화는 조금 누그러진 것도 사실.
체이서가 사과한다면 에블린은 저택의 분위기를 생각해서라도 너그럽게 그의 마음을 받아 줄 생각이 있었다.
‘어쨌든 별관에는 가야 하니까. 계속 이렇게 거리를 두고만 있을 수도 없지.’
오래간만의 산책에 들뜨기라도 했을까.
에블린은 최근 무뚝뚝하던 얼굴을 지우고서는 생기 있는 얼굴로 방을 나섰다.
“체이서는?”
그러나 방 앞에는 체이서가 없었다.
“지금 정원에서 기다리고 계신다고 합니다.”
“저런. 내가 너무 기다리게 한 모양이구나.”
그리 말하면서도 에블린은 이상하게 섭섭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당연히 에스코트하러 올 거라 생각 했는데. 혹시 사과할 생각이 아닌 건가?’
섭섭함을 너머 서운해지려는 찰나.
정원 입구에 체이서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이 싸움의 원인이 되었던 빌어먹을 붉은 러넌큘러스 꽃다발도 함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