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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79)화 (79/159)

79화

그는 꽃다발을 품에 안은 채 조용한 걸음으로 에블린에게 다가왔다.

‘설마 고백 같은 걸 하려는 건 아니겠지? 선물을 거절한 거면 의사가 충분히 전해졌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이런 에블린의 추측과 달리 세자르가 제일 먼저 내뱉은 건 사과의 말이었다.

“죄송합니다, 부인.”

소공작이 허리를 꾸벅 숙이며 사과하는 모습에 에블린이 당황했다.

“왜 이러세요, 소공작! 어서 일어나세요!”

“오전의 무례를 사과드리고자 찾아왔습니다.”

침통한 목소리에 에블린은 제가 오해했다는 걸 깨달으며 다급히 그를 세우려 했다.

“괜찮으니 어서 일어나세요!”

애원에 가까운 재촉에 세자르가 다시 자세를 바로잡았고, 숨겨져 있던 그의 얼굴에는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

에블린은 다시 머리가 아파지는 것에 표정이 찌푸려지지 않기를 바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우선 앉아서 이야기하죠.”

잠시 후, 하녀들이 다과를 차리고 응접실을 나가자 조용히 침묵을 유지하던 세자르가 입을 열었다.

“오전에 제가 보낸 선물이 부인께 폐가 될 줄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그저 감사한 마음을 전해 드리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제가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닌걸요.”

에블린이 웃으면서 이야기해도 세자르의 입가는 쉽게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세자르는 뜸을 들이다 겨우 입을 열었다.

“……부인께서 해 주신 말에 마음의 위안을 얻었습니다.”

“네?”

“……지금껏 그 누구도 제게 2등도 잘한 것이라 말해 준 이가 없었거든요. 주변의 모두가 단 한 번도 1등을 하지 못한 저를 보며 한심해할 뿐이었죠.”

세자르는 불안한 듯 자기 손을 매만지며 에블린의 눈을 계속해서 피하며 말을 이어 갔다.

“그런데 부인은 다르더군요. 2등도 충분히 잘한 것이라며 칭찬을 해 주셨죠. 아무래도 저는 그런 말이 듣고 싶었나 봅니다. 부인의 말을 듣자마자 감동받아 버렸거든요.”

“아, 그러셨군요.”

에블린이 걱정했던 것과 달리 마차에서 세자르는 기분이 나빴던 게 아닌 모양이다.

“누구나 할 수 있었던 말인데 부끄럽네요.”

“누구나 할 수 없던 말이기에 제가 그 말에 위안을 얻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편지만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 어려울 것 같아 선물을 함께 보내었던 것인데 그게 부인을 곤란하게 만들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선물 또한 사심이 아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자 건넨 것이었나 보다.

“사과를 드리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 연락도 없이 무례하게 찾아온 것 또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제 말에 기뻐해 주셨다니 저 또한 기분이 좋은걸요.”

“사과하러 오는 마당에 빈손으로 올 수는 없고, 선물들도 모두 부담스러우실 테니 약소하지만, 사과의 마음을 담아 준비했습니다.”

세자르는 조심히 꽃다발을 들어 올리더니 에블린에게 전해 주었다.

‘괜한 오해를 했네.’

에블린은 민망한 마음을 뒤로한 채, 미소를 지으며 그가 선물해 준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 

세자르에게 가졌던 오해는 다행히도 그의 방문으로 손쉽게 풀렸다.

‘하긴, 친구의 아내에게 그런 마음을 품는 건 이상하지.’

에블린은 편한 얼굴로 세자르가 선물해 주었던 꽃다발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마침 체이서가 선물했던 꽃들이 시들해져 화병의 꽃을 모두 교체할 때였다.

“예뻤는데 조금 아쉽네.”

마도구로 꽃의 보존력을 올려 최대한 생명력을 늘려 보았지만, 이제 한계였던 모양이다.

“앞으로 침실에 꽃을 좀 두어야겠어. 확실히 꽃을 두니 방의 분위기가 살아나던걸.”

“확실히 꽃을 들여놓으니 침실의 삭막함이 가시더군요. 하지만 마님, 이건 공작님이 아닌 다른 분이 준 선물이니 침실 말고 다른 곳에 두시는 건 어떨까요?”

“조금 그러려나? 꽃도 화사하고 예쁘니 로비에 둘까?”

“좋은 생각입니다. 방에 둘 꽃은 공작님께 새로 부탁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으응, 고민해 볼게.”

마야의 제안에 에블린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꽃을 둘 장소를 고민했다. 체이서가 돌아오기 전에 꽃다발 손질을 끝내자며 손을 움직일 때였다.

갑자기 침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체이서는 꼭 화가 난 것처럼 딱딱하게 경직된 얼굴로 안으로 들어섰다.

‘이런, 벌써 돌아올 시간이었던가?’

세자르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몰랐다.

에블린은 꽃을 보며 지었던 미소를 감추고서는 딱딱히 굳은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오셨어요.”

“별일 없었나?”

심상치 않은 목소리에 에블린은 성심성의껏 답하였다.

“무슨 일이요? 아무런 일도 없었는데요.”

“세자르가 다녀갔다고 들었는데.”

“아, 네. 잠시 다녀갔어요. 감사의 인사를 표하고 싶다고 찾아오셨었거든요.”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체이서의 시선이 에블린이 손질하던 꽃 더미로 향했다.

“그건 뭐지?”

“소공작께서 선물로 주셨어요. 마침 방의 꽃이 시들어서 겸사겸사 함께 갈아 볼까 싶어서…….”

에블린의 말은 채 끝까지 이어지기도 전에 체이서가 빠르게 다가오더니 꽃 뭉텅이를 움켜쥐고선 창가로 향했다.

“체이서?”

갑작스러운 행동에 에블린이 당황한 목소리를 내어도 그는 멈추지 않고서는 손에 한 움큼 쥐었던 꽃들을 모두 창밖으로 내던졌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체이서!”

에블린이 화들짝 놀라 창가로 다가갔지만 이미 꽃들은 바닥에 이리저리 흩어진 채 엉망이 되어 있었다.

허망한 시선으로 창밖을 내다보는데 체이서가 에블린의 어깨를 붙잡고선 매섭게 쏘아붙였다.

“설마 같이 쓰는 침실에 다른 남자가 준 꽃을 놓을 생각이었나?”

“아니, 그렇다고 선물 받은 꽃을 저렇게 밖에 버려요?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곳에 두라 하시면 되잖아요.”

애초에 침실이 아닌 로비에 두어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제 말도 듣지 않고 언성부터 높이는 체이서의 행동은 에블린은 불쑥 화가 치솟았다.

“그렇게 말하면 들을 의향은 있고?”

에블린은 씨근덕거리는 숨을 고르며 화를 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마음을 가다듬었다.

“미안해요, 내 생각이 짧았어요. 당신이 불쾌할 것을 생각 못 했네요.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요. 필베르타 소공작께서는 제게 아무런 감정이 없으니까요.”

“감정이 없다? 선물을 바리바리 싸 들고서 네 앞으로 보냈는데 감정이 없다고? 내 평생 세자르가 다른 여인에게 그렇게 선물 세례를 한 것을 본 적이 없는데?”

체이서는 거칠게 제 머리를 흩트리며 분노를 최대한 참고 있었다.

에블린은 체이서의 이러한 분노가 이해되지 않았다.

‘불쾌할 수는 있다만 내게 이렇게까지 화를 낼 일인가?’

진심으로 사랑해서 한 결혼도 아니었는데 체이서의 반응은 꼭 세자르를 제 여자에게 욕망을 품은 파렴치한을 대하는 것만 같았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겠죠.”

“그럴 만한 사정이라.”

체이서는 볼품없이 남은 엉망이 된 꽃들을 노려보더니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그녀를 비웃었다.

“저 꽃이 무슨 꽃인지는 알고 있나?”

“……무슨 꽃인데요?”

“러넌큘러스야. 꽃도 못 알아봤으니 당연히 꽃말도 모르겠지? 잘 들어, 에블린. 붉은색의 러넌큘러스의 꽃말은 당신은 매력적입니다.”

체이서는 무서운 기세로 에블린을 몰아붙였다.

“귀족들 사이에서 여인에게 호감이 있을 때 선물하는 꽃이기도 하지. 세자르가 과연 모르고서 선물했을까? 그도 귀족인데?”

“그분은 제게 마음이 있는 게 아니에요. 그저…….”

에블린은 말을 잇다가 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말을 해도 세자르의 행동은 충분히 의심받을 만하였기에 이 상황에서 죄인은 에블린이 될 것이다.

괜히 더 말을 이었다가는 큰 싸움으로 번질 것 같아서 벌써 지쳐 왔다.

‘그냥 넘어가자.’

세자르 문제로 더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지도 않았기에 언제나처럼 익숙하게 사과하려는 순간.

“아무래도 안 되겠어.”

“네? 뭐가요?”

“당분간 외출을 자제하도록 해.”

체이서가 갑자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껏 어떤 여자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던 세자르야. 그가 루이사 공작 부인에게 어마어마한 선물을 보내고 또 직접 찾아갔다는 소식이 전해진다면 이상한 소문이 퍼질 테지.”

“그건 다 오해라니까요!”

“에블린, 나는 내 부인이 그런 모욕적인 소문을 달고 다니는 걸 보고 싶지 않아.”

“앞으로 사적으로 안 만날 거예요. 더는 심려 끼칠 일 만들지 않을 거라고요.”

에블린이 다급히 제 억울함을 주장했으나 체이서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너는 믿어도 세자르는 믿을 수 없어.”

“……이게 어디를 봐서 저를 믿는다는 거예요? 제가 이 나이에 남편에게 외출 금지까지 당하는 게 합당하다고 생각하세요?”

참고 넘겨야지, 그냥 웃어 버려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이 상황을 넘기려 했지만, 체이서의 말도 안 되는 말에 에블린의 화가 폭발해 버리고 말았다.

“애초에 저를 믿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저를 가둘 생각을 하기 전에 소공작에게 주의하라고 경고했겠죠. 이런 식으로 행동할 거면서 감히 저를 믿었다 말하지 마세요!”

“지금 내가 잘못하고 있다는 건가?”

“강압적으로 명령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진심으로? 정말 기가 막혀서! 의처증 걸린 사람처럼 이러는 게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에블린은 더는 상대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래요, 외출 자제할게요. 아니, 당신의 오해가 풀릴 때까지 방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을게요. 당신이 저를 믿지 못하는데 감히 제가 의심을 쌓을 행동을 하면 되겠어요?”

치가 떨리는 목소리에 체이서가 당황하여 에블린의 손을 붙잡았지만 그녀는 거칠게 손을 내쳤다.

“내 몸에 함부로 손대지 마요!”

“진정하고 내 말을 좀 들어 봐.”

“싫어요! 당신은 도대체 왜 나를 믿지 못하는 거예요? 나를 불신하면서 자기를 믿어 달라고요? 당신이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이제 지쳤어요.”

어찌나 화가 오르는지 몸에 기운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더는 상대할 힘도 없었고, 이런 가치 없는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지도 않았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외출 자제할게요. 타인을 만나지도 않고, 선물도 받지 않을 테니!”

에블린은 지쳐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지금껏 참고 참았던 말을 꺼내고 말았다.

“우리 앞으로 각방을 쓰도록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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