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체이서의 목소리가 묘하게 평소보다 가라앉아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세자르의 표정 또한 조금 전과 달리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상황을 이상하게 느낀 에블린의 시선이 세자르에게로 향하자 체이서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이내 짧게 혀를 찼다.
그러고는 여전히 허공에 떠 있는 에블린의 손을 잡아 냉큼 마차 밖으로 나올 수 있게 에스코트하였다.
로피가 곧바로 뒤따라 내리자 체이서의 시선이 그녀에게 흘긋 닿았다가 빠르게 떨어졌다.
“내 아내를 걱정해서 도움을 준 건 고맙네.”
“아닐세. 기사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네.”
“과연. 세자르, 네 기사도는 언제나 훌륭하구나. 다만 앞으로는 이러한 선의를 자제해 주게. 괜히 이상한 헛소문이라도 붙게 된다면 내 부인이 곤란해질 테니 말이야.”
“…….”
“물론 자네에게 어떠한 사심이 없다는 건 알지만, 하녀를 동승시킨다고 하더라도 질이 나쁜 소문을 퍼트릴 자는 사교계에 득실거린다는 걸 잘 알지 않은가. 현명한 자네라면 알아들을 거라 생각하네.”
“그렇지, 내 생각이 짧았던 모양이군. 미안합니다, 공작 부인.”
예상치 못하게 흘러가는 냉랭한 분위기에 에블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에요, 덕분에 안심하고 귀가할 수 있었답니다.”
에블린의 말에 딱딱하게 굳어 있던 세자르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피어났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체이서는 곧바로 두 사람의 대화를 차단해 버렸다.
“세자르, 오늘 나 대신 내 부인을 챙겨 줘서 고맙네. 조심히 돌아가게.”
체이서는 세자르가 무어라 답을 하기도 전에 에블린의 어깨를 감싼 채 등을 돌렸다.
“잠시만요, 체이서. 나도 인사를…….”
“내가 했으니 됐어.”
“그게 어떻게 내 인사예요?”
에블린의 뾰족한 목소리에도 체이서는 어깨를 감싼 손의 힘을 풀지 않았다.
세자르는 다정해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내 조용히 필베르타 가문의 마차를 타고 돌아갔다.
사이 좋아 보이는 주인 내외의 모습에 사용인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니 에블린은 어깨를 감싼 손을 내칠 수가 없었다.
겨우 침실로 들어와 사람들을 모두 물리고 나서야 에블린은 체이서의 손을 매섭게 떼어 놓았다.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이런 무례가 어디 있어요!”
“내가 분명히 말하지 않았나? 흑심 품은 이를 조심하라고.”
“낯선 사내가 흑심을 품고 있을지 모르니 조심하라고 하셨죠. 네, 기억해요. 하지만 필베르타 소공작은 어느 것도 해당 안 되는 분이지 않나요?”
에블린이 씨근덕거리며 화를 내자 체이서는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이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그렇게 애절한 눈빛으로 너를 보는 걸 모르겠다고?”
“제발 헛소리 좀 그만하세요! 아무리 소공작이 싫어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말을 해요?”
“그가 너를 어떤 눈빛으로 보는지 제대로 보지를 못했으니 그리 평온하게 말할 수 있는 거야. 아니면 알면서도 그를 곁에 두었던 건가?”
밀려오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에블린은 자신의 가슴을 내리쳤다.
“누가 보면 제가 경국지색이라도 되는 줄 알겠어요!”
“며칠간 계속 나를 피하던 이유도 세자르 때문이었나? 그렇다면 말이 되는군. 애초에 세자르가 너와 왜 보육원에 함께 간 거지?”
“뭐라고요? 이게 왜 그렇게 연결이 되는……. 하, 됐다. 보육원에 후원을 늘릴 생각인데 조언을 얻고 싶다며 함께 따라왔어요. 라리사도 함께 갔고요!”
에블린이 지친 얼굴로 등을 돌려 버리자 체이서가 그녀를 붙잡았다.
“아직 대화 안 끝났잖아.”
“자기 이야기만 무작정 주장하는 사람하고는 더 대화하고 싶지 않아요. 난 씻고 곧바로 잘 거니까 식사하든, 일을 하든 알아서 하세요.”
에블린은 거침없이 체이서의 손을 뿌리치고서는 협탁 위에 있는 종을 울렸다.
곧바로 마야와 로피가 들어오자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욕실로 사라졌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체이서는 한숨과 함께 머리를 짚고 중얼거렸다.
“꼭 의처증에 걸린 못난 사내 같군.”
하지만 체이서는 제 행동이 조금도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에블린은 너무 주위의 관심과 시선에 무신경했다. 누가 보아도 사심을 담고 있건만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제게만 화를 내는 건 솔직히 억울하기도 하였다.
‘뭐? 세자르가 보육원에 후원한다고? 이미 필베르타에서 후원하는 보육원만 해도 열 군데가 되는 걸 알고 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
무엇보다 보육원의 후원을 직접 주도한 것이 세자르였기에 그가 일부러 에블린에게 접근한 것은 확실한 상황.
분명 체이서의 예감이 틀리지 않는다면 세자르의 기행은 여기서 끝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체이서의 예상대로 세자르는 그의 경고를 무시함을 여지없이 보여 주었다.
***
“마님, 필베르타 공작저에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만……. 아무래도 직접 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체이서와 싸운 다음 날, 에블린은 잠을 설치는 바람에 오전 늦게 일어나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때, 사용인 중 한 명이 급하게 침실로 찾아오더니 손님이 찾아왔다며 급히 에블린을 찾았다.
“반갑습니다, 공작 부인. 필베르타 소공작님의 보좌관인 에릭 션스라고 합니다.”
필베르타 공작저에서 찾아왔다는 말에 급히 치장하여 응접실에 갔더니 당황스럽게도 응접실 한쪽에 가득 쌓인 선물더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반가워요, 에릭 경. 그런데 이것들은 다 뭐죠?”
고급스러운 의복을 차려입은 남자는 방긋 미소를 지으며 짧게 말할 뿐이었다.
“필베르타 소공작님께서 보내신 선물입니다.”
“내게 말입니까?”
이 많은걸?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이 입가를 맴돌다 사라졌다.
당황해서 파르르 떨리는 두 눈을 보며 에릭은 미소를 지으며 답하였다.
“예, 루이사 공작 부인 앞으로 보내라 명하셨습니다.”
갑작스러운 선물 세례에 에블린은 어안이 벙벙했다.
“왜?”
“예?”
“왜 소공작께서 내게 이런 선물들을 보냈습니까? 에릭 경은 그 이유를 알고 있나요?”
에릭이 자신은 잘 모른다며 고개를 저었다.
보좌관조차 의도를 알 수 없는 선물에 에블린의 이마가 움푹 팼다.
“편지는 없었나요?”
“아, 편지도 함께 있습니다.”
에릭이 편지를 꺼내 들자 마야가 은쟁반을 들고 가 편지를 받아 왔다.
에블린은 마야가 가져온 편지를 뜯어 찬찬히 안에 적힌 내용을 읽어 보았다.
만나게 되어서 반갑고, 어제 보육원에 함께 가 줘서 감사하다는 것. 앞으로 잘 지내자는 그런 평범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선물에 대해서는 조금도 언급되어 있지 않아 마음도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마야,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부자여서 이렇게 과시하듯 선물을 보내는 건 아니겠지?”
에블린의 작은 속삭임에 마야는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껏 필베르타 소공작님께서 이런 엄청난 양의 선물을 보내신 적은 없습니다.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미혼의 남성이 기혼의 여성에게 특별한 이유 없이 선물을 보낸다?
아무리 보아도 쉽게 이해될 만한 상황이 아니었으며, 체이서가 충고했던 대로 이상한 소문이 나기 딱 좋기도 했다.
‘심지어 그게 친구의 아내……. 사교계가 즐거워할 법한 이야기겠군.’
머릿속이 복잡해지며 지끈거리는 고통이 찾아왔다.
‘보육원도 라리사와 동행하기를 잘했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체이서가 한 말이 틀리지 않았나 보다.
세자르 필베르타는 분명 자신에게 호감 이상의 감정을 품고 있다.
‘고작 두 번 만났는데 내게 마음이 생겼다고?’
이해하지 못할, 그리고 받아 줄 생각이 없는 감정은 에블린을 피곤하게만 할 뿐이었다.
‘분명 자고 일어났는데 어째 힘이 하나도 나지 않는구나.’
에블린은 머리를 꾹꾹 누르며 힘없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이 선물들은 모두 받을 수 없으니 그대로 필베르타 공작가로 가져가도록 해요.”
“공작 부인, 소공작께서 감사의 인사니 부담받지 말고 편히 받아 달라고 하셨습니다.”
“감사의 인사를 받을 만큼 대단한 일도 아니었는걸요. 에릭 경, 미안하지만 소공작께 마음만 받겠다고 전해 주시겠어요?”
에블린이 딱 잘라 거절하자 에릭은 이러한 반응을 예상했는지 굳은 얼굴로 그러겠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예, 부인의 말씀 잘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확실하게 답도 들었으니 더 이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럼 먼저 일어나죠. 만나서 반가웠어요, 에릭 경. 조심히 돌아가도록 해요.”
한 시간의 실랑이 끝에 에블린은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에서 나올 수가 있었다.
“다음부터는 필베르타 공작저에서 오는 손님 중 선물을 들고 있으면 그대로 돌려보내. 편지만 받도록……. 아니다, 편지도 받지 마. 피곤해질 것 같으니.”
체이서의 말이 맞았으니 오늘은 그의 얼굴을 또 어떻게 본담.
상상만으로도 피곤해지는 것에 에블린이 뺨을 감싸며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냥 내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런 모습을 보여 줬던 걸까.’
아이들과 뛰어놀던 순한 얼굴이 모두 가식적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니 속이 울렁거렸다.
‘앞으로 마주칠 때 조심해야지. 아니, 최대한 마주치지 말아야겠다.’
하지만 에블린의 다짐은 예상대로 흘러갈 수 없었으니.
바로 그날 오후, 세자르가 직접 루이사 공작저를 찾아왔기 때문이다.
필베르타의 사람들을 받지 말라고 하였으나 차기 공작까지 내쫓을 수는 없었다.
체이서도 다른 공자들도 공작저에 있지 않았기에 손님을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은 에블린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에블린이 응접실로 들어서자 보인 것은 커다란 꽃다발을 품에 안고 있는 경직된 얼굴의 세자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