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물론 1등을 하지 못한 건 너무 아쉬우시겠지만……. 저는 1등이라는 목표가 있었기에 소공작께서 지금처럼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최대한 분위기를 망치지 않기 위해서는 단어 하나하나 조심히 선택해야 했다.
에블린은 오래간만에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입가의 미소가 무너지지 않도록 더욱더 활짝 웃었다.
“누군가에게는 소공작의 2등도 대단해 보일 거예요. 분명 소공작을 선망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거고요. 그러니 너무 아쉬워만 하지 않으시면 좋겠어요.”
열심히 머리를 써 간신히 꺼낸 대답이었지만 세자르의 표정은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전보다 더 굳은 것만 같았기에 에블린은 난처함을 삼키며 계속 위로의 말을 건네야 했다.
“그리고 2등이어도 충분히 잘한 것 아닐까요? 소공작께서는 별것 아닌 듯 말하고 계시지만 저는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손뼉을 치며 말을 하는데 고요히 가라앉았던 세자르의 눈에 빛이 돌았다. 곧 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보니 아주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다.
에블린은 이제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너무 주제넘은 발언이었을까요?”
아무래도 실수한 것 같아 어깨를 늘어트리며 사과의 말을 전하려 했는데 세자르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주제넘다니요. 전혀 아닙니다.”
그리고는 조금 전과 달리 기뻐 보이는 얼굴로 안심하라는 듯이 웃어 보였다.
마침 타이밍 좋게 마차가 멈추어 섰다. 에블린은 어색한 이 공간을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아, 벌써 루이사 공작저에 도착했네요.”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은 채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니 조용히 웃고 있던 세자르가 조금의 망설임 끝에 물었다.
“저……. 부인께서 괜찮다면 편지를 보내도 될까요?”
“편지요?”
‘으음, 화가 난 게 아니었나?’
편지를 보낸다는 건 친해지고 싶다는 뜻이었기에 갑작스러운 대화의 흐름이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리둥절해하는 에블린과 달리 세자르는 평소보다 빠르게 뛰는 제 심장 소리가 그녀에게 닿지 않기를 바라며 미소를 지었다.
“예, 말로 하자니 조금 부끄럽지만……. 부인과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그래, 내 마음만 들키지 않으면 된다. 친구로서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하니까.’
“저는 우리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세자르는 혹시 그녀가 이상한 오해를 하지 않기를 바라며 다시금 사심이 없음을 강조하였다.
그에 에블린은 결국 수락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고맙습니다, 부인. 좋은 친구를 사귀게 된 것 같아 벌써 설레는군요.”
세자르는 그리 말하며 마차의 문을 열었다.
언젠가 에블린을 필베르타 공작저로 초대할 날을 꿈꾸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짓는 것도 잠시.
“왜 두 사람이 함께 마차에 있는 거지?”
세자르로서는 예상치 못한 체이서의 등장에 곧바로 미소를 없앨 수밖에 없었다.
***
“이상하단 말이지.”
조용한 연구실 안, 소파를 차지하고 앉아 있던 체이서의 말에 서류에 무언가를 끄적이던 하소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뭐가 말씀이십니까? 설마 또 치료제 개발이 더디다고 하시려는 건 아니죠? 저 진짜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인력도 부족해서 제 생명력을 갈아 넣으며 일하고 있단 말입니다.”
욱하는 목소리는 어찌나 억울해 보이는지 체이서는 그의 말투를 지적하려다 말고 너그럽게 넘어가 주었다.
“에블린 말이야.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더군. 왜 거짓말을 했냐고 물을 법도 한데 말이야.”
“아, 그 건 말입니까?”
하소는 시큰둥한 눈빛을 짓다 꽤 심각해 보이는 체이서의 표정에 현명하게 그가 원하는 답을 내놓았다.
“그거야 공작 부인께서 단장님을 믿고 있기에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나를 믿는다고?”
체이서의 되물음에 하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단장님께서 제게 말하지 않은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겠죠. 단장님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먼저 말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믿는다라.”
체이서는 복잡한 얼굴로 턱을 괸 채 홀로 중얼거렸다.
평소와 다른 상관의 모습에 하소는 괜히 불편한 상황을 제가 만들어 낸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미리 언질이라도 해 주셨다면 말이라도 맞췄을 것 아닙니까. 아니, 애초에 저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어차피 공작 부인께서는 안전한 곳에서 마물을 마주할 텐데 왜 반대하는 겁니까?”
“네가 사랑하는 배우자가 그러겠다고 하면 너는 쉽게 허락해 줄 것이냐?”
“……그럼요!”
“고민이 길구나.”
“아니, 본인의 의지가 확실하다면 지원해 줬을 겁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단장님께서 옆에 계시면 정말 위험할 일도 없지 않습니까. 물론 공작 부인을 걱정하는 건 이해합니다만 그래도요.”
하소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자 체이서가 항의하는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에블린이 선대 공작을 마주하는 게 싫다. 이유는 없어, 그냥 싫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럼 선대 공작 각하가 아니라 다른 격리된 마물을 만나 확인해 보면 되지 않습니까.”
여러 변수를 둬야 한다며 연구를 위해 조금만 더 시간을 할애해 달라고 간절히 애원하는 하소의 말에도 체이서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것도 내키지 않아.”
체이서 스스로도 자신의 감정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처음 에블린이 마물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것 같다고 하였을 때는 헛소리라고 생각하였기에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선대 공작을 가둔 지하실로 끌고 간 것이었다.
다만 체이서의 예상과 달리 에블린의 말은 진실이었고, 그녀의 존재가 치료제 개발과 현 현상에 대한 의문점들을 해결할 아주 중요한 키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도달하게 되었다.
에블린이 지하실에 자주 드나들기를 청했을 때 체이서는 평소와 다르게 안 된다는 답을 하며 그녀가 지하실에 접근하지 못하게 막았다.
‘예전이라면 정반대로 했을 텐데.’
호위를 붙여서 에블린이 지하실에 드나들 수 있도록 협조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지하실과 에블린을 떠올리면 속이 거북해지면서 불쾌감이 불쑥 솟아올랐다.
마물이 된 선대 공작에게 붙잡힌 채 엉망진창으로 된 모습으로 살려 달라며 간절히 저를 찾는 에블린의 모습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선대 공작을 다시 찾아갔을 때 에블린의 겁먹은 표정이 생생하였다.
그렇기에 안전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에블린이 위험에 처했던 곳에 그녀가 다시 걸어가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에블린과의 관계가 어긋난 그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이리 짜증이 나고 화가 치솟으니 시간이 지났음에도 흔쾌히 허락할 수가 없었다.
와중에 하소에게 말하면 당장 진행하자 할 것 같아서 일부러 말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최대한 미루고 미루다 에블린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을 때, 드디어 그녀의 기다림도 끝이 도달했다 생각했지만 대충 상황을 모면하였다.
어차피 하소는 그날도 연구실에만 처박혀 있을 테니 무도회장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였기에 실행한 일이었다.
‘그날 바로 만날 줄 알았더라면 굳이 거짓말을 하진 않았겠지.’
충동적인 입맞춤을 한 이후부터 미묘하게 자신을 피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강제적인 스킨쉽에 화가 났다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뒤늦게 하소가 에블린을 만났다며 보고 하고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으니까.
‘화가 나 보였지.’
저와 마주칠 때마다 순간적으로 표정을 일그러트리는 것을 보면 확실했다.
‘다만 화를 내고 싶지는 않아 보이고.’
정말 하소의 말대로 에블린은 자신의 허락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불안한 마음에 별관의 경비도 더 늘렸지만, 아직 에블린이 찾아온 적은 없다고 했으니 정말 하소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이제 정말 허락해 줘야 할 때가 됐나.’
정말 내키지 않았지만, 에블린도 원하고, 치료제 개발을 위해서라면 잠깐의 불쾌함 정도는 참아 내는 것 정도는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애초에 내가 항상 옆에 있어 준다면 위험해질 일도 없을 테고.’
생각해 보면 언제까지 이렇게 서로 피해 다닐 수도 없는 법.
‘그래, 이러다 불화설이라도 나면 안 되니까.’
체이서는 스스로를 이해시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블린의 오늘 일정이 분명 보육원 봉사활동이었지. 기분도 안 좋을 텐데 이 소식을 전해 주면 되겠군.’
에블린은 보육원에 봉사를 핑계로 드나드는 것을 좋아하면서 저택으로 돌아오면 과거를 회상하듯 우울한 모습을 보이고는 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식을 전해 준다면 오늘은 우울함 대신 오래간만에 미소를 지을지도 모른다.
“먼저 들어가지.”
체이서는 결혼식 전까지만 해도 에블린이 자주 보여 줬던 환한 웃음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평소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공작저로 돌아오니 때마침 에블린의 마차가 도착한 것이 보였다.
“타이밍이 좋군.”
그렇게 체이서가 에블린을 에스코트하기 위해 문을 열려는 순간.
마차의 문이 열리더니 그 안에서 낯선 사내가 튀어나왔다.
“왜 두 사람이 함께 마차에 있는 거지?”
세자르 필베르타.
그가 딱딱히 굳은 얼굴로 체이서를 노려보듯 응시하고 있었다.
“왜 함께 있냐고 묻지 않나.”
체이서의 되물음에 답은 건너편에 앉아 있던 에블린에게서 나왔다.
“함께 보육원에 봉사를 다녀왔어요. 납치 사건을 전해 들으셨는지 걱정이 된다며 안전하게 귀가하는 걸 보고 싶다고 하셔서 함께 왔답니다.”
에블린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체이서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와 동시에 세자르의 눈에 어리는 빛은 체이서에게는 퍽 익숙한 감정이었다.
질투, 억울함, 증오.
마치 제게 1등을 뺏겼을 때마다 보였던 억울한 표정에 체이서는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원래 자신의 것인데도 주제를 모르고 감히 손에 넣기를 원하다니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지 않나.
“……그것참 감사할 일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