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정말 열심히 움직이시네요, 필베르타 소공작님께서는.”
라리사의 지친 목소리에 에블린은 아이들에게 읽어 주었던 동화책을 정리하다 말고 그녀가 보고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보육원 앞 마당에서 세자르가 편한 옷차림으로 아이들과 열심히 뛰어놀고 있었는데, 조금 전 에블린에게 동화책을 읽어 달라 졸랐던 아이들도 어느새 합류하는 것이 보였다.
소공작이라는 자가 평민 아이들과 저렇게 기쁜 얼굴로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는 모습이 신기하여 작게 감탄이 나왔다.
“그러게요.”
“저런 모습 처음 봐요. 다정하신 분이긴 했지만……. 조금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가 있었거든요.”
“변방에서 마물을 토벌하시는 일을 하다 오셨다고 들었어요. 살벌한 것들만 보다 아이들을 보니 마음이 여유로워지신 건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햇빛 아래에서 지치지 않고 뛰어다니는 세자르를 보며 에블린은 푸스스 웃어 버리고 말았다.
해가 화창하게 떠오른 날, 그늘진 커다란 나무 아래에 앉아 웃고 떠들며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니 꼭 소풍이라도 나온 것 같았다.
‘보육원에 오길 잘했네.’
평화로운 광경을 보고 있자니 마음에 여유가 생겨 체이서가 아닌 별관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었다.
‘왜 갑자기 경비를 늘렸을까?’
그 후 마야에게 별관이 신경 쓰이니 그곳을 살펴 달라고 은밀히 부탁하였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경비가 늘고 삼엄한 분위기가 유지되고 있다고 하였다.
‘혹시 공작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 걸까?’
이래서야 정말 체이서의 허락이 떨어지기 전까지 꼼짝도 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허락은커녕 이야기도 안 했을 줄은 몰랐어.’
잠시나마 체이서를 믿었던 제 잘못이지 어쩌겠는가.
에블린은 한숨을 푹 내쉬다 말고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아차 하며 고개를 돌렸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요?”
“아니에요. 그냥 요새 기분이 조금 싱숭생숭해서 그랬어요. 라리사랑 나와서 기분전환이 되었지만요. 아, 참.”
걱정이 담긴 그녀의 시선에 에블린은 웃다가 저와 동행한 로피에게 말했다.
“로피, 마차로 가서 내가 챙겨 온 것 좀 가져다주겠니?”
“네, 마님!”
로피가 씩씩하게 대답하고 사라지니 라리사가 의문에 찬 얼굴로 로피를 바라보았다.
곧 로피가 예쁘게 포장된 상자 하나를 들고 돌아왔고, 에블린은 상자를 그대로 라리사에게 전달해 주었다.
“선물이에요, 라리사.”
“갑자기요? 어머, 꼭 생일이라도 된 것 같네요.”
라리사는 제 손에 놓인 손바닥만 한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어 보았다.
“지난번에 제게 쓰는 향수가 무엇인지 물었었죠?”
상자 안에 담긴 조그만 유리병을 보며 라리사는 기쁜 표정으로 상자를 안아 들었다.
“세상에나. 그걸 기억하고 챙겨 준 건가요? 너무 기뻐요.”
라리사가 소매 끝자락에 살짝 향수를 뿌려 보더니 이내 활짝 웃었다.
“음, 그런데 그때 맡았던 향과는 조금 다르네요? 아무래도 뿌린 직후와 잔향으로 남았을 때가 다른가 봐요. 그때의 향도 좋지만, 지금의 향도 너무 좋네요. 고마워요.”
에블린이 다행이라며 웃고 있는데 어느새 놀이가 끝났는지 세자르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두 분, 무슨 이야기를 하길래 그리 즐거워 보이십니까?”
“소공작께서 기분이 좋아 보이셔서 다행이란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라리사가 자연스럽게 상자를 닫고서는 곁에 있는 제 하녀에게 넘겨 주자 세자르의 시선이 잠시 상자에 닿았다.
“저건……?”
“에블린이 제게 준 선물이랍니다.”
“그렇군요. 두 분께서 사이가 정말 좋은 모양입니다.”
“그럼요, 친구인걸요.”
라리사가 활짝 웃으며 에블린에게 팔짱을 꼈다. 승자라도 된 듯 얄밉게 입꼬리를 올리는 라리사를 보며 세자르는 그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어찌나 열심히 뛰어놀았는지 그의 얼굴은 발갛게 물들어 있었고, 얼굴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옆에 앉아서 조금 쉬는 건 어떠세요?”
“그럼 그럴까요.”
세자르는 거절하지 않고 에블린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아 앉았다.
‘많이 힘들었나 보네.’
아무리 기사라고 해도 많은 아이의 체력을 따라가기는 여간 쉽지 않았나 보다.
더운 듯 거친 숨을 내쉬는 것에 에블린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그에게 건네주었다.
“아, 감사합니다.”
세자르는 손수건을 조심스럽게 받아 들다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슬쩍 거리를 두었다.
“죄송합니다. 땀 냄새가 났을 텐데.”
민망한 듯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며 에블린이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는 꿋꿋이 거리를 둔 채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애매모호한 거리감에 어색히 웃었지만, 세자르는 에블린의 시선을 피한 채 이마에 맺힌 땀을 닦을 뿐이었다.
‘내가 불편한가? 아니면 뭐 실수라도 한 게 있나?’
혹시 뭔가 잘못한 게 있나 싶어 에블린이 곰곰이 생각에 잠기자 조용히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라리사가 어색해진 분위기를 돌렸다.
“참, 에블린. 저도 답례하고 싶은데 선물을 보내도 괜찮을까요?”
“답례를 기대하고 준 게 아니에요.”
“그래도요. 제 마음이라 생각하고 받아 주세요.”
팔에 기댄 채 맑게 웃는 라리사의 얼굴에 에블린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세자르는 사이좋게 팔짱 끼고 웃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말했다.
“해가 저무니 슬슬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빠른지 푸르던 하늘에 벌써 노을빛이 물들고 있었다.
에블린 또한 아쉬움을 삼키며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갑자기 그녀 앞으로 불쑥 커다란 손이 내밀어졌다.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세자르가 마치 이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손을 내밀었다.
다만 그 손을 붙잡은 건 에블린 옆에 앉아 있던 라리사였다.
“어머나, 친절도 하셔라. 감사해요.”
라리사가 세자르의 손을 덥석 잡자 그는 조금 당황한 듯하더니 상냥한 미소를 지은 채 그녀를 일으켜 주었다.
“에블린은 제 손을 잡아요.”
“고마워요.”
세자르가 다시 손을 내밀려고 하자 라리사가 그 앞을 막아서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어 에블린을 부축해 주었다.
‘결혼했으니 괜한 추문이 붙을까 봐 신경 써 주는 건가?’
라리사의 행동이 평소와 달리 이상했으나 세자르도 웃고 있으니 문제가 될 법한 행동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럼 다음에 또 불러 주세요, 에블린.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소공작님.”
마중 나온 마차에 몸을 실은 라리사가 인사를 하며 먼저 떠났고, 에블린도 이만 마차에 오르려는데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세자르가 입을 열었다.
“부인,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부인을 모셔다드려도 괜찮을까요?”
“네?”
갑작스러운 말에 에블린은 조금 당황했지만, 곧바로 괜찮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함께 온 호위도 있으니 괜찮답니다.”
“결혼식 전 마차째로 납치당한 적이 있다 들었습니다. 안전히 저택으로 돌아가는 걸 보지 않는다면 제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습니다.”
세자르의 말에 에블린은 난감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거야 사정이 있던 건데.’
자신의 언니가 돈 때문에 저를 납치했단 것까지는 아마 이 사내도 잘 모를 것이다.
‘설명을 해 줄 수도 없고 말이야.’
에블린이 부드럽게 거절하려고 다시 입을 뗀 순간, 세자르는 거절의 답을 예상했는지 시무룩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부디 모셔다드릴 수 있게 허락해 주세요.”
걱정이 가득한 눈빛이 에블린에게 닿았다.
“비록 체이서보다는 못하겠지만 저도 한 기사단을 책임 지고 있으니 부족한 실력은 아닙니다. 함께 마차를 타는 게 부담스럽다면 하녀와도 함께 동승해도 괜찮습니다.”
거절하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져 버렸다.
“실력을 의심해서 그런 게 아니었어요.”
에블린은 오해 말라는 말과 함께 이내 동승을 허락했다.
“감사합니다, 부인.”
에블린은 세자르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 올랐고, 그의 제안 대로 로피 또한 함께 마차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기사도가 충만한 사람이네.’
루이사의 어떤 누구는 성질이 더럽기만 한데 같은 교육을 받고 자라 온 동창인데 어찌 이리 다를 수 있는지 모르겠다.
“소공작께서는 정말 친절하시네요.”
“……이 상황에서 누구라도 저처럼 행동했을 겁니다.”
진심을 담아 칭찬하니 세자르가 부끄러운 듯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아무래도 친구 부인을 대하기에는 어색하겠지. 조금 편히 대화할 만한 주제가…….’
에블린은 달갑지 않았지만 제게 호의를 베푼 세자르를 위해서 순간의 기분을 희생하기로 했다.
“저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아, 물론이죠. 얼마든지 물어보셔도 좋습니다.”
“체이서와 어떻게 친해지셨어요?”
“네?”
“지난번 대화를 나누는 걸 보니 꽤 친한 사이셨던 것 같아서요. 수도에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그이의 친구는 만나 본 적이 없거든요.”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분위기가 좋아지기를 바라며 꺼낸 말이었는데 세자르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체이서와 저는 라이벌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언제나 1위를 두고 경쟁하였죠. 비록 체이서에게서 1위를 앗아 오지 못했지만요.”
“그이가 그렇게 공부를 잘했나요?”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어느 부분에서나 부족할 것 없이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도 그런 체이서를 닮으라고 잔소리하고는 하셨죠.”
세자르는 평소의 미소도 지운 채 우울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언제나 포기하지 않고 노력했었는데……. 결국 아카데미를 졸업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체이서를 이기지 못했답니다. 아무래도 저는 무리인 것 같더군요.”
처량하게 내리깐 눈썹이 잘게 떨렸다.
“아무래도 능력도 못 쓰는 평범한 사람이니 그를 따라잡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겠죠. 지금 생각해 보면 아등바등했던 게 무의미한 행동이었던 것 같습니다.”
분위기를 전환시키고 공감대를 조성하기 위해 야심 차게 꺼낸 대화 주제였는데, 아주 잘못된 선택이었나 보다.
자존감이 저 바닥까지 떨어진 것만 같은 모습에 오히려 에블린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