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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75)화 (75/159)

75화

세자르는 첫눈에 반한 상대가 유부녀라는 사실을, 아카데미 시절 내내 자신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던 숙명의 라이벌이었던 체이서의 여인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너는 나와 달라야 한다. 어떻게든 루이사를 뛰어넘어야 해! 그게 차기 필베르타 공작으로서 네가 해야 할 일이다!’

어린 시절 내내 자신을 괴롭혀 왔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리는 것만 같았다.

필베르타는 루이사와 마찬가지로 같은 공작가이면서도 루이사보다 못한 취급을 받고는 했다.

과거부터 지속적으로 뛰어난 능력자를 배출해 내는 루이사 공작가와 달리 제대로 된 능력자를 배출해 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필베르타는 대대적으로 내려오는 가문의 훌륭한 검술과 그에 따른 실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능력자들보다 우위에 서기에는 어려움이 있었고, 이는 현 필베르타 공작의 크나큰 열등감으로 남게 되었다.

필베르타 공작은 자신의 아들 또한 능력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좌절하였으며, 공부와 검술 실력마저 루이사에 지는 것을 용납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다르게 체이서 루이사는 다방면으로 완벽한 자였고, 아무리 노력하여도 세자르는 체이서를 이길 수가 없었다.

2학년이나 월반하였음에도 선배들을 제치고 수석을 차지한 천재, 그것이 체이서 루이사에 대한 세간의 평가였다.

필베르타 공작의 열등감이 대물림되어 자연스럽게 세자르에게까지 내려오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세자르는 첫사랑을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고 보좌관에게 에블린을 조사하라 명하였다.

그러나 돌아온 건 그녀가 너무도 유명하여 조사할 것이 없다는 보좌관의 대답이었다.

몸이 좋지 않은 바이아르도 백작가의 막내딸이 시골에서 요양하다 체이서와 우연히 만나 사랑을 키웠다는 참으로도 낭만적인 이야기는 수도의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올해의 에트레라는 소식까지 더해지며 그녀를 모르려야 모를 수 없다는 말에 세자르는 그제야 그녀의 옷에 봄꽃 코사지가 달려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모두의 축복으로 맺어진 세기의 사랑, 그 소식은 세자르를 더욱 좌절시킬 뿐이었다.

‘만약 그 임무에 내가 배정되었다면 에블린과 만나는 건 내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버지의 소원대로 능력자로 태어나 1기사단의 단장이었더라면 변경으로 가 마물과 싸우지 않아도 되었을 테고, 체이서보다 자신이 에블린을 먼저 만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어차피 그녀가 나를 사랑해 줄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나. 나의 운명이 아니니 더는 마음 쓰지 말자.’

제가 행하지 못한 일을 후회하며 곱씹는 것은 세자르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수도에 올라왔으니 아버지의 말대로 부인을 들이자.’

하지만 세자르의 본능은 그의 이성을 너무도 손쉽게 눌러 버리고 말았다.

제 앞으로 향한 약혼서와 초상화들을 보면 볼수록, 에블린을 잊으려고 발버둥 치면 칠수록 저를 보며 환히 웃어 주었던 미소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제 말에 수줍게 붉히던 볼이, 맑은 웃음소리가, 그리고 인적이 드문 정원에서 체이서와 입을 맞추며 보이던 붉게 상기된 얼굴이!

‘인제 와서 무얼 어쩌겠다고. 남편이 있는 여인과 몰래 밀회라도 벌이겠다는 건가?’

스스로를 탓하면서도 티 없이 맑은 에블린의 미소가 제게 향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꾸만 끊이질 않았다.

‘내가 빠져도 단단히도 빠졌구나.’

세자르는 일부러 에블린을 잊기 위하여 몸을 바삐 움직였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필베르타 후작이 쓰러진 후 그가 해결해야 할 일이 많았다.

일에 치여 살다 보니 제법 그녀를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 분명 그럴 줄 알았는데.’

며칠 후 세자르는 제 앞에서 미소 짓고 있는 에블린을 보며 크게 뛰는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수밖에 없었다.

*** 

봄 무도회의 밤은 에블린의 마음에 설렘이라는 죄악을 만들어 낸 끔찍한 날이 되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체이서는 어째서 자신에게 입을 맞추었던 건지, 자신은 왜 체이서를 당장 밀쳐 내지 못했는지.

‘그리고 그 표정은 뭐였는지…….’

숨에 헐떡이며 그를 노려보는 에블린을 향해 상기된 얼굴로 웃던 체이서의 얼굴은 시간이 지나도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혹시 누군가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지만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졌을 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면 왜 입을 맞춘 거지? 정말 미치기라도 한 걸까? 아니지, 당장 그를 밀치지 못한 내가 미친 거지.’

뒤늦은 후회를 해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빨리 시간을 되돌리자는 생각에 당장 봄 무도회가 있던 다음 날 별관으로 향했으나 예상보다 더 삼엄한 경비에 결국 발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당장 별관에 들어갈 방법이 요원해 보이자 에블린은 점점 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체이서에 대한 분노와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 피어났고, 결국 제 복잡한 감정을 숨길 자신이 없는 에블린은 체이서를 피해 다니기 시작했다. 

일부러 피하는 것을 느꼈는지 체이서는 대놓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으나, 에블린은 모르쇠 하며 최대한 그와의 접점을 피했다.

‘그러게 왜 갑자기 입을 맞춰가지고.’

에블린은 멍하니 제 입술을 매만지다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이참, 에블린. 무슨 생각을 그리해요?”

“미안해요, 라리사. 잠시 생각할 게 있었네요.”

봄 무도회가 끝난 후에 라리사로부터 함께 외출하고 싶다는 편지가 도착하였다. 체이서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지우기 위해 흔쾌히 수락했던 것인데 이래서야 의미가 없었다.

에블린은 그날 밤 입맞춤의 기억을 내던지기 위해 휙휙 머리를 저었다.

“그러고 보니 곧 보육원 정기 후원일이라면서요. 가서 봉사도 하신다고 들었는데 정말인가요?”

“네, 아이들을 좋아해서요. 보고 있으면 절로 힘이 나거든요. 나온 김에 아이들에게 선물해 줄 인형이라도 둘러볼까 싶어요.”

“그렇구나, 그렇다면 다음에 저도 가도 될까요?”

두 사람이 거리를 산책하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라리사가 주위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왜 그래요, 라리사?”

“어디선가 시선이……. 어머, 필베르타 소공작이네요. 왜 저렇게 멍청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걸까요?”

라리사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그녀가 말한 대로 세자르가 서 있었다.

“누가 뒤통수를 한 대 가격한 것만 같은 얼굴…….”

“너무 솔직해요, 라리사.”

“어머, 주의할게요.”

놀란 표정과 붉어진 얼굴은 분명 에블린과 라리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쪽으로 다가오네요.”

라리사가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임과 무섭게 세자르가 두 사람 앞에 멈춰 섰다.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공작 부인.”

“네, 오래간만에 뵙네요. 잘 지내셨나요?”

“……예, 저는 잘 지냈습니다. 그보다 다친 발은 괜찮으십니까?”

세자르의 말에 옆에서 깜짝 놀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머, 에블린. 다쳤었어요?”

“발을 조금 삐끗했었어요.”

“언제요?”

“봄 무도회 날이요. 아무래도 무리를 좀 했었나 봐요. 지금은 멀쩡하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에블린의 말에 라리사와 세자르가 동시에 안심하였다.

“오래간만에 보는군요, 밀리오 영애.”

“이제야 제가 보이셨나 보네요? 반갑습니다, 소공작님.”

라리사의 비꼼 가득한 말에 세자르가 민망한 듯 볼을 붉히더니 괜히 헛기침했다.

“그날 공작 부인께서 다친 것이 기억에 남아서 저도 모르게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그런가요.”

라리사는 묘한 눈빛으로 세자르를 보더니 슬쩍 에블린의 팔에 팔짱을 꼈다.

세자르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두 사람이 낀 팔짱에 닿았다 떨어졌지만, 에블린은 눈치채지 못한 채 물었다.

“두 분은 아는 사이인가요?”

“함께 아카데미에 재학했을 때 오가며 보았습니다.”

세자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라리사가 덧붙였다.

“별로 친한 사이는 아니었어요. 저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선배인지라. 다만 인기가 좋았던 선배라 유독 더 기억에 남는 것 같네요.”

“그, 그리 인기 있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다급한 외침에 에블린이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상황에서는 무어라 답을 해 주어야 하는 게 좋을까.

“그러셨군요.”

“예, 그래서 아직 약혼녀도 없고…….”

세자르는 말을 잇다가 라리사의 묘한 시선을 느끼고서는 부끄러움에 입을 다물었다.

“아무튼 그렇습니다.”

어색한 마무리에 라리사가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손뼉을 쳤다.

“그럼 우리는 이만 가도 괜찮을까요?”

“아, 저…….”

금방이라도 떠날 것만 같은 모습에 세자르가 우왕좌왕하더니 머뭇거린 끝에 입을 열었다.

“엿들으려던 건 아니었지만 곧 보육원에 후원을 하러 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 네. 정기적으로 후원하는 곳이 있거든요.”

“필베르타에서도 후원할 보육원을 찾고 있었는데 혹 동행해도 괜찮을까요?”

라리사가 매서운 눈빛으로 세자르를 바라보았으나 그는 시선도 느끼지 못할 만큼 붉어진 얼굴로 에블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음, 제가 가려는 곳은 이미 루이사에서 후원을 하고 있으니 다른 곳을 알아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도움이 필요한 곳은 많을 테니까요.”

“아, 아니요. 당장 그 보육원에 후원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과정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직접 겪어 보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에블린은 갑작스러운 큰 목소리에 당황하다가 천천히 붉게 달아오르는 세자르의 얼굴을 보며 다른 의미로 놀라고 말았다.

‘보통 이런 건 안주인의 역할이니 제가 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건가?’

슬쩍 고개를 돌리니 라리사가 경계 어린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는 게 보였다.

부끄러움을 참고 제게 청한 것이 대귀족답지 않아 신기한 마음 반, 어려움에 부닥친 아이들을 도와줄 수 있다는 마음 반.

이 정도 도움이라면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었다.

‘그래도 단둘이 엮이는 건 조심해야겠지.’

에블린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라리사도 같이 가기로 했는데 잘되었네요. 그날 셋이서 함께 가도록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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