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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74)화 (74/159)

74화

에블린은 당황한 듯 놀란 얼굴로 사내의 품에 안겨 있다가 다급히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녀가 무어라 속삭이자 사내가 당황한 듯 다급히 떨어지더니 적당한 거리에 서서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 보였다.

낯선 사내라고 생각했던 것도 잠시, 길게 흘러내린 차분한 은발을 보며 체이서는 그가 누군지를 눈치챘다.

‘세자르 필베르타?’

분명 변경에서 마물을 토벌해야 할 이가 왜 여기에 있는 것일까.

‘아, 공작이 뇌출혈로 쓰러졌다던가.’

효자가 따로 없다며 비웃는 것도 잠시.

세자르와의 대화를 달갑지 않아 하던 에블린이 어느 순간부터 입가에 미소를 짓더니 곧 활짝 웃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몰라도 표정의 변화가 참으로 다양하게도 이루어졌다.

그리고 체이서는 멀리서 그 장면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최근 본 적 없던 화사한 미소를 타인에게 지어 준다는 사실은 제법 체이서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에블린의 웃음에 반응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멍청한 세자르의 모습에 체이서는 불쾌감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입가를 비틀었다.

‘계속 웃는군.’

제 옆에서 다 죽어 가는 화초처럼 있던 이가 다른 사내 앞에서 저리 활짝 핀 꽃처럼 웃고 있으니 이상하게도 속이 뒤틀리는 것만 같았다.

‘내게는 저리 웃지 않으면서 말이지.’

누구나 반해 버릴 법한 외모로 저리 웃어 주니 설레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감히 주제도 모르고 제 것을 탐내는 어리석은 이들이 하나둘 늘어나는 것도 당연했다.

티 파티에서 라리사와의 개인적인 만남 때야 같은 여성이니 불쾌함을 감수하고 참고 넘어갈 수 있었지만, 세자르 필베르타의 경우는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쉽게 넘길 수가 없었다.

‘제대로 경고라도 해 줘야 알아들으려나. 정말 사내 무서운 줄 모르는군.’

자각하지 못한 질투에 눈이 먼 체이서는 에블린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의 착한 심성을 탓하며 발을 옮겼다.

그에 기척을 느낀 세자르가 고개를 들었다가 체이서를 발견함과 동시에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에블린, 여기 있었군.”

익숙한 목소리에 에블린은 고개를 돌렸고, 체이서를 마주한 순간 그녀의 입가에 지어져 있던 미소가 순식간에 지워졌다.

“아, 체이서.”

“휴게실에 간다더니.”

“아, 미안해요. 쉬고 돌아가는데 길을 잃어버려서요. 실수로 넘어질 뻔했는데 세자르 씨께 도움을 받았어요.”

에블린이 머쓱한 표정으로 웃자 그제야 체이서의 시선이 세자르에게로 향했다.

“오래간만이군, 세자르.”

“그러게. 오래간만이네, 체이서. 아, 공작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세자르의 장난기 섞인 웃음에 체이서는 피식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너도 곧 공작위를 계승받게 될 텐데 무슨. 그보다 에블린, 다친 곳은 없어?”

“네, 다행히도요.”

“내가 볼 땐 아닌 것 같은데.”

에블린의 대답이 이어지기도 전에 체이서는 단번에 에블린을 품에 안아 들었다.

“체, 체이서?”

“넘어질 때 구두 굽이 부러지며 삐끗한 모양이야. 발목이 부어 있잖아.”

“어,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당신에 대해 모르는 게 있을 리가.”

체이서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슬쩍 세자르를 쳐다보았다.

그의 맑은 하늘색 눈동자에 스치는 열등감을 보며 체이서는 그제야 불쾌감이 가시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미안하네, 세자르. 오래간만에 만나 반가워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아무래도 우리는 먼저 돌아가 봐야 할 것 같네.”

“그래, 부인께서 몸이 좋지 않으시니 어쩔 수 없지. 나중에 연락하겠네.”

세자르의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체이서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체이서, 저 혼자 걸을 수 있으니 내려 주세요.”

에블린이 체이서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여도 체이서는 묵묵히 침묵을 지키며 걸을 뿐이었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주홍빛 작은 전등이 주렁주렁 매달려 은은한 조명이 비추는 쉬기 편하게 꾸며진 정원이었다.

체이서가 자신을 벤치에 내려 주고서야 에블린은 그를 마주 보며 불만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왔잖아요.”

“그럼 내가 그 자리에서 허허실실 웃으며 대화에 참여할 줄 알았나?”

“아카데미도 같이 나온 친구라면서요.”

“누가 친구라는 거야. 내가? 그런 덜떨어진 녀석이랑?”

“덜 떨어지다니요. 심성도 곧고 착한 분이신 것 같던데.”

에블린이 제 편을 듣지 않고 세자르의 편을 들자 체이서가 짜증스럽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그 녀석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콧방귀를 뀌는 모습에 에블린이 욱하며 소리를 높였다.

“처음 보는 사람을 망설임 없이 도와주셨잖아요. 제게 도움을 준 사람을 그렇게 욕보이지 마세요.”

“고작 한 번 만난 사이에 퍽 친해졌나 보군.”

흑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는 걸 모르는 에블린의 모습에 체이서는 혀를 찼다.

어딘가 화가 잔뜩 난 것 같은 체이서의 모습에 에블린은 당황스럽다 못해 어이가 없어졌다.

“친해질 게 뭐 있나요? 한 거라고는 당신 이야기를 나눈 것밖에 없는데.”

이야기를 나눈 것이라고는 체이서의 학창 시절 이야기뿐이었다.

듣기 싫은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야 했던 제 속도 모르는 체이서의 모습에 에블린은 불쑥 짜증이 솟았다.

‘애초에 당신이 나를 속이지 않았더라면 넘어질 일도 없었어!’

차마 외치지 못하는 속마음에 답답해 상대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내 얘기?”

“예, 당신이 학창 시절에 얼마나 훌륭했는지, 또 얼마나 인기가 많았는지 등등. 순전히 당신 이야기밖에 안 나눴다고요.”

“……그래?”

에블린이 즐겁게 대화를 나눴던 주제가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체이서가 화내던 것을 멈추고서는 놀란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에 갑작스러운 상황에 잠시 잊고 있었던 에블린의 분노가 다시 활활 불타기 시작했다.

‘왜 속였는지 물어볼까? 아니야, 어차피 하소 경을 통해 듣게 되겠지. 내가 말하나 하소 경이 말 하나 달라질 건 없어.’

에블린이 화를 낸다고 해도 체이서는 듣는 체도 하지 않을 게 분명했기에 쓸데없는 감정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더 허락받을 생각도 없고.’

하소 경이 먼저 전하는 게 빠를지 제가 먼저 별관에 숨어들 게 빠를지 모르겠다만 적어도 체이서가 눈치채기 전에 모든 일을 끝낼 것이다.

“내가 막무가내로 행동해서 화가 났나?”

“그럴 리가요.”

갑자기 홀로 분을 삭이는 모습에 체이서가 물었으나 에블린으로부터 돌아오는 건 차가운 목소리였다.

“다음부터는 낯선 사내가 말을 걸면 주의하도록 해. 어떤 흑심을 품었을 줄 알고.”

“흑심이라니요? 체이서는 누군가 앞에서 넘어지면 그냥 두고 볼 거예요?”

“굳이 내가 도와줄 필요가 있나?”

“……누구와는 다르게 세자르 씨는 참 착하신 분이 맞는 것 같네요.”

기가 찬 얼굴로 비꼬는 말투에 체이서가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내 앞에서 다른 남자 편을 드는 건가?

마치 세자르를 향해 질투라도 하는 듯한 말투였다.

보통 때라면 에블린 또한 홀로 감정을 삭이고 넘어갔겠지만 오늘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럴 리가요. 체이서는 제가 넘어져도 그냥 두고 보겠지만 그래도 제 남편이잖아요? 제가 감히 짐작도 하지 못할 이유가 따로 있겠죠.”

“네가 넘어질 경우는 이야기가 달라지지. 내가 아내가 넘어지는 걸 그냥 두고 볼 사람으로 보이던가?”

“그거야 닥쳐 보지 않으면 모르겠죠! 애초에…….” 

잠자코 에블린의 말을 들어 주던 체이서가 멀지 않은 곳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게 슬쩍 시선을 돌렸다.

반대편 입구에서 정원으로 들어서던 세자르가 인기척에 놀라 멈춰 서는 게 보였다.

“제 말 듣고 있는 거예요?”

에블린의 목소리에 체이서의 시선이 다시 그녀에게로 향했다.

평소 에블린이 무조건 체이서의 말을 따르던 체념적인 모습만 보여 줬던 탓일까.

오늘따라 그녀답지 않게 심각한 얼굴로 화를 내며 제 감정을 솔직히 토해 내는 모습임에도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만족스러웠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다음부터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주의할게.”

“네?”

체이서가 허리를 숙이더니 에블린의 얼굴 앞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이밀며 말했다.

“입 맞출 테니 너무 놀라지 마.”

“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

에블린이 채 말을 잇기도 전에 그녀의 입술은 체이서의 입술에 삼켜졌다.

당황한 에블린이 다급히 그를 떼어 내려고 했으나, 체이서가 그녀의 허리를 옭아매며 더욱 깊이 입을 맞추는 것이 더 빨랐다.

“으음.”

에블린이 옅은 신음을 내자 이쪽으로 다가오던 누군가의 발걸음이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그제야 두 사람의 존재를 눈치챈 세자르가 당황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며 서 있었다.

그에 체이서는 보란 듯이 미소를 지으며 더욱 깊이 에블린의 입술을 탐하였다.

주제도 모르고 감히 분노에 찬 세자르를 비웃은 체이서는 다시 조롱의 눈빛을 보내고서는 다시 에블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연녹빛 눈동자가 놀라 떨리고 있는 와중에도 자신을 거절하지 않고 계속 받아들이는 에블린의 모습에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포만감이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에블린이 힘들다는 듯 체이서의 등을 몇 번 두드리자 그는 자연스럽게 그녀가 자신의 목을 끌어안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누군가가 수풀에 숨어서 두 사람의 애정행각을 지켜본다는 것도 모른 채, 에블린은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숨을 헐떡거리며 그를 받아들여야 했다.

농밀하게 얽히는 입맞춤은 거칠고 끈질겨서 숨이 벅차오를 정도였다.

참으로도 이상했다.

분명히 다시는 보기 싫을 만큼 체이서가 싫었는데, 여전히 싫음에도 어째서 고작 입맞춤 한 번에 이리 심장이 요란하게 뛰는 것일까.

체이서가 세자르를 향해 질투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 탓일까, 아니면 욕구가 느껴지는 입맞춤 때문일까.

모조리 내다 버렸다고 생각한 설레는 마음이 단 한 번의 입맞춤에 봉인을 풀린 듯 날뛰기 시작했다.

‘정신 차려, 에블린. 이따위 나약한 마음으로 어떻게 시간을 돌리겠다는 거야?’

에블린은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그를 다시금 밀어내려고 했다.

마침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놀라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려고 했으나 체이서는 집요하게도 에블린을 놔주지 않았다.

결혼식 때보다 더욱 끈질긴 입맞춤에 결국 에블린은 그를 말리는 것을 포기하고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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