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73)화 (73/159)

73화

세자르 필베르타는 그의 아버지인 필베르타 공작의 병환을 신경 쓰느라 다른 이들보다 뒤늦게 봄 무도회장에 도착하였다.

“오래간만에 뵙네요, 소공작.”

“그간 잘 지내셨나요?”

“요즘 공작님께서는 어떠세요? 어서 쾌차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셔야 할 텐데.”

“제가 아는 실력의 뛰어난 의사가 있는데 소개시켜 드릴까요?”

주위의 지긋지긋한 관심에도 세자르는 웃으며 익숙히 제게 접근하는 이들을 상대했다.

“걱정은 고맙지만 괜찮습니다. 아버지께서 가문의 주치의가 아닌 의사는 반기질 않으셔서요. 그래도 다행히 예전보다는 나아졌습니다. 조금 괜찮아지니 하루빨리 부인을 들이라며 성화시더군요.”

가벼운 농담과 함께 분위기를 환기하자 대화를 나누던 이들이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저는 아버지가 최우선이기에 아직 결혼 생각이 없지만요.”

진심이 섞인 세자르의 말에 모두 감탄을 하며 은근히 그 말을 거들었다.

“그럴 게 아니라 어서 빨리 부인을 들여 공작님이 안심하실 수 있게 해 주셔야죠.”

누군가 용기 내어 한 말에 그의 옆자리를 탐내는 이들이 거들며 동조하기 시작했다.

“맞아요, 하루빨리 부인을 들여 손자를 보시는 게 공작님께서 바라시는 일일 겁니다.”

“내정이 안정되어야 가문이 탄탄히 흘러가는 법입니다.”

“맞습니다. 루이사 공작께서도 부인을 들이신 후로 표정이 많이 좋아지지 않았습니까? 옆에 누가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여유가 생기는 거랍니다, 소공작. 그러니 그대가 괜찮다면 한번 내 손녀를 소개…….”

나이가 지긋한 노백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세자르가 깜짝 놀라 물었다.

“루이사 공작께서는 병환에 누워 계시지 않습니까? 새로운 부인을 들이신 겁니까?”

충격받은 얼굴에 모두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재미난 유머를 들었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 보니 소공작이 대륙 끝자락에서 마물 토벌에 힘쓰고 있었다는 걸 깜빡했습니다.”

“엊그제 도착하였다 하셨죠? 그렇다면 소식에 늦을 수밖에 없겠네요. 소공작께서 결혼식을 올린 뒤 무사히 공작 작위를 계승받았답니다.”

세자르는 너무도 놀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체이서가? 결혼했다고?’

그러고 보니 아버지의 병환 소식에 수도로 복귀하자 보좌관이 수도에서 있었던 일을 정리해서 보고할 때, 그러한 이야기가 있던 것도 같다.

당시 필베르타 공작이 쓰러진 것에 놀라 귀담아듣지 못한 탓에 단번에 기억이 나지 않았나 보다.

‘어쩐지, 아버지께서 갑자기 결혼 타령하신다 싶더라니.’

“아, 들었던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연인과 결혼했다지요.”

“그럼요, 공작님께서 부인을 굉장히 아낀다고 들었습니다.”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진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세자르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저 멀리 있는 체이서에게로 향했다.

그는 아카데미 시절과 변함없는 여유로운 모습으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카데미 시절, 세자르와 체이서는 서로 1등과 2등의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인 만큼 체이서가 어떤 인물인지 누구보다 자세히 알고 있었다.

체이서는 누구도 자기 위에 있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듯 언제나 세자르의 우위에 섰고, 노력하는 그를 향해 자신이 있는 한 영원히 2등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란 말을 웃으며 내뱉는 오만한 이였다.

오로지 가문과 자기밖에 모르는 이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결혼 또한 제 입맛대로 가문을 다스리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서 실행했을 것이다.

“그렇군요, 그것참 축하할 일이네요.”

열등감에 비틀어지는 속마음과 달리 세자르는 웃음을 내뱉으며 가볍게 대화 주제를 돌렸다.

그럼에도 불쾌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건 아마도 이곳에 나서기 전까지 이어지던 아버지의 폭언 때문일지도 모른다.

세자르는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며 무도회장을 떠났고, 충분히 시간도 보냈기에 그만 저택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던 중 반대편 복도에서 걸어오던 한 여인을 발견했다.

기분이 상한 일이라도 있었는지 씩씩거리며 옮기는 발걸음에는 화가 실려 있었다.

세자르는 모른 척 지나가려다 무심코 그녀의 얼굴을 보고서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냥 지나치기에는 여인의 외모가 너무나도 아름다웠던 것이다.

물결이 굽이치는 것 같은 아름다운 황금빛 머리칼, 하얀 얼굴 위에 길게 내린 속눈썹을 보는 순간 세자르의 가슴이 두근거리며 떨려왔다.

‘누구지?’

올해 갓 성인이 되었는지 그녀의 가슴 한쪽에는 에트레를 상징하는 봄꽃 코사지가 달려 있었다.

성인이 된 후 줄곧 대륙 끝자락에서 제국을 수호하느라 여인에게 관심이 없던 그였기에 그녀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이름을 알아야 인사를 건넬 수 있을 텐데.’

초조한 마음으로 머리를 굴리던 그때, 갑자기 여인이 균형을 잃고 넘어지려고 했다.

세자르는 고민할 틈도 없이 단번에 뛰어가 그녀를 붙잡아 저도 모르게 허리를 잡고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괜찮으십니까, 영애?”

맞닿은 피부 너머로 놀랐는지 빠르게 뛰는 그녀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어디 다치신 곳은 없나요?”

“아…….”

나지막한 탄식과 함께 여인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마치 여름의 색을 담아 놓은 것만 같은 연녹빛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세자르는 제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름을 느꼈다.

한눈에 반한다는 감정이 이런 것일까.

맞닿은 피부에서 느껴지는 빠른 심장 고동 소리가 자신의 것인지 혹은 이름 모를 아름다운 영애에게서 나는 것인지 헷갈렸다.

“네, 괜찮습니다. 그러니 이만 놓아주시겠어요?”

여인이 당황한 얼굴로 주위를 살피며 말하자 그제야 세자르는 제가 처음 보는 여인의 허리를 멋대로 만졌다는 것을 깨닫고선 화들짝 놀라 손을 뗐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아닙니다. 어려움에 부닥쳤다면 도와드리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외모만큼이나 고운 목소리에 세자르는 심장이 더욱 떨려왔지만 내색하지 않고 무사히 말을 이어 갔다.

“제 이름은 세자르 필베르타라고 합니다. 괜찮다면 영애의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

다정한 물음에 에블린은 자신을 소개한 세자르를 가만히 응시했다.

‘수도에 나를 모르는 이도 있나?’

체이서가 시끌벅적하게 소문을 퍼트린지라 수도 내에 루이사 공작 부부의 사랑 이야기를 모르는 이가 없었고, 에트레가 되었으니 모두 자연스럽게 에블린을 알아보고는 했다.

‘세자르 필베르타라면 필베르타 공작가의 소공작이니 충분히 알 법도 한데.’

의아한 시선에 세자르가 민망한 듯 고개를 붉혔다.

“죄송합니다, 제가 수도에는 오래간만인지라. 그간 변경에서 임무를 수행 중이었거든요.”

“그러셨군요.”

순간이지만 의심하였던 것이 미안해 에블린은 평소보다 더욱 환히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제 이름은 에블린 루이사라고 합니다.”

“그렇군요, 루이사 가문의……. 잠시만, 루이사라고 하셨습니까?”

“예.”

“……제가 알기로는 루이사 공작가에 여식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세자르의 당황스러운 목소리에 에블린은 부끄럽다는 듯,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얼마 전에 결혼하여 남편의 성을 받았답니다.”

에블린이 들어 올린 왼손 약지에 두 사람의 결혼반지가 반짝하고 빛이 났다.

“아, 그, 그러셨군요.”

눈에 띄게 놀라 하며 굳은 모습은 오히려 에블린이 당황스러워할 정도로 급격한 표정 변화였다.

세자르는 빠르게 제 표정을 갈무리하더니 대화를 이어 갔다.

“체이서가 결혼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설마 이렇게 곧바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제 남편과 친분이 있으신가요?”

“아카데미 동기였습니다.”

“그렇군요. 그이에게 아카데미 시절 이야기는 자세히 들어 본 적이 없는지라 뭔가 신기하네요.”

에블린의 말에 세자르의 머리가 팽팽히 돌아갔다.

첫눈에 반한 여인이 유부녀라는 충격도 잠시, 우선 그녀에게 호감을 사고 싶다는 마음이 든 것이다.

“체이서는 항상 교내 1위를 손에 쥐는 우수한 학생이었습니다. 공부면 공부, 검술이면 검술, 능력이면 능력. 어느 하나 부족할 것 없는 친구였죠.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세자르는 필사적으로 마음에도 없는 체이서의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것이 에블린의 화를 더욱 불태운다는 것도 모른 채.

***

체이서는 대화를 마치고선 무심코 주위를 살펴보다 무도회장에 에블린이 없는 것을 확인했다.

‘어디 간 거지?’

잠시를 못 참고 그사이에 자리를 비운 건가.

“공작 부인이라면 잠시 쉬러 휴게실로 향하셨답니다.”

마침 체이서의 곁을 지나가던 라리사가 그가 누군가를 찾듯 두리번거리자 슬쩍 정보를 던져 주고 사라졌다.

체이서는 작게 혀를 차고서는 제게 다가오는 이들을 제치고서는 무도회장 밖으로 나섰다.

치료제 개발 건과 관련하여 질문이 워낙 많아 잠시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그사이에 사라지다니 역시 홀로 두는 게 아니었다.

‘무슨 생각으로 혼자 휴게실을 향한 건지.’

호위도 동행하지 않고, 달랑 시종과 함께 갔다는 말에 체이서의 발걸음이 저도 모르게 빨라졌다.

결혼식 이후 에블린은 묘하게 순응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것을 보여 주는 것 같았지만 분명히 달랐다.

에블린은 체이서가 원했던 것처럼 수동적인 자세로 그를 대하고는 했으나 그 이상으로 관계를 개선할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

며칠간 체이서가 그녀를 만나지 않았음에도 무엇을 했는지 궁금해하지 않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알 수가 있었다.

‘정말 계약에 이상이 없을 정도로만 지내겠다는 거지.’

제가 선물해 준 꽃은 소중하게 화병에 장식하면서 정작 저에게는 관심을 주지 않으려 하는 모습이 괘씸했다.

울렁거리는 마음이 무엇 때문인지 정의 내리지 못한 채 휴게실에 도착했지만, 공작가에 배정된 휴게실은 텅 비어 있었다.

순간적으로 체이서의 머릿속으로 무수히 많은 생각이 지나갔다.

길이 엇갈린 건 아닐까, 혹시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도망을 간 건 아닐지, 그것도 아니라면 트렐로니 백작 건처럼 무슨 사고에 휘말린 건 아닐까.

체이서는 얼굴을 구기며 휴게실을 박차고 나와 복도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일단 주위를 살펴보고, 그럼에도 안 보인다면 기사들을 풀어서…….’

조급한 생각을 끝마치기도 전에 막 발을 들인 복도 너머로 익숙한 금발이 보였다.

마음을 절로 평온하게 해 주는 특유의 기운에 체이서는 순간적으로 안심하며 그쪽으로 향하다 곧 발걸음을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에블린이 낯선 사내의 품에 안겨 있었기 때문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