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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72)화 (72/159)

72화

수도의 귀족들이 모두 고대하던 봄 무도회 날이 밝았다.

공작가에서 열린 티 파티 이후로 체이서는 에블린이 처음 저택에 왔을 때처럼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가 며칠간 집무실에서만 시간을 보냈기에 명색이 부부임에도 오래간만에 얼굴을 마주 보게 되었다.

“이만 가지.”

간만의 만남에도 체이서는 별다른 말 없이 에블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며 주위를 돌아보자 치장을 도와주었던 하녀들이 아쉬워하는 모습이 보였다.

“체이서, 오늘은 제가 안 예쁜가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앞을 향해 있던 체이서의 시선이 에블린에게 와 닿았다.

“무슨 소리야, 에블린. 누가 그리 말하기라도 하던가? 내 눈에는 누구보다 네가 제일 아름다워.”

“평소와 달리 그런 말이 없어서 혹 옷차림이 이상한가 싶었죠.”

“그럴 리가. 백 마디 말을 해도 부족한 것을.”

안 그래도 며칠간 침실도 따로 썼는데 함께 하는 와중에도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면 고용인들 사이에서 두 사람 사이에 불화가 있으리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에블린의 속뜻을 눈치챈 듯 체이서는 일자로 굳어진 입가를 부드럽게 풀고서는 다정한 얼굴로 그녀를 에스코트하기 시작했다.

마차에 오르기 전, 주위를 둘러보자 두 사람 외에 다른 루이사의 일원들이 보이지 않았다.

“수도 귀족 대부분이 참석한다고 들었는데. 두 도련님은 함께 가지 않나요?”

“원래 두 사람은 이런 행사를 불편해해서. 우리가 참석하니 문제 될 건 없을 거야.”

두 사람을 지켜보는 눈이 있어서 그런지 체이서가 다정한 목소리로 에블린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 오르자 곧 일정한 속도를 내며 마차가 출발했다.

에블린은 누가 보지 않음에도 자세를 바르게 하고는 어둑해진 밖을 응시했다.

‘봄 무도회 날은 밖에서 축제를 한다더니. 거리가 화려하네.’

평소보다 북적거리는 사람들과 꾸며진 도시를 소리 없이 감탄하던 도중 마찬가지로 조용히 앉아 있던 체이서가 입을 열었다.

“그 외에 궁금한 점은 없나?”

체이서는 단둘만 있을 때 굳이 대화를 먼저 이어 가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그의 질문은 조금 뜻밖이었다.

‘무도회가 중요한가?’

에블린은 의아한 감정을 숨기고서는 물었다.

“봄 무도회에서 특별히 주의해야 할 게 있나요?”

“봄 무도회라고 하지만 별것 없어. 초대 황제가 봄을 맞이해서 춤을 추며 놀고 싶어 만든 정기 행사야. 그냥 대규모 친목회라고 생각하면 돼.”

“그렇군요.”

조심해야 할 부분이 없다면 더 질문할 건 없었다.

에블린이 차분히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고개를 돌리자 또다시 체이서가 물었다.

“더 궁금한 건 없어?”

“음.”

꼭 무언가를 물어봐 주기를 바라는 모습에 에블린은 머리를 굴렸다.

‘아, 혹시 이건가?’

“하소 경과 이야기가 잘 마무리된 건가요?”

반색하던 체이서가 이어진 질문에 미간을 구겼다.

“아니, 그런 것 말고. 하……, 됐다. 말을 말아야지.”

“아직인가 보군요.”

“하소 경의 반대가 있어. 설득 중이니 조금만 기다려.”

한 달 가까이 시간이 흘렀음에도 돌아오는 답은 조금만 더 기다리라는 말이었다.

‘언제부터 남의 말을 잘 들었다고 이러지? 그냥 내가 전 공작을 찾아가는 게 싫은 건가? 뭔가 눈치챘나?’

에블린은 불안함을 삼키며 물었다.

“제가 하소 경을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눠 볼까요? 곧 채혈도 해야 할 텐데 그때요.”

“에블린, 난 분명히 기다리라고 했어.”

체이서는 짧은 경고를 내뱉은 뒤 옆자리에 놓인 서류를 살펴보기 시작하는 모습은 단단히 기분이 상한 듯 보였다.

‘왜 저러지?’

영문 모를 행동에 의문을 가진 것도 잠시, 에블린은 굳이 신경 쓸 필요 없다고 생각하며 시선을 돌려 버렸다.

침묵에 익숙해진 사이, 저 멀리 보였던 황성이 어느덧 코앞까지 가까워졌다.

창밖으로 보이는 긴 마차 행렬에 에블린은 혀를 내둘렀다.

‘확실히 성인식과는 규모가 다르네.’

조금이라도 빨리 무도회장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분주히 마차를 줄 세우는 다른 귀족들과 달리 루이사 공작가의 마차는 조금의 지체도 없이 황궁 안으로 들어섰다.

이내 마차가 멈추자 건너편에 앉아 서류를 확인하던 체이서가 고개를 들었다.

“도착했나 보군.”

조금은 퉁명스러운 체이서의 목소리 뒤로 마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황성에 도착하였습니다, 공작님.”

나갈 채비를 마친 체이서는 가만히 앉아 있는 에블린을 보더니 한숨과 함께 한 마디를 덧붙였다.

“무도회에서 어디 가지 말고 내 옆에만 달라붙어 있어. 그것만 주의하면 돼.”

신경 쓸 게 없다고 하더니 에블린이 큰 행사에는 처음 참여하니 문득 걱정이라도 든 모양이었다.

에블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체이서는 그제야 안심이라도 한 듯 마차에서 내렸다.

루이사 공작 부부가 도착했다는 기사의 알림과 함께 무도회장의 문이 열렸다.

*** 

체이서의 말 그대로 봄 무도회는 특별한 것 없었다.

멋지고 아름답게 꾸민 남녀가 사이좋게 춤을 추고, 가볍게 술을 한 잔씩 곁들이며 담소를 나누다 다시 춤을 추는 등 그저 봄이 왔음을 즐기는 행사였다.

에블린 또한 체이서와 양껏 춤을 추었고, 주변에서 밀려오는 인사 세례에 입가의 미소를 지울 틈도 없이 사람들을 상대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함께 어울리는 것은 잠시였다.

체이서는 주위의 부름에 에블린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떴고, 에블린은 주위의 귀부인들과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자기 옆에만 붙어 있으라더니.’

끊임없이 춤추고,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사람을 굉장히 지치게 했다.

‘그래도 요새는 체력이 좀 좋아진 것 같았는데.’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무도회장에서 쓰러진 공작 부인으로 신문에 기사가 날지도 몰랐다.

에블린은 비루한 제 몸 상태에 속으로 쓴 눈물을 삼키고서 저를 중심으로 대화를 나누는 여인들에게 양해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쉬고 싶다는 말에 몇몇은 따라오고 싶어 했으나 에블린은 혼자 있고 싶다는 말과 함께 겨우 무도회장을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시종의 안내에 따라 파우더룸으로 향하는 도중, 복도 끝에서 익숙한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하소 경?”

“앗,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공작 부인. 그동안 건강히 잘 지내셨나요?”

“그럼요.”

“왜 혼자십니까? 설마 단장님께서 부인을 혼자 두신 겁니까?”

“잠시 쉬고 싶어 홀로 나왔어요.”

하소 경의 옷차림이 평소와 같은 기사단 제복을 차려입은 모습을 보니 무도회장에 참여한 건 아닌 것 같았다.

‘빠져나오기를 잘했네.’

“잠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시간 괜찮나요?”

“이번에는 그때와 달리 시간을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눈치를 주는 단장님도 계시지 않으니까요.”

첫 만남 때 함께 차를 마시고 싶었다며 아쉬움을 토해 내는 솔직한 말에 에블린은 입가를 가리고 가볍게 웃었다.

두 사람은 시종을 먼저 보낸 뒤, 인적이 드문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긴히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 걸까요?”

“다름이 아니라, 하소 경께서 제가 마물을 마주하는 것을 반대한다고 들어서요. 물론 위험한 일이기는 하지만 치료제 개발에 혹 도움이 될지 몰라서 주기적으로 마물을 마주 보며 확인해 보고 싶거든요.”

에블린은 이 기회에 하소를 설득하자 싶어 입을 열었지만 돌아오는 건 예상외의 답이었다.

“네? 마물을 마주한다니요? 반대한다니요?”

영문 모를 표정은 꼭 이 사실에 대해 처음 듣는 것만 같이 보였다.

“공작 부인, 물론 치료제 개발에 서두르고 싶은 마음은 알지만, 마물을 직접 마주하는 건 위험한 판단이라 생각됩니다만.”

하소 경의 진지한 물음에 에블린은 머리라도 한 대 맞은 사람처럼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하소 경, 혹시 공작저 별관에 방문해 본 적 있으신가요?”

“예? 아, 아. 그럼요. 선대 공작님을 보고 직접 진단도 해 보았습니다. 알다시피 꽤 크게 앓고 계셔서 함께 치료할 방안도 고민하고 있었고요.”

전 루이사 공작이 거론되기를 꺼리는 반응을 보아하니 하소 또한 공작의 정체는 분명히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에블린은 침착히 다시 물었다.

“체이서가 하소 경에게 말하지 않았나요?”

“최근 전해 들은 건 잠시 채혈을 미루자는 사항 정도였습니다만…….”

하소가 에블린의 눈치를 보며 말하다 점점 험악해지는 그녀의 얼굴에 말끝을 흐렸다.

“혹 제가 전달받지 못한 사안이 있었을까요?”

조심스러운 질문에 에블린은 쉽사리 답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참아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 

피곤함에 지쳤던 것도 잊어버릴 만큼 치솟은 화가 머릿속을 지배했다.

전 루이사 공작이 에블린의 말에 반응한 것 같다고 하였을 때, 하소는 진심으로 놀라워했고 주기적으로 관찰하면 좋을 것 같다며 조심스레 제 의견을 건네었다.

“아무래도 단장님께서 부인이 위험에 처하실까 봐 고민하신 모양입니다. 제가 잘 설득해 보겠습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생각해 보니 그이 마음도 이해가 가고……. 때가 되면 어련히 알아서 말해 주겠죠.”

“제가 타이밍 봐 가며 적당한 때 물어보겠습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만 믿어 달라며 하소는 듬직한 발언을 끝으로 자리를 벗어났지만, 에블린은 그러지 못하였다.

‘뭐? 하소 경이 반대해? 농락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치밀어 오르는 분노는 생각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더욱더 크게 타올랐다.

‘왜 반대를 한 거지? 내가 마물과 가까이하는 게 그리 싫었나?’

체이서가 앞에 있다면 미친 사람인 척 당장 멱살을 잡고서 물어보고 싶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고, 내가 원하는 일은 뭐든 막을 거냐고, 아직도 믿음을 갖지 못 했냐고!

일부러 전보다 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지냈건만 결국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체이서는 여전히 에블린을 믿지 못하고 있는 주제에 그녀는 자신을 믿어 주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면모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의 말을 믿으며 기다린 게 잘못이지. 그래, 어차피 죽을 거 그냥 내 멋대로 할걸!’

최대한 의심받지 않고 거사를 마무리하려고 했건만 체이서의 농락에 에블린은 평정을 잃었다.

차라리 먼저 공작저로 돌아가 끝을 봐야겠다며 주먹을 불끈 쥐는 순간, 뚝 하고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반응할 틈새도 없이 발을 삐끗하며 균형을 잃고 쓰러질 뻔한 그 순간.

“괜찮으십니까, 영애?”

누군가가 다급히 넘어질 뻔한 에블린을 부축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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