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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71)화 (71/159)

71화

익숙한 목소리에 에블린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체이서가 살짝 고개를 숙인 채, 다정한 눈빛으로 에블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가 언제 그런 약속을 했다고?’

에블린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말을 삼키고서는 벤치에서 일어났다가 저도 모르게 또다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체이서의 한 손에 거대한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아주 화려해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한 꽃다발이.

에블린은 흔들리는 두 눈을 진정시키고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일찍 돌아오셨네요?”

“오늘이 부인의 첫 티 파티라 무리할까 봐 일찍 돌아왔지.”

체이서는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에블린에게 꽃다발을 건네주었다.

“어머나…….”

옆에 앉아 있던 라리사에게서 미묘한 감탄이 섞인 탄성이 터져 나왔다.

받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커다란 꽃다발이니 놀랄 법도 했다.

“고마워요. 꽃이 참 아름답네요.”

두 손으로 겨우 받아든 꽃다발은 겉보기가 화려한 만큼 향긋한 꽃내음이 풍겼다.

“아무리 아름답다고 한들 당신에 비할까.”

“……당신도 참.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닌데.”

체이서가 아무렇지 않게 건네는 경악스러운 말에 에블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라리사에게로 향했다.

그제야 체이서는 지금껏 없는 사람처럼 무시하고 있던 라리사에게 시선을 주었다.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루이사 공작 각하.”

“반갑습니다, 밀리오 영애. 애석하게도 부인은 내일 나와 나들이를 가기로 하였으니 약속은 다음으로 기약해 주면 고맙겠군요.”

“예, 선약이 있다면 응당 그래야지요.”

라리사가 먼저 물러나겠다며 인사를 하자 체이서는 가볍게 고개를 까닥이고는 다시 에블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체이서의 등 뒤에 선 라리사는 할 말 많은 표정으로 얼굴을 구겼다가 에블린의 시선을 느끼고선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럼 다음에 보아요, 에블린. 편지 기다리고 있을게요.”

라리사가 정원을 빠져나가고,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체이서가 낮은 목소리로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알려 주었다.

“갔군.”

“그럼 나도 이만 갈게요. 주최자가 오래 자리를 비워 둘 수는 없으니.”

에블린이 라리사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몸을 틀자 체이서 또한 별말 없이 그녀의 옆자리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꽃은 오래간만이네.’

에블린은 품에 끌어안은 꽃다발에서 흘러나오는 향기에 아련한 과거를 떠올렸다.

‘애들도 봄이 되면 들꽃을 꺾어다 이렇게 꽃다발을 만들어 주고는 했었는데.’

비록 지금 품에 안긴 꽃다발에 비하면 여러모로 부족한 면이 많았지만, 에블린이 봄에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기도 했다.

‘이 사람은 언제쯤 허락해 줄 생각인 걸까.’

공작이 에블린의 말을 알아듣는 것을 확인 후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그에 대해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조금의 언급도 없었다.

‘아직 나를 못 믿는 걸까?’

익숙한 침묵 속에서 함께 걷고 있자니 체이서가 넌지시 물었다.

“언제부터 그리 친해졌지?”

혼자 골똘히 생각에 잠긴 터라 제대로 듣지 못한 탓에 에블린이 놀라 되물었다.

“네?”

“밀리오 후작 영애랑 말이야.”

에블린은 의아해하면서도 성실히 답해 주었다.

“아, 라리사와는 오늘부터 친해지기로 했어요.”

“친근하게 이름도 부르는 사이인가? 후작 영애도 너를 이름으로 부르던데. 고작 두 번 만난 사이에?”

“못 할 이유가 있나요?”

황당한 마음에 되물었지만, 체이서는 뭐가 불만인지 불퉁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명색이 공작 부인인데 아무나 친구를 둘 수는 없잖아요.”

라리사는 작년 에트라였기에 어울리기 부족하지도 않았다.

덤덤한 에블린의 말에 체이서가 못마땅하게 말했다.

“가까이 두면 이상한 소문이 퍼질 거라는 생각은 못 했나?”

탓하는 듯한 목소리에 에블린은 걸음을 멈추고서는 옆으로 돌아보았다.

“왜 이상한 소문이 퍼질까요? 두 사람이 약혼했던 사이도 아닌데?”

“에블린 너는 후작 영애가 신경 쓰이지도 않나?”

“……제가 왜요?”

에블린이 진심으로 이해 안 간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두 사람이 내연 관계도 아니고, 만약 내연 관계라고 해도 우리 관계에 변화가 있을까요?”

“뭐?”

“처음 계약할 때 제가 말했잖아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언제든 이혼을 요구해도 괜찮다고.”

이런 영양가 없는 대화에 더 기력을 쏟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이혼은 치료제가 개발된 후 진행되면 좋겠어요. 치료제 때문에 괜히 곁을 맴돌다가 새로운 공작 부인에게 괜히 의심받고 싶지는 않은지라.”

“하.”

체이서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헛웃음을 내뱉고서는 앞서 걷기 시작했다.

‘가끔 이상한 말을 뜬금없이 한단 말이야.’

언제나 제멋대로인 것 같다며 뒤따라 걷는데 큰 보폭으로 앞서가던 그가 우뚝 멈추어 섰다.

“난 내연 관계를 두는 여자는 없어.”

“네, 만약을 예시로 든 거였어요.”

“만약도 없어.”

단호한 대답에 에블린은 멀뚱히 눈만 깜빡였다.

어찌 대답을 해 줘야 할지 모르겠어, 화가 난 것 같은 뒤통수만 바라보는데 체이서가 휙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에블린의 예상대로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에블린, 너 또한 마찬가지야. 내게 애인이 없으니 너도 없어야 하는 거라고.”

“그럼 당신이 애인이 생긴다면 나도 만들어도 된다는 소리인가요?”

분위기가 심각한 것과 별개로 진심으로 궁금하였기에 물어보았으나 돌아오는 건 은근한 비난이었다.

“……정말 사람 복장 터지게 하는 데 재주가 있단 말이야.”

체이서는 한숨을 내쉬고서는 단호히 말했다.

“확실하게 말해 주지. 애인은 안 돼.”

“알겠어요.”

에블린의 빠른 대답에 체이서는 그제야 잔뜩 구겼던 미간을 피고는 그녀의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가 내일 일정이 있었던가요?”

“없어도 만들면 그만 아닌가.”

아무래도 체이서는 라리사와 자신이 어울리는 것이 처음부터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그러니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며 둘 사이의 사적 만남을 막은 것 같았다.

‘루이사 공작가와 밀리오 후작가가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가문도 아닐 텐데.’

“봄 무도회가 코 앞이니 내일은 무리예요.”

“그럼 후작 영애와의 나들이도 가지 마.”

어차피 시간이 되지 않기에 거절하려고는 했었지만, 에블린은 굳이 그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걸까?’

어쩌면 라리사가 체이서를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것만큼 체이서 또한 라리사에게 비슷한 감정을 품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안 좋은 사이인데 연인 취급을 해서 기분이 상한 걸까?’

“왜 답이 없지?”

“굳이 말을 해야 아나요. 이제 당신이 하지 말라는 짓은 안 해요.”

“바람직한 자세야.”

흡족한 미소에 어이없어하는 것도 잠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체이서가 에블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여기서부터는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는 게 좋겠어.”

“그래요.”

남들의 눈에 완벽한 부부로 보일 만큼 연기하는 것은 이제 익숙해졌다.

에블린은 입가에 자연스러운 미소를 띠고는 함께 티 파티장으로 들어섰다.

주변의 부러운 시선과 함께 사랑하는 부부의 모습을 모두에게 각인시켜 주며 티 파티는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 

목욕을 끝마치고 나온 에블린은 침대에 누우려다 말고 한쪽에 고이 놓인 꽃다발을 바라보았다.

에블린의 시선이 한참이고 그곳에 머물자 마야가 슬쩍 다가와 눈치껏 물었다.

“마님, 화병을 가져 올까요?”

끔찍한 남자가 준 쳐다도 보기 싫은 꽃이건만 왜 이렇게 눈에 밟히는지, 에블린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렇게 말할 걸 예상했었는지 마야는 금방 화병을 준비해 왔다.

‘이런 사사로운 잡일까지 마야가 직접 할 필요는 없는데.’

에블린은 오래간만의 재회를 회상하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 협박이 있던 날 후, 체이서는 별관 사건 직후 구금시켰던 마야와 로피의 벌을 중지시켰다.

에블린이 잘못하였음에도 두 사람이 벌을 받는다는 생각에 괴로웠었는데 이를 알기라도 하듯 체이서는 두 사람을 다시 에블린에게로 보내 준 것이었다.

주인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하였다며 슬퍼하는 로피와 달리 마야는 에블린의 모습을 보며 무언가 짐작이라도 한 듯 사색이 된 얼굴이었다.

‘마야는 알고 있었지?’

그리 묻는 에블린의 말에 돌아온 것은 죄송하다는 답뿐이었다.

그제야 마야가 보여 주었던 어색한 행동들이 모두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마야가 하녀장이 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으니, 그녀의 평판과 실력이 좋은 것과 별개로 다른 하녀장 후보들이 공작에게 모두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에블린은 마야의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였으나 그녀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지 그날 이후 직위에 맞지 않는 궂은일을 삼가지 않고 꾸준히 에블린의 곁을 지켰다.

‘내가 별관에 가지 않았더라면 지금 보다 더 나은 상황이었을까?’

무심코 처음 체이서가 꽃다발과 선물을 공세 했을 때가 떠올렸다.

슬퍼하던 에블린을 위로해 주던 다정한 체이서의 모습을 떠올리니 누군가 심장을 조이는 듯 가슴 속이 아리는 것만 같았다.

체이서에게 설레었던 기억들은 떠올리는 것만 해도 서글픈 고통이 되어 찾아왔다.

메마른 감정과 어울리지 않은 생기있는 꽃들을 보고 있으니 후회의 감정이 싹트기라도 하나 보다.

에블린은 꽃을 보며 설레는 제 감정을 애써 무시하였다.

화병에 꽃을 모두 정리할 때쯤, 막 집무를 마친 체이서가 피곤한 낯으로 침실에 들어섰다.

그는 깨어 있는 에블린을 보며 놀라 우뚝 멈춰 섰다.

“……아직 안 잤나?” 

“꽃을 좀 정리하느라요. 마침 다 끝났어요.”

에블린이 시선을 주자 마야가 꽃이 가득한 화병을 테라스 근처로 가져다 놓았다.

체이서는 제가 선물해 준 꽃다발이 화병에 장식된 것을 보며 마치 신기한 물건을 보듯 한참이고 그곳에 시선을 두었다.

“무슨 문제 있나요?”

“아니, 아무런 문제도 없어.”

낮에 보았던 불쾌한 모습은 어디 갔는지 체이서는 퍽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런 체이서의 뒷모습을 보며 에블린은 결심했다.

‘봄 무도회까지만 기다려 보자. 그 후에도 답이 없다면 홀로 찾아가 공작과 결판을 지어야지.’

제 추측이 설사 의미 없는 죽음이 되어 비극적인 결말이 나도 악몽과도 같은 이 생활보다는 나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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