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
“…….”
에블린과 체이서는 믿지 못할 광경에 놀라 서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내 말을 알아들은 건가?’
예상치 못했던 일에 에블린은 당황하다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반지는?’
마물이 몸을 일으킨 덕에 숨겨져 있던 발이 드러났고, 에블린의 예상대로 가문의 인장이 박힌 반지가 반짝였다.
‘있다.’
일단 일차적인 목표는 달성하여 안심되었지만, 동시에 의문이 생겼다.
‘정말로 마물이 내 말을 알아들은 걸까?’
체이서가 재촉하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마물을 보고 있자 에블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한 걸음만 뒤로 가 보실래요?”
그날 흉포했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마물이 에블린의 말에 따라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에 에블린과 체이서는 동시에 서로를 마주 보았다.
“제 말을 알아듣는 게 맞는 것 같네요.”
침착한 에블린의 목소리에 체이서는 곧바로 표정을 갈무리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곳에 드나들 기회를 얻은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조금 더 말해 볼까요?”
“……한 번만 더 말을 걸어 봐.”
“공작님, 오늘은 이만 가 볼게요.”
그 말이 끝나자 공작이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있던 곳으로 돌아가세요. 다음에 또 찾아올게요.”
커다란 눈을 몇 번이고 깜빡이며 가만히 서 있던 공작은 한참이나 에블린을 내려다보더니 처음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
체이서는 황급히 에블린을 끌고서 방을 나섰다.
그는 어지간히 당황했는지 2층으로 올라가는 내내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그건 에블린 또한 마찬가지였다.
‘왜 공작이 내 말을 들은 거지?’
알 수 없는 의문이 두 사람 사이를 차지했다.
2층의 아무 방에나 들어오고 나서야 체이서는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제가 묻고 싶은 말이에요. 저는 그저 공작님이 제 말을 알아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그에 체이서는 한참이나 침묵을 유지했다.
깊은 생각에 잠긴 얼굴에는 혼란이 가득해 보였다.
“아무래도 제 예상이 맞는 것 같네요. 공작님은 제 말을 알아듣는 것 같아요.”
“말이 안 돼, 분명 말이 안 되는데…….”
체이서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분명 공작은 널 죽이려고 하지 않았나?”
“맞아요. 두 번이나 붙잡혀서 죽을 뻔했죠.”
“그때 공작이 네 어떤 말을 알아들었지?”
“처음에 붙잡혔을 때 저를 곧바로 잡아먹으려고 하길래 이것 놓으라고 한참 소리를 질렀던 것 같아요.”
답지 않게 평정을 잃은 체이서의 모습에 에블린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원인을 알 때까지 제가 당분간 공작님을 만나 보는 건 어떨까요? 몇 번 마주하다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하지만 에블린이 원하는 답은 쉽사리 튀어나오지 않았다.
“안 돼. 혼자는 위험해.”
단호한 말에 에블린은 욱하고 올라오는 감정을 누르고서는 사근사근한 어조로 말을 붙였다.
“그렇다면 당신과 함께 와서 확인해 보면 되잖아요. 당신이 시간이 안 된다면 앞을 지키고 있는 기사들과 함께 보아도 되고요.”
“당장은 안 돼. 일단 상황을 조금 지켜보고…….”
“언제까지요? 이 일이 치료제 개발에 진전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뜸을 들일 이유가 있나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튀어나온 말에도 체이서는 냉정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이 건은 하소 경과 이야기도 나눠 볼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봐.”
“하지만…….”
“여러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하니 하는 말이야. 괜히 쓸데없는 짓 벌이며 일 키우지 말고 내가 말하기 전까지 가만히 있어.”
어느새 체이서는 침착한 모습으로 이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냉정한 말과 함께 그녀의 자존심을 깎아내리는 말에 울컥했지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황에서 더욱 보챈다고 한들 체이서가 마음을 바꿀 것 같지도 않으니 재촉할 수 없었다.
‘괜히 이상한 의심을 받을 수는 없으니까.’
“……좋아요.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 기다리고 있을게요.”
에블린은 보채는 대신 체이서의 의견을 수용한 척, 한 걸음 물러섰다.
“대신 상황이 정리되면 곧바로 말해 줘요. 숨기지 말고.”
에블린의 말에 체이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생각보다 상황이 어렵게 흘러갈 것 같지는 않네.’
만약 정말로 공작이 에블린의 말을 알아듣는 것이라면 반지 또한 수월히 획득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조급하게 마음을 먹으면 되던 일도 망치기 마련.
에블린은 끓어오르는 감정을 가다듬다 무심코 창밖을 응시했다.
모든 게 엉망이 된 날 보았던 천둥과 번개가 내리치는 궂은 날씨와 다르게 화창한 햇빛이 드리우는 것이 꼭 희망찬 앞날을 비춰 주는 것만 같았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수녀님. 꼭 제가 가주의 반지를 얻어서 모든 걸 원상태로 돌릴 테니까요.’
***
휴가받은 사흘이 지난 후, 공작 위를 계승받은 체이서는 무사히 루이사 공작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에블린 또한 루이사 공작 부인이 되었다.
안주인이 되었으니 본격적으로 집안의 내정을 신경 쓰라며 체이서가 친히 일감을 던져 준 덕에 별관으로 관심을 돌릴 틈도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었다.
바쁜 와중에도 에블린은 체이서가 별관 출입을 허가해 주기를 기다렸으나 그는 한참이 흘러도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느새 봄 무도회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봄 무도회가 열리기 전, 에블린도 주위의 조언을 받아 미루고 미뤄 왔던 티 파티를 열게 되었다.
초대 손님은 수도의 귀부인과 에트라의 봄에서 만난 동갑 영애들, 그 외에도 루이사 공작 부인이 주최하는 오래간만의 티 파티다 보니 초대 손님이 보통의 티 파티보다 많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티 파티보다는 야외에서 열리는 규모가 큰 가든파티처럼 되어 버렸기에 신경 쓸 부분이 더 많아져 버렸다.
“결혼 축하드려요, 공작 부인.”
“오래간만에 찾아오는 공작저는 꽤 많은 게 변했네요. 그럼에도 여전히 고풍스럽고 좋아요.”
“정원이 참 아름답게 꾸며졌어요. 공작 부인의 심미안이 정말 훌륭하신 것 같아요.”
결혼을 축하하는 사람들, 공작가와 연이 있었음을 은근히 어필하는 사람들, 자연스럽게 아부하는 사람들 속에서 에블린은 정신없이 손님을 맞이해야 했다.
‘사람을 맞이해 보니 진짜 공작 부인이 된 게 실감이 나네.’
잠시 숨을 돌릴 겸, 티 파티가 열린 곳과 멀리 떨어진 정원으로 발걸음을 돌렸는데 그곳에서 오래간만에 보는 인물을 만났다.
“어머, 공작 부인.”
기사단에 갔을 때 만났던 라리사 밀리오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던 것이다.
그간 답장을 하지 않았음에도 끝없이 편지를 보내 주었던 게 떠올라 이 자리가 어색해졌다.
하지만 라리사는 내색하지 않고 축하의 인사를 먼저 전했다.
“늦었지만 결혼 축하드려요.”
“고마워요, 라리사. 그리고 미안해요. 정신이 없어서 그동안 편지에 답도 못 드렸네요.”
“아무래도 바쁘셨을 테니까요. 이렇게 티 파티에 초대도 해 주시고, 기억하시고 라리사라고 불러 주신 것만 해도 충분해요.”
“그리 말해 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이곳에서 무얼 하고 계셨나요? 티 파티장과는 거리가 좀 먼 곳인데.”
에블린의 시선에 의아함이 서리자 라리사가 방긋 웃으며 제 사정을 이야기했다.
“사실 제가 사람 많은 곳에 오래 있지 못해서요. 잠시 자리를 피해 쉬고 있었답니다. 이제는 에트레도 아니니 억지로 자리를 버티고 있을 이유도 없고요.”
‘정말 여전히 솔직한 사람이네. 가식적인 모습만 보다 보니 훨씬 낫지만.’
에블린이 살며시 웃자 라리사가 자연스럽게 옆자리를 권했다.
“피곤해 보이세요. 괜찮다면 옆에서 조금 쉬다 가시는 건 어때요?”
친근함이 느껴지는 말에 에블린은 고개를 끄덕이곤 옆자리에 앉았다.
라리사는 의외로 더 말을 걸지 않고 흘러오는 바람을 쐬며 기분 좋은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에블린 또한 오래간만에 고요함을 즐기는데 시간이 조금 흐르자 라리사가 흥얼거리던 것을 멈추고서는 기분 좋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참 이상해요, 공작 부인.”
에블린의 시선이 향하자 라리사는 상쾌한 표정으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공작 부인의 옆에 있으면 머리가 맑아지는 것만 같아요. 제가 평상시에 두통에 자주 시달리거든요.”
“지병이 있으신가요?”
“……음, 지병이라면 지병이겠네요.”
라리사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힘겹게 입을 뗐다.
“제 입으로 말하는 건 처음이라 조금 낯서네요. 사실 제가 이능력자인데 부끄럽게도 능력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거든요. 원치 않아도 끊임없이 능력이 흘러나와서요.”
그러면서 라리사가 드레스의 소맷자락을 슬쩍 들추고는 제 팔을 들어 올렸다.
그곳에 검은색 광물로 만들어진 손가락 한 마디만 한 팔찌가 걸려 있었다.
“그래서 평소에는 능력을 억제해 주는 팔찌를 차고 다녀요. 억지로 억제가 되니 부작용으로 끊임없이 두통이 밀려오고요.”
“……힘들었겠네요.”
“그런데 이상하게 공작 부인 곁에 있으면 두통이 조금 가시네요.”
라리사는 슬피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더더욱 공작 부인과 친하게 지내고 싶었던 것 같아요. 미안해요, 저 너무 속물적이죠?”
“그때도 그랬지만 정말 솔직하네요.”
그래도 누구와 다르게 이렇게 솔직하게 나서 주니 오히려 호감이 올라갔다.
‘어차피 나도 적당히 친분을 유지할 사람은 둬야 하니까.’
이왕이면 제게 호감을 보이는 이를 옆에 두는 게 날 것 같았다.
‘생각보다 사람 보는 눈도 있는 것 같고.’
“우리가 친구가 된다면 자주는 아니더라도 함께 어울릴 시간이 많아지지 않을까요? 앞으로 저도 에블린이라고 편히 불러 줘요.”
에블린의 말에 라리사의 새침한 눈이 크게 뜨였다.
“최근 들었던 말 중 가장 설레는 말이네요!”
라리사는 꽃이 피어나듯 활짝 웃더니 이내 에블린을 와락 끌어안았다.
“내일 시간 괜찮으세요? 괜찮다면 함께 나들이를 가지 않을래요? 좋은 나들이 장소를 알아요.”
하지만 곧 들려오는 목소리에 라리사의 미소에 금이 갔다.
“그건 곤란합니다, 밀리오 영애. 에블린은 내일 나와 선약이 있는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