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두 사람 사이로 한참이나 침묵이 흘렀다.
‘쉽사리 허락하지 않을 건 알았지만…….’
차라리 안 된다고 말을 했더라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았겠지만, 체이서는 꽤 진지한 얼굴로 고민하고 있었다.
‘그만큼 이 일은 중요한 일이니까.’
체이서는 치료제를 개발하여 공작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게 주목적이라 하였다.
물론 에블린의 말은 치료제 개발과는 조금 거리가 있겠으나 새로운 반응이 나온 이상 쉽게 넘길 수 있는 사안은 아닐 것이다.
‘물론 거짓말이지만.’
에블린이 마물에게 붙잡혔을 때 마물이 잡아먹으려던 것을 멈칫하던 것을 보았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우연일 뿐.
그때를 떠올리며 급조해 낸 방안이지만 생각보다 설득력 있기에 체이서도 쉽사리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만약 마물이 에블린의 말을 듣지 않더라도 몇 번 더 확인해 보고 싶다며 앞으로 별관을 드나들 기회를 얻게 된다면 더할 나리 없이 좋을 테고.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한참을 침묵을 유지하던 체이서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마물에게 죽으러 가려는 건 아니겠지?”
조금 뜨끔했지만, 에블린은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읊었다.
“그럴 생각이었더라면 당신에게 이렇게 말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어떻게든 주위의 눈을 피해 혼자 찾아갔겠죠.”
“그것도 그렇기는 하지만.”
체이서는 무언가 찜찜한지 쉽사리 허락해 주지 못했다.
“체이서, 당신의 손에 수도원 가족들이 있는 이상 나는 죽을 생각이 없어요. 당신도 그걸 아니까 마지막 수단으로 꺼냈던 것 아닌가요?”
결혼식 전에 있던 일을 내뱉자 체이서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정말 마음을 다잡은 건가?”
“몇 번을 말해야 믿어 줄 건가요?”
에블린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어요. 당신이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별관은 가지 말아요. 나도 당신에게 의심 사는 일은 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대로 자리를 벗어나려고 하자 체이서가 에블린의 손목을 잡았다.
“이거 놔주세요.”
“왜 벌써 일어나는 거지? 아직 내 대답을 듣지도 않았잖아.”
“괜찮아요. 당시에 정신없었으니 제 착각일 가능성이 더 크잖아요. 그러니 위험을 무릅쓰고 갈 필요가 있나요.”
에블린이 그대로 체이서의 손을 놓으려고 하자 이번에는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가지. 가서 확인만 해보면 되는 것 아냐.”
“이왕 가는 김에 별관도 좀 살펴보고 싶어요. 별관은 공작저의 위엄에 맞지 않게 너무 허름하니까요.”
기다렸다는 듯 추가 요청을 하자 체이서는 그러라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피곤해 보이는 낯이었지만, 에블린은 원하는 답을 얻어 내었기에 환히 웃을 수 있었다.
체이서는 그러한 에블린의 반응을 보며 낮게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
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한 대로 별관으로 향했다.
그날과 다르게 환히 불이 켜진 별관은 어쩐지 조금 낯설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도중, 에블린은 이 일을 기회 삼아 물었다.
“마물은 어떻게 관리하고 있어요?”
“그때 보았던 대로 철창 안에 가두어 놓고 있지. 마도구로 빠져나오지 못하게 관리하는데 그날은 철창에 붙어 있어야 할 마도구가 떨어져 있었어.”
체이서는 예상보다 더 수월히 답을 해 주었다.
“아마 트렐로니 백작이 철창을 빠져나가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탓에 떨어진 것 같은데. 대충 던져 두고 나오느라 확인을 못 했어.”
그날 생각보다 손쉽게 철문이 열렸던 이유가 밝혀졌다.
“트렐로니 백작 때문에 두 번이나 죽을 뻔했네요. 아니, 하지 말라는 걸 했으니 자업자득인 걸까요?”
자조적인 농담에 체이서는 뒤따라오는 에블린을 힐끗 보더니 무어라 답하는 대신 에스코트 겸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줄 뿐이었다.
‘또 내 탓을 할 줄 알았더니. 결혼도 했으니 예전처럼 대하려는 건가?’
확실히 결혼식 직전에 보여 주었던 냉정한 모습이 거짓이라는 듯 체이서는 다시 에블린을 다정히 대하기 시작했다.
언성을 높이지도 않았고, 얄밉게 말하는 일은 있어도 비아냥거리지 않았으며,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품에 끌어안고 자는 등 마치 전처럼 돌아간 듯 행동하고는 했다.
차라리 체이서가 숨겼던 비밀이 밝혀졌던 그 날처럼 대하면 좋으련만.
다정한 척한다 해서 에블린의 마음이 풀리는 것도 아닐 텐데 참으로 속이 훤히 보이는 행동이었다.
‘조금만 참아야지.’
에블린은 당장이라도 붙잡고 있는 손을 내치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문이 고쳐졌군요.”
“그대로 뚫린 채로 둘 수는 없으니까.”
과연 새로 생긴 거대한 문 양옆으로 푸르스름한 광물이 박힌 마도구가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때와 달리 방문 앞을 지키는 기사들이 묵묵히 문을 열어 주었다.
낯설지 않은 얼굴이었다.
에블린이 표정 관리하는 것도 잊은 채 놀라 하니 웃음기 서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아봤나 보네?”
“……제 방 앞을 지키던 이들이잖아요. 어떻게 몰라봐요.”
“원래 이 앞을 지키는 이들은 두지 않았는데 말 안 듣는 누구 덕에 지켜야 할 필요성이 느껴져서 말이야.”
“다행이네요. 저처럼 오지랖 넓은 짓을 할 사람은 더 생기지 않겠으니.”
에블린은 심드렁히 말했지만, 속으로는 기사들이 무사함에 안도하였다.
‘죽인 줄 알았는데 제 수족은 쉽사리 못 내쳤나 보네.’
그나마 마음의 짐이 조금 덜었다.
‘그나저나 여전히 을씨년스럽네.’
방 안은 그때와 달리 주위의 조명 덕에 밝았지만, 철창 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건 여전하였다.
“저기 있군.”
체이서가 가리킨 방향을 보니 철창 안 구석에 마물이 제 몸을 둥글게 끌어만 채 잠들어 있는 게 보였다.
‘반지는 어디 있지?’
하필이면 발을 숨긴 채 몸을 웅크리고 있던 터라 반지가 눈에 띄지 않았다.
“……자고 있는 건가요?”
“자는 척하는 걸 수도 있겠지.”
체이서는 붙잡은 손을 놓고서는 한 발짝 앞서 철창 쪽을 향해 걸어갔다.
“마물이 되어서도 성정은 변치 않는지 약은 모습을 보이더군.”
“공작의 성정이 어땠는데요?”
“고약했지.”
체이서는 마물이 된 공작을 바라보다가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 올렸다.
“평생 만나 본 인간 중 가장 최악이라 할 수 있는 인간이야.”
냉기 어린 시선에 서려 있는 건 지독한 증오와 혐오감이었다.
이런 체이서의 모습은 처음인지라 에블린은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가 곧바로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럼 왜 공작을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건데요? 공작이 싫다면 마물이 되었을 때 죽여도 되었잖아요.”
“키워 준 부모를 그리 쉽게 보낼 수는 없지 않겠어? 지극정성으로 모시다 곱게 보내드려야지.”
효자다운 말을 하는 것치고 표정이 좋지는 않았다.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가?’
분위기를 틈타 더 물어보려고 했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눈치라도 챘는지 공작이 천천히 눈을 떴다.
‘확실히 수도원에서 봤던 마물과는 모습이 다르네.’
그때는 꼭 곰과 같이 생긴 마물이었는데 공작은 뱀을 형상화한 듯 파충류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세로로 길게 늘어진 동공을 보며 그날 밤의 기억이 떠올라 어깨를 흠칫 떨었다.
공작은 의외로 곧바로 다가오지 않고 경계하는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쉽사리 다가오지 않네요? 그때는 갑자기 철창 앞으로 뛰어왔었는데.”
“몇 번 꼬리를 불태웠더니 학습을 한 것 같더군. 꼴에 마물도 짐승이기는 한가 보지.”
체이서의 말에 자연스럽게 마물의 꼬리로 시선을 옮기니 꼬리가 도중에 끊긴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져 있었다.
“어서 빨리 확인해 봐. 저자와 더 이상 같은 공간에 있는 것도 불쾌하니.”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반응에 에블린은 고개를 끄덕이고선 마물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혼잣말하듯 말하면 되려나?’
긴장이 가득한 숨을 내뱉으며 에블린이 철창 앞으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
“공작님, 이리 와 보실래요?”
떨리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지만, 에블린이 예상했던 대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조금 더 시간을 끌어야 하는데.’
못마땅한 시선이 닿는 것만 같아 체이서 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에블린은 혼잣말하는 민망함을 감수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공작님을 해치러 온 게 아니에요. 다치게 하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할게요.”
“그렇게 말한다고 듣는다면 마물이 아니라 짐승이겠지. 그리고 마물에게 그리 예의 차린다고 한들 저자가 그걸 기억이라도 할 줄 아나?”
못마땅한 말투를 에블린은 가볍게 무시했다.
‘누가 그걸 모른담.’
마침 공작이 커다란 눈을 깜빡이기 시작했다.
무어라 조잘거리니 조금이라도 반응을 보이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효과가 없는 것 같은데. 역시 착각이었나 본데 그만하고 가지.”
인내심이 바닥났는지 체이서가 재촉하기 시작했다.
초조해진 마음이 든 에블린은 이렇게 된 이상 반지라도 무사한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에블린은 조금 더 공작을 자극하기 위해 철창 코앞까지 다가갔다.
“우리는 공작님을 원래대로 만들어 주고 싶어서 찾아왔답니다. 그러니 조금만 가까이 와 주세요.”
이쯤 되니 에블린은 저도 모르게 정말 공작이 제 말을 들어주었으면 해서 진심을 담아 말을 하고 있었다.
“소용없는 것 같은데 인제 그만…….”
체이서가 더는 참지 못하고 다시 재촉하다가 갑자기 손을 뻗어 에블린을 제 옆으로 끌어당겼다.
“왜……?”
에블린이 당황하여 체이서를 바라보았지만, 그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충격이 담긴 얼굴에 에블린 또한 천천히 체이서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믿기지 못할 광경을 눈앞에서 보고 말았다.
공작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그때와는 다르게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철창 앞까지 걸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정말 에블린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