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68)화 (68/159)

68화

에블린이 침대에서 벗어나려고 하기도 전에 체이서가 그대로 손목을 잡고 끌어당겨 그녀를 침대 위에 눕혔다.

흩뿌려진 꽃들이 공중에 휘날리자 이곳이 신방이라는 것이 다시 떠올랐다.

뒤이어 침대가 출렁이며 체이서 또한 침대 위로 눕는 게 느껴졌다.

에블린은 불안함을 이기지 못하고 다급히 허리를 일으키며 말했다.

“저는 소파에서 잘게요.”

“왜? 나랑은 도무지 한 침대에서 자지 못하겠나?”

기분이 상한 듯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 에블린은 지금까지 생각 못 했던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설마 몸이라도 섞으려는 건 아니겠지?’

예정대로 진행되는 결혼이었더라면 이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의 체이서는 어디로 튈지 몰랐기에 앞으로의 행동이 예상되지 않았다.

누가 보아도 긴장한 모습의 에블린을 보며 체이서는 쯧, 하고 짧게 혀를 찼다.

“내가 강제로 여자를 안는 취미라도 있는 줄 아나? 역시 나보다 네 윤리관이 더 이상한 것 같군.”

체이서는 에블린이 겁에 질린 모습을 보며 비웃더니 그대로 눈을 감아 버렸다.

“차라리 밖에 나가서 하녀들에게 따로 방을 준비해 달라고 하지 그래? 결혼식 첫날부터 침실을 따로 이용한 부부라니. 하녀들이 참 재미나게 수군거리겠어.”

양껏 에블린을 비꼰 체이서는 더 상대하기조차 싫다는 듯 몸을 돌려 버렸다.

에블린은 매정히 등을 보이는 체이서의 모습을 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더는 신경을 거스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쉽지 않네.’

최대한 체이서에게 협조해서 그의 의심을 누그러트려야 하는데 마음이 자꾸만 이성을 이겨 버리려고 하니 여간 곤란한 게 아니었다.

‘그래도 앞으로도 몸을 섞을 생각이 없어 보이니 그건 다행인가.’

에블린은 몸의 긴장을 풀고서는 체이서의 옆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래, 별관에 가려면 허락도 받아야 하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수는 없잖아.’

원하던 결혼식도 끝났으니 날카롭게 날을 세웠던 모습도 조금은 사그라들지도 모른다.

‘별관을 오가는 걸 허락받은 뒤에도 문제야. 반지를 어떻게 가져올지도 생각해 봐야 하는데. 마물한테 반지를 달라고 설득하는 건 무리일 것 같고.’

목표를 세웠으나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으니 이것 또한 막막한 일이었다.

풀리지 않은 실마리를 품에 안은 것만 같았다.

몸은 피곤하다고 외치고 있었지만, 자꾸만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괴롭혀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에블린이 자꾸만 몸을 뒤척이는데 잠든 줄 알았던 체이서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너무 깜짝 놀라 비명도 못 지르는 사이 체이서는 그대로 에블린을 제 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무, 무슨…….”

뒤늦게 정신을 차린 에블린이 당황해서 입을 열었다.

“적당히 좀 뒤척이지? 거슬려서 잠을 잘 수가 없잖아.”

“……수면초가 없어서 그런 거예요. 금방 잘 테니 신경 쓰지 말고 이것 좀 놔줘요.”

낮게 잠긴 목소리는 그 말을 끝으로 더 들려오지 않았다.

이어지는 고른 숨소리에 에블린은 어깨에 빳빳이 힘을 준 채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설마 지금 이대로 잠든 거야?’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려도 체이서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잠에 빠져 있었다.

커다란 체격에 감싸이듯 폭 안기자 규칙적으로 뛰는 심장 소리가 귓가 가까이서 들려왔다.

경계심도 없이 푹 잠든 모습을 보니 결혼식을 무사히 치른 오늘까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건 부질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피곤해서 제대로 된 아이디어도 떠오르지 않을 텐데.’

이렇게 가만히 체이서의 품에 안겨 있으니 처음 합방했을 때가 떠올랐다.

오늘과 마찬가지로 체이서는 잠들지 못하는 자신을 품에 안고서 재워 주었다.

번지르르한 겉모습에 속아 그에게 설렘을 느꼈다는 것이 떠오르자 에블린은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그냥 잠이나 자자.’

잠시 후, 에블린이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색색거리며 잠들자 체이서가 슬며시 눈을 떴다.

‘도대체 이 작은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피곤함에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만 같은 모습으로 잠을 자지 않고 꿋꿋하게 버틴 이유가 무엇일까.

‘캐물어 볼 수도 없고.’

누구보다 아름답지만, 불행한 결혼식을 올린 신부는 이혼을 목적으로 결혼생활에 충실히 하겠다고 답하였다.

‘일단 믿는 척을 해 줄까.’

어차피 어떻게 발버둥을 쳐도 더는 에블린이 도망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만약 그녀가 도망치는 것에 성공하더라도 결국 돌고 돌아 제 품으로 돌아올 것을 알기 때문일까.

체이서는 근래 중 드물게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웃으며 눈을 감았다.

*** 

에블린은 멍한 정신을 붙잡으며 천천히 눈을 떴다.

환한 햇살, 지저귀는 새소리.

아무리 피곤했다고 하지만 수면초가 없음에도 깊이 단잠을 잔 것은 오래간만이었다.

‘꿈도 안 꿨어.’

악몽도, 이상한 소년이 나오는 꿈도 없이 정말 만족스러운 숙면을 했다.

에블린이 기지개를 쭈욱 켜며 일어나다가 혼자 잠든 게 아님을 떠올렸다.

옆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일어났나?”

때마침 소파 쪽에서 체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몇 시예요?”

“아직 정오 조금 안 됐지.”

체이서는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며 신문을 읽고 있었다.

‘이 시간에 왜 이 사람이 여기에 있는 거지?’

편한 옷차림에 평소와 달리 흐트러진 머리칼, 여유롭고 편해 보이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만 같아 에블린이 눈을 깜빡였다.

“설마 신혼 첫날부터 일을 나가기를 바란 건 아니겠지?”

“그런 건 아니에요. 일어났는데 옆에 없길래…….”

“우리가 일어나자마자 한 침대에서 얼굴을 마주 보며 웃을 사이는 아니지 않나.”

웃음기 서린 목소리에 에블린은 그것도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다는 듯 긍정하는 모습을 뜻 모를 시선으로 보던 체이서는 읽던 신문을 덮었다.

“참, 사흘 정도 휴가를 받았으니 사흘 동안은 나와 어울려 줘야겠어.”

“휴가라면서요. 저랑 어울리는 것 보다 혼자 쉬는 게 낫지 않으세요?”

“잊었나 본데, 에블린. 우리는 이제 갓 결혼한 부부야. 그것도 너무도 사랑해서 집안의 반대를 이겨 내고 결혼한 사이.”

체이서는 차를 한 모금 넘기고서는 웃음기 서린 얼굴로 말했다.

“공작 부인의 역할을 잘 수행하겠다며? 집안의 분위기 유지에도 힘써야 하지 않겠어?”

에블린이 했던 말을 이용해 바른 소리를 하니 어찌나 얄미워 보이는지 모른다.

‘그래도 어제와 다르게 분위기는 유해 보이네.’

결혼도 했으니 에블린이 무슨 짓을 저지르더라도 더는 문제가 생기지 않으리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체이서를 더욱 방심시키기 위해서 에블린 또한 이 연극에 어울려 줄 필요가 있었다.

“알겠어요. 특별히 정해진 일정이라도 있을까요?”

에블린은 어제처럼 퉁명스럽게 대하는 대신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은 방에서 쉬고, 내일은 가볍게 외출할까 하는데.”

“그럼 보육원이랑 병원에 후원금을 전달하고, 가볍게 디센트라 거리에 다녀올까요?”

“나쁘지 않네. 마지막 날은 어떻게 할까? 뭐 특별히 하고 싶은 건 없나?”

“……하고 싶은 게 있기는 한데.”

에블린이 뜸을 들이며 말하지 않자 체이서가 의문 섞인 시선을 던졌다.

“그건 그 전날에 이야기할게요.”

“무슨 일인지 궁금하네.”

“내일 저녁까지만 차분히 기다려 주세요. 참, 식사는 하셨어요?”

체이서가 고개를 내젓자 에블린은 잘 되었다는 듯 웃었다.

“그럼 씻고 나올 테니 그 후에 함께 먹어요.”

“하녀들을 불러 주지 않아도 괜찮겠어?”

“첫날밤에 아무 일 없었다는 걸 보여 줄 필요는 없으니까요. 저야말로 괜한 소문 나는 건 사양이에요.”

에블린은 자연스럽게 제 옷차림을 정리하고선 욕실로 향했다.

냉전이 흐르던 어제까지와 달리 평화로운 휴가의 시작이었다.

***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첫날, 같은 침실에서 각자의 생활을 하면서 방으로 가져다주는 식사를 하며 평온한 시간을 보냈고.

둘째 날, 보육원과 병원에 후원금을 전달하기 위해 함께 외출을 나갔다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내일은 무얼 하고 싶은데?”

체이서는 침실로 돌아오자마자 참고 있던 질문을 던졌다.

“그리 재촉하지 않아도 천천히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에블린은 두 사람의 시중을 들던 하녀들을 모두 물리고선 체이서를 소파로 이끌어 서로 마주 보며 앉았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걸 하고 싶길래 이렇게 뜸을 들이는지.”

“우선 제 말을 듣기 전에 화내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내 심기를 거스를 만한 일인가 보네?”

에블린이 부정하지 않자 체이서가 삐딱한 자세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래, 좋아. 화 안 낼게. 네가 뭘 먼저 하고 싶다고 한 적이 없었으니 들어나 보자고.”

체이서가 팔짱을 끼며 여유롭게 턱을 치켜세웠다.

어서 말해 보라는 듯한 모습에 에블린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택 별관에 가고 싶어요.”

“……별관?”

체이서는 순식간에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물이 된 공작을 보고 싶어요.”

그는 무언가 잔뜩 말하고 싶은 듯한 얼굴로 입가를 일그러트렸다가 이내 더 말해 보라는 듯 턱을 까딱였다.

“그동안 경황이 없어 말을 못 했지만……. 당신이 도와주러 오기 전에 마물에게 한 번 붙잡혔다가 풀려났는데 순간이지만 마물이 제 말을 알아듣는 것 같았어요.”

“지금 네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줄은 알고 있나?”

“물론 제 착각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쉽게 무시할 만한 일은 아니잖아요.”

에블린은 긴장된 두 주먹을 움켜쥐며 간절한 얼굴로 말했다.

“혼자 가는 건 무섭지만 당신과 함께 간다면 무섭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러니 내일은 저랑 같이 별관에 가 주면 안 될까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