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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67)화 (67/159)

67화

드디어 결혼식 날이 밝았다.

이자벨라 황후의 호의로 체이서와 에블린의 결혼식은 황실의 연회장 중 하나인 아리아 홀에서 열리게 되었다.

건국 초기 황제가 사랑하는 황후 아리아를 위해 만든 건물로 황실의 일원이 결혼식을 올릴 때만 열리는 모두가 선망하는 결혼식 장소이기도 하였다.

“영애, 정말이지 너무 아름다우세요.”

마담 그랑티는 완벽하게 꾸며진 에블린의 모습을 보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치장을 도와준 하녀들이 그녀와 함께 칭찬을 퍼부었으나 에블린은 심드렁했다.

‘결혼식이 다가오니 이상한 꿈도 꾸네.’

꿈의 내용은 자세히 생각나지 않았지만, 분명 꿈속에 나온 장소는 루이사의 시험장이었던 익숙한 미로였다.

그곳에 자신과 낯선 소년 한 명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살가운 자신과 달리 소년의 반응은 굉장히 냉담하였다.

무능력자인 그녀가 함께 루이사가 되고 싶다고 하니 기가 찬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내가 그곳에서 친하게 지내던 애가 있었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그런 인물은 없었기에 조금 혼란스러웠으나 에블린을 부르는 목소리에 생각의 파도에서 빠져나와야 했다.

‘그래, 악몽이 아닌 게 어디야.’

수면초 덕분에 그나마 며칠간 악몽에서 벗어났으니 그걸로 되었다.

소란스러웠던 신부 대기실은 예식 시간이 가까워지자 조용해졌다.

마담 그랑티와 공작가의 하녀들은 신부의 치장이 끝나자 대기실 밖으로 나갔다. 찾아오는 가족과 손님들이 없었으니 에블린 홀로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에블린은 혼자가 되고서야 거울을 비추는 자기 모습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예쁘네.’

얼마 전까지 아팠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할 만큼 완벽한 신부의 모습이었다.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결혼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홀로 사색에 잠겨 있자 곧 황궁의 시녀가 에블린을 불렀다.

“영애, 이제 들어가실 시간입니다.”

그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천천히 식장을 향해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걷는 내내 걸음이 무거웠다.

진창 속으로, 죽음으로 향하는 길임을 알기에 더더욱.

잠시 후, 에블린이 식장 앞에 도착하자 그녀의 앞을 가로막은 커다란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황후의 손길이 닿았다는 말이 사실인지 넘볼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게 꾸며진 결혼식장 안에는 세기의 커플을 축하해 주러 모인 많은 사람이 있었다.

단상 위로는 결혼식 공증을 위해 찾아온 교황이 주례를 서고 있었고, 결혼식의 또 다른 주인공인 체이서는 단상 앞에 서 있었다.

몸에 딱 맞춰진 정장을 입고 멋들어지게 꾸며진 사내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다.

체이서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서는 에블린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선가 소공작이 넋이 나간 얼굴은 처음 본다며 짓궂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에블린은 저 가식적인 모습 아래 숨겨진 진실을 알고 있었다.

‘하고 싶지 않다.’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에블린이 망설이는 것을 눈치라도 챘을까?

체이서가 갑자기 몸을 틀어 에블린이 서 있는 쪽을 향해 걸어왔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그는 에블린의 앞에 서서 그녀에게 찬사를 건넸다.

“정말 아름다워, 에블린. 당신을 신부로 맞이할 수 있다니 내 인생 최고의 기쁨이 될 거야.”

“……당신도 오늘 정말 멋지네요.”

딱딱한 어조에도 체이서는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함께 들어가지.”

모두가 사랑에 빠질 법한 근사한 미소에 에블린은 가슴이 지끈거리는 아픔을 느꼈다.

이런 표정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이자 다른 사람들 눈에는 부끄러워하는 모습으로 보였는지 다시금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정말 되돌릴 수 없다.’

에블린은 도망치지 않고 체이서가 내민 손을 잡았다. 그는 에블린을 놓치지 않겠다는 걸 보여 주듯 손깍지를 끼며 강하게 그녀의 손을 얽매었다.

두 사람이 함께 버진로드를 걷기 시작하자 주변에서는 환호와 함께 축하의 박수가 쏟아졌다.

시끌벅적한 소음 속에서 체이서가 에블린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게 속삭였다.

“안색이 좋아졌군.”

“그래요? 구역질이 나도 입에 억지로 음식을 쑤셔 넣은 보람이 있네요. 누가 신사답게 경고해 준 터라 따를 수밖에 없었거든요.”

빈정거리는 말투에 순간적으로 체이서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졌다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금세 다시 웃어 보였다.

“웃어야지, 에블린. 누구보다 행복한 신부처럼 말이야.”

낮은 경고에 에블린 또한 입꼬리를 부드럽게 끌어 올려 행복에 잠긴 신부의 얼굴을 만들어 냈다.

사이좋은 모습으로 단상 앞에 도착하자 교황이 두 사람을 위한 축사를 읊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축사가 이어지고, 드디어 마지막 맹세의 순간이 다가왔다.

“신랑, 평생토록 신부를 사랑할 것을 맹세하겠습니까?”

“맹세합니다.”

“신부, 평생토록 신랑을 사랑할 것을 맹세하겠습니까?”

“……맹세합니다.”

교황은 흐뭇한 얼굴로 마지막 순서를 입에 담았다.

“그럼 서로를 향한 맹세의 입맞춤이 있겠습니다.”

올 게 왔다는 듯 에블린이 어깨를 움츠리자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체이서가 입가를 비틀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에블린의 허리를 두 손으로 잡아 제 품으로 끌어당기고서는 고개를 숙여 금방이라도 입을 맞출 듯 가까운 거리에서 작게 속삭였다.

“어때, 남매가 될 뻔한 이와 결혼하는 기분은?”

‘만약 내가 처음부터 루이사의 일원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다면 체이서와 남매가 되더라도 부부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어차피 무능력자인 내게는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꿈속의 소년도 그래서 에블린을 거부한 것 아니겠는가.

제 대답을 기다리는 체이서를 보며 에블린은 평정을 유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최악이에요.”

모두에게 들리지 않을 작은 속삭임이었지만 당사자인 체이서의 귀에 똑똑히 박혀 들었다. 

그는 에블린이 제게 사랑을 속삭인 것마냥 진심으로 행복한 신랑처럼 기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나도 사랑해, 에블린.”

체념 속에 섞인 증오 어린 대답에 돌아온 것은 마치 잡아먹을 것 같은 거친 입맞춤이었다.

*** 

맹세의 입맞춤 후, 교황이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정식으로 선언하면서 결혼식은 아름답게 마무리되었다.

에블린과 체이서는 피로연에 참석하여 결혼식에 참석해 준 이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표하였고,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모든 일정을 끝마칠 수가 있었다.

하녀들의 극진한 손길 아래 목욕 시중받은 뒤, 속이 훤히 비치는 얇은 슬립으로 갈아입고 도착한 곳은 신방으로 꾸며진 공작 부부의 침실이었다.

“왔군.”

체이서는 소파에 앉아 있다가 에블린 도착하자 반가운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들뜬 기색을 보이는 새신랑의 모습에 하녀들은 흐뭇한 얼굴로 정중히 인사를 마치고 나갔다.

결혼식부터 신방에 들어서기 전까지, 두 사람의 속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그들의 앞날을 축복하며 연신 축하를 아끼지 않았다.

‘지친다.’

아직 제대로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원치 않던 결혼식을 치르고 나니 몸의 힘이 절로 빠졌다.

에블린은 당장 침대에 눕고 싶었지만, 저를 바라보는 시선에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하고 싶은 말씀 있으세요?”

“최악이라고 한 것치고 결혼식을 무사히 치른 게 신기해서. 깽판이라도 칠 줄 알았더니. 생각의 변화라도 있었나?”

체이서는 제가 협박한 것은 고려하지도 않고 그녀에게 심경의 변화가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정말 무서울 정도로 정확한 감이네.’

협박에 의해 강제로 시행하는 결혼이었다면 굳이 식사도 챙겨 먹지 않았을 것이고, 의사의 진료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다 죽어 가는 신부의 모습으로 결혼식장에 입장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에블린은 단순한 협박에 흔들리는 게 아니라 새로운 목표가 생겨났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싫은 일이라도 해내리라 다짐했다. 그것이 원수와 함께 사는 것이라도 말이다.

하지만 그걸 솔직하게 말해 줄 이유가 있을까?

에블린은 초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제가 아무리 거부한다고 한들 이제 와 달라지는 건 없잖아요. 어차피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으니 계약 내용을 따르며 조용히 지낼 생각이에요.”

체이서의 미간이 살풋 찌푸려졌다.

“내 앞에서 그 난리를 쳤으면서 얌전히 살겠다?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이게 원하던 대답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셨나 보네요.”

에블린은 괜히 팔을 쓸어내리며 자연스럽게 그의 시선을 피했다.

보아하니 그럴싸한 이유를 제시해야 에블린의 태도를 납득할 모양이었다.

“그날 밤 당신이 그랬잖아요. 공작 부인 역할을 잘 수행하면 빨리 이혼해 줄지도 모른다고.”

“그러니까 이혼당하기 위해서 모든 걸 체념하고 받아들이고 살겠다?”

“……맞아요.”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였을까?

더는 변명할 거리가 없어 더 캐물으면 곤란한데.

하지만 이런 걱정과 다르게 체이서는 에블린의 말을 진심이라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꿈도 크지.”

체이서는 코웃음을 치고서는 에블린의 앞으로 다가왔다.

“평생 옆에 있어 주겠다며?”

“제 뜻을 멋대로 곡해하지 마세요. 저는 그렇게 말한 적 없으니까.”

두 사람 사이로 다시 묘한 침묵이 자리 잡았다.

‘피곤해, 쉬고 싶다.’

언제까지 이런 쓸데없는 대화로 시간을 낭비해야 하는 걸까.

에블린이 지친 기색을 보이자 체이서는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래, 적어도 다 죽어 가는 꼴 보다는 낫네. 좋아, 네 말을 믿어 주지.”

체이서는 에블린의 손목을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그녀를 침대 앞으로 끌고 갔다.

“오늘이 첫날밤인 건 알고 있겠지?”

분명 조금 전까지는 침대에 누워 편히 쉬고 싶었는데 장미꽃이 가득 뿌려진 침대를 보니 눕고 싶었던 마음이 싹 사라져 버렸다.

“공작 부인으로서 살겠다는 네 각오가 얼마나 대단한지 어디 한번 확인해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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