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에블린이 몸이 좋지 않아. 당분간 채혈은 어려울 테니 그리 알아.”
하소는 갑작스럽게 제 연구실에 찾아와 본론부터 던진 체이서에게 어이가 없어졌다.
“제가 곧 결혼식을 앞둔 신부의 몸에 주삿바늘을 꽂을 미친 사람으로 보이셨습니까?”
“결혼 후에도 마찬가지야. 당분간은 힘들어.”
“단장님, 두 분이 신혼이니 뜨겁게 불타는 건 알겠지만 영애께서는 몸이 연약하시니 주의하시는 게…….”
“쓸데없는 소리.”
체이서의 일갈에 하소가 짓궂은 표정으로 나불대던 농담을 삼켰다.
“안 그래도 제가 먼저 말씀드리려고 했던 사안인데 먼저 말씀해 주셔서 다행이네요. 진짜 며칠 뒤면 결혼식이군요. 저는 참석 못 하니 미리 축하드려요. 영애께도 축하한다고 전해 주세요.”
하소의 축하에 체이서가 보란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얼굴 보고 직접 말해.”
도대체 어디서 감정이 상했는지 몰라도 며칠째 저렇게 날이 선 모습을 보이니 무슨 말도 쉽사리 건네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왜 저렇게 화나 보이시지?’
사랑하는 연인과 결혼식을 앞둔 이의 표정치고는 영 좋지 못했다.
‘에셋 영지 일 때문인가?’
결혼식 직전의 예비 신랑을 차출해서 황실에 불만이 가득 찼는지 아니면 무슨 다른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상태는 최근 중 가장 저기압이었다.
‘알아서 몸 사려야지.’
하소가 이번 주 연구 보고서를 체이서에게 넘겨주고는 자연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괜히 입을 열어 사달을 만들지 않겠다는 눈치 빠른 행동에 체이서는 그제야 표정을 누그러트리며 보고서를 읽기 시작했다.
‘속이 답답하군.’
체이서는 며칠째 저조한 기분을 떨쳐 내지 못해 굉장히 불쾌한 상태였다.
매번 볼 때마다 실실 잘도 웃던 이가 저만 보면 울고불고하며 원망하고 증오하는 모습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에블린이 악랄하게 증오를 내보였던 것이 낯설지 않은 이유는 어렸을 때부터 제게 방해되는 것들을 모두 치워 가며 살아오며 많이 보았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지금껏 체이서를 비난하고 저주한 사람 중 살아남은 이는 없었기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죽일 수도 없는데 신경이 쓰이니 문제인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을 때 에블린이 제게 보여 주던 깊은 증오심을 달래 주었으면 상황이 지금보다 덜 악화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오히려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며 욕을 했겠지.’
그런 귀찮은 여자, 더는 신경 쓰지 않고 싶어도 자신을 믿은 것을 후회한다며 울부짖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이 영 골칫거리였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공작저에서 심부름꾼이 찾아왔다.
에블린이 식사를 시작했다는 반가운 소식과 함께.
의사에게 진료도 받고, 식사도 하고, 약까지 빠짐없이 챙겨 먹었다는 소식에 체이서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계속 채찍만 준다면 정말로 미쳐 버릴지도 모르겠지.’
체이서는 에블린이 저택에 정을 붙였던 또 다른 인물을 떠올리며 소식을 전달해 주러 온 심부름꾼에게 명령했다.
“에블린의 전속 하녀들의 구금을 풀어 주고 다시 복귀시키도록 해. 그녀의 회복을 최우선으로 하도록.”
심부름꾼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서는 연구실을 빠져나갔고, 체이서는 언제 기분이 나빴냐는 양 미소를 띤 얼굴로 하소에게 말했다.
“이번 주도 수고했다. 몸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연구하고, 다음 보고서는 한 달 뒤에 받도록 하지.”
“예, 알겠습니다.”
갑작스러운 분위기 변화에 하소는 따라가지 못하고 대충 눈치껏 답을 하였다.
‘영애가 아파서 많이 예민했던 모양이네. 그간 살벌했던 분위기도 이해가 가구만. 눈에 띄게 안심하다니 진짜 내가 알던 단장님이 맞나?’
하소는 소름 돋은 제 팔을 가볍게 쓸며 기계적으로 웃을 뿐이었다.
상관의 기분이 좋아 보이니 그거면 됐다는 듯이.
***
“에블린은?”
자정에 가까운 시간, 이제 막 공작저로 돌아온 체이서는 저를 맞이하는 집사에게 물었다.
“조금 전에 잠드셨습니다.”
집사의 말에 체이서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에블린이 머무는 공작 부부의 침실로 향했다.
결혼식 전까지 얼굴을 비치지 않기로 제 입으로 약조했지만, 에블린이 잠들어 있을 때 보고 가면 그녀는 모를 일이었다.
방 앞으로 가니 일주일 전보다 핼쑥해진 마야가 방문 앞에 서 있었다.
“오셨습니까, 소가주님.”
“에블린은 어떻지?”
“어제오늘 모두 세끼 다 거르지 않고 드시고, 약도 잘 챙겨 드셨답니다. 며칠간 계속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하셔서 수면초를 피우시고 조금 전에 겨우 잠이 드셨습니다.”
겨우 잠들었다고 하는 말에도 체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침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뭐지?’
방 안에 가득한 연기와 향에 체이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또 새로운 자살법인가?’
수면초는 마약에 가까운 약초이기에 과다하게 피우다 보면 몸에 해로운 부작용을 일으킨다.
그렇기에 적정량을 준수하여 피워야 하건만 정도를 모르는 연기에 체이서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연기를 휘저었다.
“송구합니다. 이만큼 피우지 않으면 아가씨께서 제대로 숙면하지 못하셔서요.”
뒤따라 들어온 마야의 설명에 체이서가 신경질적인 어조로 덧붙였다.
“이틀 동안 계속 이렇게 피웠다는 건가?”
마야는 손으로 코와 입가를 가리고서는 그렇노라 답했다.
“아가씨께서 잠든 지 한 시간이 지나면 곧바로 환기를 시키고 있습니다. 그나마 이렇게라도 해야 조금이라도 주무십니다.”
이해해 달라는 간절한 목소리에 체이서가 혀를 찼다.
“어지러우시죠? 바로 환기할까요?”
“됐어.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으니 이만 나가 봐.”
체이서의 축객령에 마야가 고개를 숙이고선 방을 나갔다.
침대로 다가가자 며칠 전보다 편안해 보이는 얼굴의 에블린이 색색 규칙적으로 숨을 내뱉으며 잠들어 있었다.
“이렇게 약에 취해야 겨우 잠든다 이거지.”
체이서는 괜히 에블린의 머리칼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내일모레 있을 결혼식이 끝나면 이렇게 약을 피우지도 못할 텐데. 어떻게 하려고 그래?”
곤히 잠들어 있는 에블린이었기에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수면초는 모르겠고 품은 빌려 주지.”
처음 합방을 시작하고 함께 잠들었던 때가 떠올라 그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결혼식은 정말로 코앞으로 다가왔고, 에블린은 체이서가 저를 놓아줄 마음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는지 모든 상황에 순응하기 시작했다.
‘그래, 이거면 되겠지.’
그런데 어째서일까.
분명 제 뜻대로 흘러가고 있는데 무언가 어긋난 것 같은 기분은.
‘수면초 때문인가.’
체이서는 제 감정을 깊이 고민하는 대신 익숙하게 외면하였다.
***
희미한 불빛이 어린 어두컴컴한 미로 안.
댕댕댕, 익숙한 종소리가 울리더니 미로 위에서 오늘 몫의 식사가 담긴 바구니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린 에블린은 제 몫으로 나온 식사 바구니를 받아 들고서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저 멀리 여러 개의 바구니가 떨어지는 곳이 보이자 그녀는 대놓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왕 음식을 줄 거면 식당에 모여서 먹게 해 주면 좀 좋을까? 이렇게 주면 서로 위치도 발각되고, 음식도 뺏길 수 있을 텐데.”
에블린은 척박한 시험 환경에 투덜거리면서 제 바구니를 챙겨 들고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아, 여기 있었네.”
익숙한 미로를 걸어서 도착한 곳에는 한바탕 구르기라도 한 듯 엉망이 된 모습으로 벽에 기대어 앉아 있는 소년 한 명이 있었다.
“또 너야?”
신경질적인 목소리에도 에블린은 방싯 웃고서는 소년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곳으로 바구니가 여러 개 떨어지더라고.”
그리고 자연스럽게 제 몫의 바구니를 풀어 헤치면서 말했다.
“또 음식 뺏긴 것 같길래.”
소년이 상대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린 채 대꾸하지 않자 에블린은 바구니에서 갓 구워진 따끈한 빵을 꺼내 건네었다.
“안 먹어.”
“너 벌써 며칠째 굶는지 알아? 걱정돼서 그러니까 얼른 먹자. 응?”
안 받으려는 소년과 억지로 쥐여 주려는 에블린의 싸움은 소년의 배에서 울리는 꼬르륵 소리에 의해 에블린의 승리로 돌아갔다.
결국 빵을 받아 든 소년이 천천히 빵을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흐뭇이 바라보던 에블린은 양손으로 턱을 괸 채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여기 이상하지 않아? 실력을 검증하고 싶으면 그에 걸맞은 테스트를 진행하면 되잖아. 이렇게 어린애들을 데리고서 목숨을 건 이상한 게임이나 시키고.”
“꼭 너는 어린애가 아닌 것같이 이야기하네. 여기서 네가 제일 어리지 않나?”
에블린이 말문이 막혀 입을 꾹 다무는 사이 소년이 빵을 다 먹었다.
“자, 더 먹어.”
“너는 안 먹어?”
“난 별로 배 안 고파. 그리고 내가 볼 때 넌 내일도 바구니를 뺏길 것 같아서.”
자존심 상해하며 화낼 줄 알았으나 의외의 반응이 돌아왔다.
에블린의 말에 소년은 동의하는지 그녀의 호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화 안 내네?”
“그 녀석들이 멈출 거였으면 진작 멈췄겠지.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비겁한 것들 주제에.”
“그래도 형제가 될지도 모르는 애들인데 친하게 지내는 게 좋지 않아?”
“형제가 되기 전에 다 죽일 건데?”
“……나도?”
“너도.”
소년의 말에 에블린이 꼭 세상이 멸망한 것같이 충격받은 얼굴이 되었다.
이런 표정은 처음 보는지 소년이 당황해도 에블린은 억울하다는 듯 훌쩍이기 시작했다.
“내, 내가 너를 챙겨 줬는데도 죽일 거야? 여기서 널 도와준 사람은 나뿐인데!”
“누가 도와달래?”
“……그건 그래.”
소년의 냉정한 말에 에블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너랑 사이좋은 남매가 되고 싶었던 건데.”
그럼에도 억울함은 여전한지 입은 삐죽 나온 상태였다.
어느덧 음식 바구니를 깨끗이 비워 낸 소년이 제 무릎을 끌어안고 중얼거리는 에블린을 응시했다.
“나랑 남매가 되고 싶어?”
“응, 되고 싶으니까 이렇게 먹을 것도 주지.”
돌아오는 밝은 목소리에도 소년은 볼일이 끝났다는 듯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어쩌지.”
곧 소름이 돋을 만큼 차가운 시선이 에블린에게 닿았다.
“나는 너랑 남매가 되기 싫은데.”
에블린이 무어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 말을 끝으로 소년은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그 후로 소년이 에블린이 건네주는 음식을 받아먹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