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충격이 어린 얼굴 위 연초록빛 두 눈동자에 제 모습이 담기자 그제야 체이서는 가슴 속에 차오르는 만족감에 미소를 지었다.
“수도원에 무덤을 만들어 주고 싶다며. 나는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 힘쓰고 있는데 자꾸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굴면 곤란해.”
“……당신이 어떻게 내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애처롭게 떨리는 목소리에 서린 짙은 원망은 아무리 체이서가 어르고 달래도 사라지지 않을 듯했다.
‘그렇다면 내가 굳이 잘 대해 줄 필요가 있을까?’
체이서가 가볍게 혀를 차자 에블린의 어깨가 흠칫 튀었다.
“내가 뭘 잘못한 게 있다고 이리 날 괴롭혀요? 난, 난 그저…….”
에블린은 뚝뚝 눈물을 떨구며 애처롭게 울기 시작했다.
“당신을 믿었을 뿐인데……. 왜, 왜 내가 이렇게 괴로워야 해요? 왜 날 이렇게 괴롭게 만들어요?”
“그날 밤에도 말했지만, 넌 날 믿은 게 아니야. 오히려 내 믿음을 배신한 거지.”
“아니에요!”
냉정한 말에 에블린은 독기 서린 얼굴로 외쳤다.
“난 당신을 믿었어요! 위험한 상황이 처했을 때 홀로 헤쳐 나가기 급급했던 내가 그 상황에서 당신을 찾았다고요! 당신이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도 내가 당신을 믿었다는 사실은 변치 않아요!”
에블린은 거친 숨을 내쉬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내가 지금 가장 힘든 게 뭔지 알아요?”
이 순간이 마지막이라도 되는 양, 에블린은 얼마 남지 않은 힘을 쥐어짜 소리쳤다.
“내가 가족을 죽인 살인자의 옆에서 행복해지자고 다짐했다는 거예요! 매일매일 악몽에 시달려요! 나 때문에 죽은 사람들이 나와서 모두 저를 원망해요! 손쉽게 속은 멍청한 여자를 보며 즐거웠나요? 나는 정말이지 미쳐 버릴 것 같아요!”
에블린의 눈가에서 흐른 눈물은 뺨을 타고 움켜쥔 주먹 위로 떨어졌다.
“과거의 내가 너무 원망스러워 미칠 것 같다고요…….”
체이서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담담한 목소리로 최후의 통첩을 날렸다.
“사흘 뒤 결혼식인데 이 모습으로 식장에 들어가게 할 수는 없지.”
서럽게 울고 있는 에블린을 무시한 채.
“잠이 오지 않는다면 수면초를 내주도록 하지. 그리고 내일부터는 내오는 밥과 약을 모두 챙겨 먹어.”
“…….”
설움을 토해 내도 체이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소통이라고는 불가능한 거대한 장벽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에블린은 고개를 떨군 채 더는 대화를 이어 나가고 싶지 않아 입술을 꾹 다물었다.
제 시선을 피하는 것에 체이서가 불쾌감을 참지 못하고 억지로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
“지금처럼 거부해도 좋아. 내가 손수 직접 먹여 주러 찾아올 테니까. 그 꼴 보고 싶으면 어디 한번 굶어 봐.”
이것은 정말 마지막 경고였다.
에블린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체이서는 그대로 그녀를 놔주고선 방을 빠져나갔다.
조용한 방 안에는 에블린이 홀로 훌쩍이는 소리만이 남았다.
외롭고, 서럽고, 지쳤다.
체이서가 명령하였는지 하녀가 들어와 향초대 속에 수면초를 피우고서는 다시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서서히 방 안을 가득 채우는 수면초의 향에 취하며 에블린은 그대로 눈물을 떨구고는 눈을 감았다.
***
모니터 화면에 분홍빛 하트가 가득한 게임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뭐 게임 스토리가 이래? 남자 주인공들이 모두 마음에 안 드는데.”
게임을 끝마친 단발머리 여자가 투덜거리자 그 옆에 앉아 있던 그녀의 회사 동료가 살갑게 말을 걸었다.
“어머, 그래도 진엔딩 보셨네요. 게임에 관심 없는 줄 알았더니.”
“네, 한 명하고 이어지면 다른 애들이 제 캐릭터를 죽일 것 같아서요.”
“하하, 그런 엔딩도 있기는 하죠.”
살벌한 소리에 여자가 질색하는 얼굴로 진지하게 한탄했다.
“우리 회사에서 잘나가는 신작이라니 해 봤지만 제 취향은 아닌 것 같아요. 저는 미친 사람들보다는 다정한 사람이 좋아서요.”
여자의 말에 그녀의 동료가 취향은 다를 수 있다며 웃다가 무언가 떠오른 듯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참, 이 게임에 히든 엔딩이 있는 건 알고 있어요?”
“히든 엔딩이라니요?”
“루이사 가주의 반지 있잖아요. 그 반지가 소원을 들어준다는 설정이 매겨져 있다지 뭐예요? 왜 얼마 전에 게임 유튜버가 소원을 쓴 영상이 조회 수가 높게 나왔다며 영업팀에서 기뻐하더라고요.”
“무슨 소원을 빌었길래 조회 수가 높아요?”
“공작저에 처음 온 순간으로 회귀해 달라고 빌었대요. 플레이 도중 죽은 캐릭터가 너무 많았는데 그중 자기 최애캐가 있었다나? 근데 우리 게임은 이전 스토리로 돌아가기가 안 되잖아요. 근데 누굴 지정해서 살리는 소원은 안 된다고 떠서 홧김에 시간을 돌려 달라 빌었더니 그게 이뤄졌다지 뭐예요!”
특별 조건이 있기는 하지만 해 볼 만하다는 동료의 말에 여자는 별게 다 있다며 어색히 웃었다.
“나중에 또 하게 된다면 한번 히든 엔딩을 도전해 볼게요.”
물론 취향에 맞지도 않은 게임을 다시 하게 될 일은 없었지만.
***
에블린은 번쩍하고 눈을 떴다.
“……뭐, 뭐야. 어떻게 이런 중요한 걸 잊고 있었지?”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소원을 들어준다더니.
잊고 있었던 지난 삶의 일부를 꿈을 통해 엿본 덕에 이 상황을 파훼할 유일한 해결책이 생겨났다.
소원을 들어주는 루이사의 반지.
마물로 변해 버린 가주의 두꺼운 손가락에는 분명 루이사의 가주만 낄 수 있는 반지가 있었다.
궁지에 몰려도 포기하지 않으면 된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에블린은 당장이라도 붕붕 뛰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며칠 만에 겨우 웃을 수가 있었다.
그러다 고개를 돌리자 협탁 위에 올려진 구겨진 신문이 보였다.
하녀에게 가져 달라고 부탁했던 신문에는 시위대와 속국의 반동분자들을 진압했다는 내용이 대서특필되어 있었다.
폭력 시위의 주동자와 속국의 반동분자들 모두 생존자 없이 시위 현장에서 사살되었다는 간결한 내용에 못 참고 신문을 구겨 버렸던 것이 기억이 났다.
‘그래, 이렇게 잔혹한 이였는데 내가 왜 그리 깜빡 속았던 걸까.’
사람도 이리 망설임 없이 죽이는데 마물이 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더 쉬웠을 것이다.
‘괜히 게임 속 악역이 아니라 이거지.’
사명감을 갖고 다정한 척 연기하느라 참 고생하였겠다 싶어 헛웃음이 나왔다.
초대 루이사 공작부터 시작해서 역대의 루이사 공작들 모두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힘들게 쟁취한 자리이고, 절대로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겠지. 하지만 꼭 그래야 했을까? 누구라도 이 잘못된 관습을 끊어 버릴 생각은 하지 않았던 걸까?’
권력의 중심에 있지 않는다고 한들 그들이 루이사가 아니게 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루이사가 뭐라고.’
에블린은 권력자의 삶과 먼 삶을 살았기에 더더욱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불운한 삶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 앞에서 귀찮게 연기를 해 가면서까지 공작을 지켜야 할 이유가 있다는 거겠지.’
차라리 공작과 관련된 사정을 설명해 주겠다며 저를 설득했더라면 이렇게까지 크게 배신감과 슬픔을 느끼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체이서는 그러지 않았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나를 옆에 두고 이용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에블린 또한 그것을 알기에 더더욱 그에게 실망하지 않았던가.
참으로도 오만한 사내였다.
‘그래, 어차피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지.’
그리고 에블린에게는 히든 설정이라는 새로운 수단이 생겼다.
다시 그 별관에 가서 마물에게서 반지를 뺏어오는 위험을 감수해야겠지만 적어도 모든 것을 바로 잡을 기회가 생긴 것이다.
“내가 잘못한 건 내가 바로 잡아야 하는 게 맞아.”
애초에 이곳에 온 것이 잘못이었고, 삶의 목표 또한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지 않았나.
에블린은 전생의 동료가 해 주었던 반지의 특별함에 대해 떠올렸다.
“한 생명을 제물로 바쳐야 소원을 이루어 준다는 게 꼭 저주받은 반지 같지 않아요? 진짜 히든 아이템답다니까요.”
적어도 ‘회귀’와 관련한 소원을 들어준 적이 있었으니 분명 가주의 반지를 사용하면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대가로 생명이 필요하다지만…….’
에블린은 눈가에 고인 눈물을 훔치고서는 애써 웃었다.
‘그래, 애초에 내가 죽어야 했던 게 맞았던 거야.’
시간이 되돌아가고 수도원 가족들의 곁에는 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니 심장이 빠르게 뛰며 슬픈 감정이 밀려왔다.
‘웃기지. 그날 체이서가 구해 준 게 고맙게 느껴지다니 말이야.’
만약 루이사 저택에서 투신하여 죽었더라면 정말 쓸데없이 목숨을 날리는 일이 될 뻔하였다.
시간이 되돌아간다면 분명 자신의 존재는 사라지겠지만, 수도원 가족들은 앞으로 멀쩡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수녀님은 아프고, 애들은 어리니 손님은 보살필 수도 없을 거야.’
마물화에 감염된 손님은 받지 않을 테고, 그렇다면 체이서가 찾아와도 수도원에 에블린이 없으니 하룻밤만 가볍게 머물고 떠날 것이다.
에블린의 존재가 사라진다고 한들 가족들은 무사할 테고, 체이서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것이다.
항체인 자신이 없다면 분명 치료제의 개발은 더더욱 늦어질 테니까.
이번 생에서도 회귀한 삶에서도 체이서는 원하는 치료제의 단서를 얻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할 것을 생각하니 입가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가족들이 살고, 체이서가 힘들어하게 된다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바치는 건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드니 자신이 미친 것같이 느껴졌다.
‘……치료제 개발이 더 늦어지면 피해자도 더더욱 많아지겠지?’
순간적으로 죄 없는 그들이 가엾다고 생각하였다가 뺨을 내리치며 정신을 바짝 붙잡았다.
마음의 죄가 심장께를 무겁게 짓눌렀지만, 에블린은 애써 고통을 외면하였다.
‘그래, 이건 복수야. 나는 체이서가 원하는 걸 이루어 줄 생각이 없으니까.’
에블린은 슬피 웃었다.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다는 안도감과 평화로운 삶에 자신이 없을 것이란 비참한 현실 속에서 웃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