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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64)화 (64/159)

64화

조명이 켜지지 않은 어두운 공작 부부의 침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하녀가 트롤리를 밀면서 들어왔다.

“아가씨, 식사를 가져왔어요.”

“…….”

“좋은 조개가 들어왔다며 주방장이 클램차우더를 만들었답니다. 아가씨께서 좋아하시는 메뉴시니 속이 안 좋아도 조금이라도 드셔 보세요.”

“…….”

“아가씨…….”

에블린은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하녀의 목소리에도 등을 돌려 누운 채 침묵을 유지했다.

“물도 안 드시고, 식사도 하지 않으시고. 이러다가 정말 큰일 나셔요.”

“…….”

“식사와 물을 두고 갈 테니 편하실 때 드셔야 해요, 꼭이요.”

며칠째 이어지는 에블린의 단식에 하녀는 한숨을 내쉬며 무거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그녀가 나가고 나서야 에블린은 몸을 돌려 퀭한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악몽과 같은 밤이 지나고 벌써 닷새라는 시간이 흘렀다.

체이서의 강압에 계약을 무효로 돌리는 것도, 저택을 떠나는 것도 실패한 에블린은 그의 손에 이끌려 다시 공작 부부의 침실로 돌아와야 했다.

‘내 얼굴이 보기 싫다 그랬지. 어차피 결혼하면 매일 보고 살아야 할 테니, 결혼식 전까지 꺼져 주지. 그러니 그동안 얌전히 있도록 해. 심기 거스를 짓 하지 말고.’

체이서는 그리 말하며 침실을 떠났고, 에블린은 그가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긴장이 풀려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옆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난밤 보았던 모든 것들이 거짓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온몸이 쥐어짜이는 듯한 고통, 손끝에 감긴 붕대, 방 안에 퍼지는 희미한 약 냄새가 홀로 남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꿈이 아닌 현실은 너무나도 잔혹했다.

그날 밤 이후, 많은 것이 변하였다.

침실 앞을 지키는 호위 기사들이 처음 보는 이들로 바뀌었고, 마야와 로피는 주인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죄로 근신 처벌을 받았다.

에블린에게 허락된 하녀는 별관에서 보았던 간병인 노릇을 하던 하녀뿐이었다.

그녀는 연신 에블린을 걱정했지만, 그것을 신경 쓰기에 에블린은 너무도 지친 상태였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날 이후로 침대에 가만히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찾아오는 주치의의 진료를 거부하였고, 공작저에서 주는 물과 음식을 모두 거부하였다.

잠조차 오지 않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기절하듯 잠들고 나면 악몽에 울부짖으며 깨어나는 날이 반복되었다.

악몽의 내용은 항상 똑같았다.

라사냐는 에블린을 거둔 것을 후회한다고 말하며 불에 타들어 가고, 동생들은 괴롭다며 에블린의 치맛자락을 붙잡고선 울부짖었다.

그들이 사라지면 아사블랑이 나와 에블린 때문에 자신이 죽었다며 원망했고, 뒤이어 트렐로니 백작이 자기 손으로 그녀를 죽였어야 했다며 저주를 내뱉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체이서가 사납게 웃으며 이들이 죽은 것이 모두 에블린 탓이라고 속삭임과 동시에 잠에서 깨어났다.

악몽을 꾸고 싶지 않아 억지로 잠을 자지 않고 버텨 보았지만 죄책감은 지독히도 에블린을 쫓아와 그녀를 괴롭혔다.

깨어 있어도, 잠들어 있어도 괴로움의 연속에 에블린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일주일 정도 남았나…….’

결혼식을 앞둔 새신부의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처참한 모습이기에 모두의 입방아에 오르지 않을까 싶었다.

‘남들이 보면 뭐라고 생각하려나.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려나?’

새신부의 몰골을 보며 이 결혼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마야가 처음 경고했을 때 들을걸.’

자신이 내린 선택에 따른 결과와 책임을 지는 게 이리 무거우리라고 왜 이렇게 늦게 깨닫는 걸까.

‘마야와 로피는 뭘 하고 있을까? 마야는 마물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까? 내 방문 앞을 지키던 기사들은 모두 어떻게 되었을까.’

에블린은 퀭한 눈을 깜빡이다가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자신도 방에 감금된 처지인 주제에 이런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을 걱정하는 모습이 너무도 우스웠다.

그러면서도 끝내 걱정을 놓지 못하는 제가 너무도 한심스럽기도 했다.

‘나 때문에 모두 죽었을까?’

체이서의 잔혹한 성정이 그들을 용서해 주지 않았을 것만 같아 두려웠다.

그는 자신이 말한 대로 에블린을 이 방에 가둬 두고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에블린이 믿었던 모든 것들이 무너지고, 엉망이 되어 버렸다.

‘결혼식을 올리면 정말 되돌릴 수 없을 텐데 이대로도 괜찮은 걸까.’

에블린이 배신감에 의한 충격에 현실을 외면하는 동안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이제 결혼식은 일주일 정도 남았으니 식을 올리고 나면 평생토록 그의 얼굴을 보며 살아야 할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나가고 싶어, 당장이라도 이 저택을 탈출하고 싶어.’

에블린은 병든 것같이 무거운 몸을 일으켜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테라스 창 앞까지 힘겹게 걸어갔다.

갑갑한 이 방에서 유일하게 숨통이 트일 곳이었으나 막상 테라스 문을 열고 나가니 헛웃음이 나왔다.

“하…….”

방문 앞뿐만 아니라 테라스 아래로도 기사들이 배치되었다.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거지? 지독한 사람 같으니라고.’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차라리 모든 걸 포기하고 목숨을 내던지려고 했던 때가 그리워졌다.

에블린은 한심한 생각을 하며 다시 안으로 들어서려고 했다.

휙 몸을 돌리는데 순간 눈앞이 어지러웠다. 방 안에 있을 때보다 더 숨이 막히는 것이 이상하다고 여김과 동시에 몸이 아래로 기울었다.

콰당, 하고 넘어지자 삐- 하고 귀에서 이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온몸이 뜨겁게 들끓고 서서히 의식이 흐려진다.

“아가씨!”

멀어져 가는 의식 속 하녀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의사를 부르라는 소리를 들으며 에블린은 찬 바닥에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

며칠 동안 저택을 비운 루이사의 소가주가 발소리도 죽이지 않은 채 성큼성큼 복도를 걸으며 목적지인 침실로 향하고 있었다.

루이사 공작저의 집사 쿠셔는 주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황급히 뒤를 따라가며 현 상황을 보고했다.

“바이아르도 영애께서 테라스에 잠시 나가셨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셨다고 합니다. 의사의 말로는 계속해서 음식을 거부하면 정말 큰일이 생길 수도 있다며 하루빨리…….”

“하루빨리 입에 물이고 음식이고 넣어 주면 된다는 거지?”

“……예. 하지만 며칠째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않았으니 위에 부담이 가지 않는 유동식을 위주로 시작하라고 하더군요. 식사 후 꼭 약도 챙겨 먹어야 몸 상태가 호전될 거라 하였습니다.”

“그래,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방에 아무도 들이지 마. 기사들도 모두 물려.”

쿠셔는 체이서의 명에 알겠노라 답하고선 방 앞을 지키던 기사들과 함께 물러났다.

방으로 들어간 체이서는 달뜬 숨을 내쉬며 잠든 에블린을 조용히 응시하였다.

‘기가 막히는군.’

에블린과 약조한 대로 쳐다도 보기 싫은 인간이 꺼져 주었건만 왜 며칠 전보다 더 상태가 나빠진 것인지 그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괴로운 숨을 내쉬며 잠든 에블린을 보며 체이서는 며칠 전 새벽 저를 보며 울부짖었던 얼굴을 떠올렸다.

홀로 저택에 남은 에블린이 신경 쓰여 에셋 영지에서 일어난 시위대를 무력으로 빠르게 진압하고, 뒤처리를 부단장에게 맡긴 채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빈 침대를 보며 제가 무슨 생각을 했던가.

체이서가 저택을 비운 틈을 타 괴한에게 납치당했을까, 암살자가 찾아온 것일까, 혹은 도망을 간 것일까.

짧은 시간 머릿속을 스치던 생각은 다행히도 에블린이 남기고 간 메모 덕에 멈췄다.

하지만 에블린은 저택에도 정원에도 있지 않았다. 체이서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별관을 찾아갔고 마물화가 된 공작에게 잡힌 에블린을 찾을 수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와 눈물에 의해 흠뻑 젖은 얼굴. 먼지를 뒤집어쓴 잠옷은 이리저리 찢겨 있으며, 손톱 끝에는 피가 맺혀 총체적으로 엉망이 된 모습이었다.

자신을 애타게 찾는 에블린의 모습에도 체이서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내뱉었다.

에블린은 사과하며 이곳까지 들어온 경위를 설명하였다. 하지만 이유가 어떻든 분명 별관 지하에는 들어가지 말라는 제 경고를 무시한 것이지 않나. 

빈 침실을 봤을 때부터 서서히 차오르던 분노가 결국 극에 달하고 말았다.

그 상황 속에서 애물단지인 공작의 정체를 유추하는 것에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고, 뒤늦게서야 에블린을 설득하여 상황을 모면하려고 했으나 그녀는 더는 체이서를 믿지 않았다.

자신을 부정하고, 실망하며, 배신당했다며 울부짖는 모습까지는 참을 수 있었으나 결혼을 무효로 돌린다는 말에 팍 짜증이 올라와 결국 가식적인 모습을 모두 내던졌다.

에블린과 쌓아 온 관계가 모두 어긋나 버렸지만, 어차피 그녀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계획이 틀어질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예정대로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가 되고, 함께 치료제를 개발하면 된다.

결혼식만 무사히 치르고 나면 적당히 어르고 달래 그녀의 화를 풀어 줄 생각도 있었다.

그래서 결혼식 전에 일부러 모습을 보이지 않았건만 성치도 않은 몸으로 시위하듯 단식을 하더니 결국 일을 쳤다.

체이서가 생각에 잠긴 그때, 에블린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눈을 뜬 그녀가 저를 내려다보는 체이서를 발견하고서 깜짝 놀라더니 허둥지둥 몸을 일으켜 뒤로 물러났다.

‘철천지원수도 저리 보지 않을 것인데.’

지독한 원망이 서린 눈빛에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체이서의 인내심이 끊어지고 말았다.

“죽고 싶으면 그냥 죽고 싶다고 말하지 그랬어. 이따위 짓으로 사람 귀찮게 하지 말고.”

피골이 상접한 모습에 조금 가엾다는 생각을 한 제가 어리석었지.

“그런데 이대로 죽어도 괜찮겠어?”

누가 들어도 모진 말이 입가를 타고 흘러나왔다.

시선도 마주치지 않고 저를 외면하는 모습에 체이서는 입가를 비틀며 에블린의 처지를 다시 한번 각인시켜 주었다.

“수도원 가족들의 시신을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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