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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63)화 (63/159)

63화

도대체 과거의 자신은 체이서의 무엇을 보고 믿었던 것일까.

‘루이사라는 이름이 괜히 악명이 높은 게 아닌데. 왜 나는 순진하게…….’

이제 와서 후회해도 너무 늦어 버렸다.

두 사람이 견고히 쌓아 오던 신뢰는 체이서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자 손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지독한 배신감이 지나가자 남은 건 차갑게 끓어오르는 분노뿐이었다.

에블린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붉게 충혈된 눈으로 체이서를 노려보았다.

그가 미웠고, 원망스러웠다.

너무도 증오스러워서,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차오르는 배신감에 눈물이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내렸다.

더는 그와 마주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길거리에서 노숙하며 살아도 좋으니 이 끔찍한 저택에서 당장 벗어나고 싶었다.

“우리의 계약은 무효예요.”

절대로 내뱉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말을 입 밖에 내었다.

맥박이 빨라지고 심장이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충동적으로 꺼낸 말이었지만 후회되지는 않았다. 

어차피 모든 게 엉망이 되었으니까.

에블린이 그대로 몸을 돌려 빠져나가려고 하자 체이서가 거칠게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지금 네가 한 말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건 알고 있겠지?”

“이 모든 걸 들키고도 계약을 이어 갈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내가 응하지 않을 걸 알기에 숨겼던 거 아니었나?”

에블린이 붙잡힌 손목을 빼내기 위해 거칠게 팔을 흔들었지만 그럴수록 손목을 붙잡은 손아귀의 힘만 더해졌다.

“이거 놔요!”

“잘 들어, 에블린. 우리는 서로의 합의로 계약서를 작성했어. 처음부터 내가 널 속였다고? 그게 문제가 되나? 이미 계약은 체결됐는데.”

“놓으라고!”

체이서는 같잖다는 얼굴로 그대로 에블린을 잡아끌더니 침대에 내던져 버렸다.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에블린이 다시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체이서가 침대를 타고 그녀의 위로 올라와 졸지에 그의 품에 갇혀 버리는 꼴이 되어 버렸다.

“직접 계약서를 쓰자고 제안해 놓고서는 인제 와서 무효로 돌리자고?”

침대에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렸으나 이내 그가 두 손으로 손목을 잡아 누르는 바람에 소용이 없었다.

창문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옅은 빛은 그의 거대한 체구에 가려져 그녀의 시야를 어둡게 만들었다.

보이는 것은 오직 눈앞에서 에블린을 내려다보고 있는 체이서밖에 없었다.

그는 오만한 눈길로 그녀를 비웃었다.

“그러게, 계약할 때는 신중했어야지.”

하필이면 그가 위에서 그녀가 일어나지 못하게 막고 있는 탓에 도망갈 수조차 없었다.

“먼저 계약서를 작성하자며 이야기를 꺼내 놓고, 이혼이니 뭐니 쓸데없는 소리만 하니 이런 중요한 걸 놓치지.”

“…….”

“결혼식은 예정대로 진행할 거야. 우리는 세기의 사랑을 이룬 행복한 부부가 될 거고.”

“절대로 당신같이 끔찍한 이와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하기 싫어? 그럼 처음부터 그럴듯한 사이가 되자고 하지 말았어야지.”

체이서는 모든 것을 에블린 탓으로 돌리며 불안정한 그녀의 감정을 더욱 거세게 흔들기 시작했다.

“그랬더라면 브렌다 자작 부인은 그렇게 비참하게 죽지 않았을 것 아냐.”

“당신 지금 무슨 소리를…….”

“네가 결혼한다고 갑자기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브렌다 자작 부인이 수도까지 올라왔을까? 형제들이 너를 납치할 일도 없었을 테고, 괜히 권력 싸움에 휘둘려 죽지는 않았을 텐데?”

“…….”

“결국 보면 너 때문에 죽은 거나 다름없지 않나?”

머리를 내려치는 것만 같은 충격적인 발언에 머리가 멍해졌다.

“트렐로니 백작 또한 마찬가지지. 네가 가주의 뜻에 따르자며 그의 처분을 결정했었기에 따라 줬지만.”

“……설마.”

“결국 백작은 가주에게 제대로 의견도 피력하지 못하고 가주에게 목이 물어뜯겨 그대로 즉사했어. 영지전을 치렀더라면 영지를 지키다 명예롭게 죽었을 수 있었을 텐데. 너 때문에 시체가 갈가리 찢겨 죽었지.”

에블린의 두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제 탓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죽음에 관해 숨겨진 진실을 들으니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네 수도원 가족들도 마찬가지지.” 

체이서는 여기서 끝이 아니라며 마지막 말을 꺼내었다.

“네가 정체불명의 손님에게 선의를 베풀지만 않았더라면 수도원에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그만.”

“수도원 사람들은 너 때문에…….”

“그만, 그만, 그만!”

에블린이 듣기 싫다는 듯 머리를 저었지만 결국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 그의 입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너 때문에 죽은 거야, 에블린.”

“……어떻게, 어떻게 당신이!”

겨우 회복하고 있던 상처가 그의 날카로운 말에 헤집어졌다.

“이 사건은 어디까지나 실수였고, 누구도 막아낼 수 없던 재난이었어. 너의 친절과 선의는 잘못된 게 아니야. 그래, 넌 잘못하지 않았지.”

“살아, 에블린. 너는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이니까.”

죽음을 각오한 에블린에게 희망을 안겨 주었던 말들도 그의 거짓으로 가꾸어진 말이었던 것이었다.

만약 에블린이 항체가 아니었더라면, 필요가 없었더라면 체이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죽고 싶다며 괴로워하는 에블린을 말리지도 않았을 테고, 위로의 말도 입에 담지 않고 그녀를 무시했을 것이다.

‘애초에 내게 진실하게 대한 적은 있었을까?’

책무감으로 뒤덮여 있던 죄책감이 튀어나와 에블린의 숨통을 조이는 것만 같았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에블린은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으며 몸부림을 쳤으나 체이서는 절대로 그녀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저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볼 뿐.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에블린은 지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체이서를 노려보았다.

붉게 충혈된 눈 안에 서린 것은 증오였다.

끔찍하게도 체이서의 곁을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괴로웠다.

최악의 상황에 도달하고 나서야 언젠가 가볍게 넘겼던 데몬스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체이서 형님을 어디까지 믿으십니까?”

“형님께서 그저 말로 경고만 하더라도 바이아르도 백작은 감히 이렇게 나설 수 없었을 겁니다.” 

“만약 형님이 이 모든 걸 예상하고 가만히 지켜본 것이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도중에 체이서가 와 대화가 끊겼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가 마지막으로 하려던 말은 아마도…….

‘이 결혼을 다시 생각해 보란 말이었겠지.’

데몬스는 납치과정에서 느꼈던 이상한 점을 에블린에게 솔직하게 고하며 조언해 주었다.

그리고 멍청한 자신은 귀한 조언을 모두 가볍게 듣고 흘려 버렸고.

“개인적으로 루이사 소공작처럼 성격 나쁜 이도 제 스타일은 아닌지라.”

처음 만난 라리사의 솔직한 말 또한 말이 안 된다며 넘겨 버렸었다.

멍청하게 속아 넘어간 자신을 보며 체이서는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어.”

수도원 앞에 쓰러진 사람을 도왔던 것도, 괴로움이 가득한 목소리에 별관에 들어선 것도 모두 죽어 가는 사람을 외면할 수 없었을 뿐이다.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도움을 주려던 것뿐이었는데 제가 품었던 알량한 선의 하나 때문에 모든 게 엉망이 되고 말았다.

“……사람을 도우려고 했던 게 잘못인 거야?”

“아니지, 에블린. 네가 잘못한 건 그게 아니야.”

체이서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정히 속삭였다.

“나를 믿지 않은 게 잘못이지.”

“…….”

“네가 정녕 나를 믿었더라면 내 경고를 무시하고 지하에 갔을까?”

“…….”

“난 너를 믿었는데.”

끔찍하게 느껴질 만큼 다정한 목소리는 너무도 증오스러워서.

“왜 너는 나를 믿지 않았어?”

제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할 줄 아는 거라곤 우는 것밖에 못 하면서.”

서늘한 목소리와 달리 따스한 손이 에블린의 눈가를 부드럽게 훔쳤다.

“네가 결혼을 엎고 이 저택을 나가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뭐든. 이곳에 있는 것보다는 뭐든 나을 거예요! 그게 어떤 일이라고 하든!”

악에 받쳐 던진 외침에 웃고 있던 그의 입가가 딱딱히 굳었다.

그는 이내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모욕했다.

“너보다 40살 이상이나 나이가 많은 사내의 후처로 시집이라도 갈 기세군.”

에블린의 앞으로 들어왔던 중매를 기억하며 끄집어내는 모습에 그녀는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그래요, 차라리 그게 낫겠네요. 아니, 페제토 자작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어요. 그곳이 어디든 당신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편히 숨 쉬며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하.”

체이서는 짜증스럽다는 얼굴로 에블린을 비웃었다. 그리고는 위협적인 눈빛으로 낮게 으르렁거렸다.

“……내가 그 꼴을 가만히 지켜볼 것 같나?”

커다란 손이 거추장스러운 잠옷 자락을 끌어 올리고서는 단번에 에블린의 허벅지를 움켜쥐었다.

“뭐, 뭐 하는 짓이에요?”

몸을 타고 흐르는 소름 끼치는 감각에 에블린이 그의 손을 털어내려 했으나 그럴수록 허벅지를 쥐는 손의 악력만 더해질 뿐이었다. 

“네가 순결을 잃어버렸다는 걸 알면 페제토 자작이든 누구든 널 받아 주려고 할까?”

“……장난치지 마요.”

“장난으로 보여?”

“…….”

체이서의 안광이 형형하게 빛났다. 그의 눈에 서린 진심을 읽은 에블린은 수치스러움과 모욕감에 고개를 돌렸다.

“좋은 말로 할 때 얌전히 굴어. 강제로 안는 짓까지는 하고 싶지 않으니까.”

허벅지를 움켜쥐었던 손이 떨어지더니 에블린의 뺨을 잡고는 억지로 고개를 돌리게 하였다.

“우리의 계약은 이대로 진행되는 거야. 결혼하고, 치료제도 개발하고, 후계자가 자랄 때까지 계속 내 옆에 있는 거라고.”

하도 울어서 나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눈물이 다시 스멀스멀 눈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리고 혹시 모르지 않나. 맡은 바를 훌륭히 해 주면 내가 예정보다 더 빠르게 이혼해 줄지.”

어떻게 저렇게 배려 없이 못된 말만 꺼낼 수 있는 걸까.

“다시 한번 잘해 보자고, 에블린.”

원망, 증오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가슴 속에서 휘몰아침에도 에블린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지독한 비참함만이 남은 이 순간,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그를 욕하고 미워하는 것뿐이었다.

“당신을 저주할 거야. 평생토록.”

“평생토록 내 옆에 있어 주겠다고?” 

뜨겁게 끓어오르는 분노에도 체이서는 만족스럽게 웃을 뿐이었다.

“그것참 반가운 소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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