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
에블린은 멍청한 표정을 지은 채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저를 내려다보는 체이서의 시선이 너무도 낯설어서,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충격적이어서.
‘루이사 공작이 마물화에 감염되었다고?’
지금까지 이상하게 여겨졌던 의문들이 퍼즐 맞춰지듯 전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루이사 공작은 모종의 이유로 마물화에 감염이 되었고, 소문이 새어 나가면 안 되니 그의 거처를 별관으로 옮겼을 것이다.
병문안 오는 이들을 위해 따로 가짜 거처를 마련해 두고, 실제로는 공작을 이렇게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가두어 놓았을 테고.
고칠 수 없는 병이니 주치의가 옆을 지킬 필요도 없었으며, 그를 병간호할 사용인들조차 필요치 않았다. 에블린이 맡았던 약초향도 눈속임이었던 것이다.
두려움에 떨면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데 도망치는 걸 용납지 않겠다는 듯 새로운 질문이 그녀의 발을 옭아맸다.
“공작인 걸 어떻게 알아차렸지?”
평소의 다정한 모습을 말끔히 지우고서 온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한 모습은 꼭 수도원에서 처음 만났을 때를 보는 것 같았다.
마물은 어느새 체이서가 피운 불을 피해 스스로 철창 안으로 들어갔고, 그는 철창문을 잠그고서는 품속에서 마도구로 보이는 것을 꺼내 문 위에 붙여 놓았다.
“일단 이곳은 너무 어두우니 다른 곳에 가서 마저 대화하지.”
체이서는 에블린의 답도 듣지 않고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선 강제로 2층으로 끌고 올라갔다.
텅 빈 가주의 방에 도착하고 나서야 에블린은 정신을 차리고선 그의 손을 뿌리쳤다.
“궁금한 게 많아 보이는 표정이네.”
공작은 어떻게 마물이 되었는지, 마물화에 걸린 감염자를 어째서 살려 둔 건지,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던 건지 등. 궁금한 게 한두 개가 아니었지만 돌아올 답이 무서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대로 이 상황을 못 본 척 무시하고 지나가면 지금까지 품에 안았던 평화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에블린은 그럴 수가 없었다.
다른 일이라면 모를까, 마물화와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절대로 모른 척 넘어갈 수가 없었으니까.
“왜…….”
에블린은 떨려 오는 숨을 진정시키며 침착한 낯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마물이 여기에 있는 거예요?”
“글쎄.”
체이서가 몸을 돌리고는 성큼 다가와 에블린의 앞에 섰다.
“왜일 것 같아?”
다정함이 사라진 서슬 퍼런 눈빛을 마주하니 가슴이 죄이는 것 같은 통증에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믿을 수 있고 든든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그였건만 지금은 마치 포식자 앞에 선 듯 몸이 저절로 덜덜 떨려 왔다.
“응, 에블린? 왜일 것 같냐니까?”
“시, 실험체라든가…….”
그나마 최악과 거리가 먼 가정을 내뱉자 돌아오는 건 실소였다.
“생각은 하고 말하는 거지?”
돌아오는 노골적인 비웃음에 에블린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가만 보면 오히려 나보다 네가 더 비윤리적인 것 같다니까.”
대화가 오갈수록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는 평정이 흔들려서 괴로웠다.
“그래, 인제 와서 숨기기도 웃기겠지.”
체이서가 입가에 선량한 미소를 머금은 채 가까이 다가왔다.
꼭 악마가 사람을 유혹하기 위해 내비치는 미소처럼 달콤하고 소름이 끼쳤다.
“왜 공작이 여기에 있냐고?”
에블린이 도망치듯 뒷걸음치자 그가 바짝 뒤쫓으며 그녀가 물러난 만큼 따라 발걸음을 내디뎠다.
“마물이 되었으니까.”
“가까이 다가오지 마요.”
“그럼 왜 마물이 된 공작이 죽지 않고 이곳에 있는지도 알려 줘야겠지?”
에블린이 다시 뒷걸음질을 치려다 벽에 부딪쳤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뒤로 물러나요.”
“궁금하다며? 약혼자로서 궁금증은 해결해 주는 게 도리 아니겠어?”
“물러나라고 했어요.”
에블린이 힘을 주어 말했으나 체이서는 듣지 않았다.
그는 커다란 체격을 이용해 에블린이 더는 도망가지 못하도록 그녀의 앞을 막고서는 비밀을 말하듯 은밀하게 속삭였다.
“공작은 살아 있어야 했거든.”
“…….”
“적어도 다시 사람으로 되돌아올 때까지는 말이야.”
‘사람으로 되돌아올 때까지라니?’
이상했다.
이래서야 꼭 마물화의 치료제 개발의 목적이 공작 때문인 것 같지 않나.
“설마 공작 때문에…….”
울음기 서린 목소리에 묻혀 발음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공작 때문에 치료제를 개발하려던 거였어요? 아니죠……?”
제발 아니라고 말해 주길 바랐다.
치료제 개발 자체가 목적이라고,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노력하던 것이라고.
공작 또한 한 명의 환자에 지나지 않다는 말로 변명이라도 해 주길 바랐다.
그녀의 기대를 보답하듯 체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물이 처음 나타났을 때, 멍청하게도 공작은 마물을 살펴보다가 물려서 감염되었어. 그대로 죽이면 참 편했겠지만, 아쉽게도 그가 해 줄 일이 남아 있어서 죽일 수가 없었지.”
그는 안타까운 얼굴로 공작에게 일어난 참사에 대해 설명을 이어갔다.
“그래서 나는 사람이 들지 않는 별관에 공작을 가두었고, 치료제 개발을 위해 힘썼지. 마냥 공작을 위해서만은 아니었어. 전염병을 해결할 치료제는 필요했으니까. 그런데 치료제는 영 진전이 없었고.”
체이서는 다정한 목소리를 내어 에블린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던 도중 항체인 네가 나타난 거야, 에블린. 마치 운명처럼 내 눈앞에 말이야.”
커다란 손이 달달 떨리고 있는 에블린의 뺨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네가 상처받을까 봐 공작과 관련된 일을 숨겼던 건 사과하지. 그리고 다시는 마물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 숨기지 않겠다 약조하도록 할 테니까.”
체이서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와 두 사람의 코끝이 스쳤다.
조금만 고개를 기울이면 금방이라도 입술이 맞닿을 만큼 가까워졌을 때 체이서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러니 그리 화내지 마.”
그녀를 다독이는 목소리는 설탕처럼 감미로웠다.
“치료제가 개발되면 공작뿐만 아니라 다른 피해자들 또한 치료된다는 사실은 변치 않잖아.”
너무도 달아서 해가 될 만큼.
변명을 바라던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이토록 가식적인 얼굴로 변명은 내뱉는 체이서의 모습은 생각보다 더 최악이었으니까.
“치료제를 기다릴 수 있었다면…….”
그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에블린은 지독한 배신감에 치를 떨며 체이서를 밀쳐내며 외쳤다.
“적어도, 적어도 그날, 제 가족을 그렇게 잔인하게 죽이지 않아도 되었던 거잖아요!”
그를 향한 미움과 원망이 너무도 커져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다.
“비가 오던 그날 밤, 전 당신을 향해서 간절히 빌었어요. 제발 제 가족을 살려 달라고. 죽이지 말아 달라고!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했죠?”
가차 없이 제리를 죽이고, 울부짖던 에블린을 수도원으로 끌고 가 시체가 되어 불타고 있는 가족들을 보여 주었다.
마물은 죽여야 한다며 그들의 죽음을 에블린에게 합리화시키지 않았었나.
“모두 죽였어. 모두 당신이 죽였다고!”
그래 놓고 인제 와서 치료제를 기다리며 공작을 살려 두었다고?
다른 사람들은 가차 없이 죽여 놓고 그리 말한다면 어찌 믿을 수 있을까.
“당신은 그저 공작만 살았으면 되었던 거잖아. 항체인 내가 협조하지 않을까 나를 달래려는 것뿐이잖아……!”
그러자 마치 가면처럼 입가에 자리하던 올곧은 미소가 사라졌다.
“맞아.”
체이서는 웃음기 없이 서늘한 낯으로 그녀가 원하는 진실을 답해 주었다.
“다른 사람 따위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난 공작만 살아 있으면 되니까.”
에블린은 허망한 두 눈으로 체이서의 눈을 바라보았다.
황금빛 두 눈에 서려 있던 찬란한 빛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양 조금의 빛도 없이 그늘져 어둡게 물들어 있었다.
무너지기 직전의 에블린에게 해 주었던 다정한 위로와 굳은 신념은 모두 거짓이었던 걸까?
“그들에게 네가 희망이 될 수가 있어.”
“네가 있다면 진전이 없는 치료제의 개발을 금방 이뤄 낼 수 있을지도 몰라.”
“죽은 네 가족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또 앞으로 그들과 같은 피해자를 막아내기 위해 나와 함께하지 않겠어?”
자신의 잘못을 벗어 던지지 못한 채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방랑자와 같은 저를 구원해 주었던 찬란한 빛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비밀이 드러나자 다정한 겉모습에 감춰 뒀던 체이서의 진심을 알 수 있었다.
그래, 그날 그의 눈에서 보였던 것은 신념이 아니라 공작을 사람으로 되돌리기 위한 목표뿐이었다.
체이서 루이사는 에블린이 항체라는 것을 알게 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녀를 속였고, 에블린은 멍청하게도 손쉽게 속아 넘어갔다.
제게 보여 주던 모습들이 모두 거짓이었단 게 믿기지 않았다.
“같잖게 다정한 척하던 연기를 집어치우니 이렇게 개운할 수가 없군.”
체이서는 에블린이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던 희망의 끈을 놓다 못해 강제로 끊어 버렸다.
심장이 차게 식는 기분이란 게 이런 것일까.
에블린은 파도처럼 밀려드는 충격에 버티지 못하고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자신을 이해해 준 체이서가 좋았다.
제게만 보여 주는 다정한 모습에 심장이 간질거리며 설렜으며, 그가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다.
에블린에게 있어 체이서 루이사는 구원 그 자체였단 말이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체이서는 제 삶의 구원자가 되어 주었으면서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는 말과 함께 매몰차게 돌아섰다.
에블린의 삶에 스며든 빛은 구원은커녕 진실이라고는 조금도 섞이지 않은 지독한 기만이었다.
콩깍지가 벗겨지듯 숨겨진 진실이 드러나자 비로소 그의 잔혹함 눈에 보였다.
“하하하…….”
자신의 한심함에 미친 사람처럼 절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에블린은 떨구었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칼날을 품은 듯 서늘한 눈빛에는 아무런 감정이 서려 있지 않았다. 저를 향한 미안함, 죄책감 혹은 후회 같은 감정이 조금도 비치지 않음에 더더욱 마음이 아팠다.
체이서는 에블린이 괴로워하는 이 순간마저 외면하며 그녀에게 쌓아 온 신뢰를 모두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현실에서 도망치지 말라는 듯 시끄러운 천둥소리가 에블린의 귓가를 때렸다.
꼭 오늘과 같았다.
천둥과 번개가 요란히 하늘에 울리고, 거세게 내리치는 비가 시야를 어둡게 가리던 그날 밤.
마물화에 감염된 수도원의 소중한 가족들을 죽은 날도 오늘과 같았단 말이다.
“그러게 왜 내 경고를 무시했어, 에블린.”
체이서는 주저앉아 있는 에블린의 뺨을 가볍게 치듯 톡톡 두드렸다.
“아무것도 몰랐다면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언제나 다정히 대해 주고, 예뻐해 줬을 텐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체이서는 끝까지 에블린을 기만했다.
“가엾기도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