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에블린이 뛰기 시작하자 쇠가 긁히는 듣기 싫은 소리가 들리더니 곧 거센 뜀박질 소리가 뒤를 따라왔다.
들어왔던 문을 열고 빠져나려는 찰나 뒤에서 느껴지는 오싹한 느낌에 황급히 몸을 굴러 옆으로 피했다.
‘헉!’
조금 전까지 에블린이 열려고 했던 문 위로 거대한 발톱이 박혀 들어간 게 보였다.
마물이 문에 박힌 손톱을 빼기 위해 손을 흔들자 큰 소리를 내며 문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 에블린은 방의 구석까지 필사적으로 기어갔다.
그나마 어둠에 적응된 눈 덕에 벽의 끝 정도는 구분할 수 있을 정도는 되어 다행이었다.
겨우 구석에 도착한 에블린은 최대한 몸을 웅크려 안고서는 손으로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혹시 제가 비명을 지를지도 모르기에, 또 조금이라도 숨소리를 줄이기 위해서.
‘크, 큰일 날 뻔했다.’
조금이라도 피하기를 망설였다면 문대신 박살 나는 건 에블린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문은 부서졌고, 어떻게 도망쳐 나간다고 한들 저 그것도 문제였다.
마물이 이 방을 빠져나가 에블린 대신 새로운 표적을 찾을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체이서가 자리를 비운 지금, 분명 대참사가 일어날지도 몰랐다.
마물은 부서진 문가 너머로 손을 휘적이더니 파직하고 손에 전류가 튀자 짜증 섞인 울음소리를 내었다.
‘못 나가나? 아, 들어오기 전에 벽에 뭐가 붙어있다 싶더니 마도구였나 보구나!’
그렇다면 저 마물이 밖으로 탈출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왜 이곳에 마물이 있는 거지?’
환자인 가주가 거주하고 있음에도 사용인이 머물지 않는 저택의 별관, 텅 비었던 방 안이 떠오르자 오싹하고 소름이 돋았다.
‘애초에 체이서는 왜 별관 지하에 가지 말라고 했던 걸까?’
마물이 이곳에 있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물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왜 마물을 저택에 가두어 두고 있던 건지, 어째서 자신에게 알려 주지 않은 건지 의문만 가득 쌓여 갔다.
그르르릉-
그러나 다시금 들려오는 마물의 울음소리에 생각이 더 이상 이어질 수가 없었다.
마물의 거친 숨소리와 간간이 들리는 울음소리, 쏟아지는 빗소리가 뒤섞여 조용한 방 안을 울렸다.
적당한 소음 덕에 아직 에블린이 숨어 있는 위치가 들키지 않은 것 같았다.
‘침착하자, 에블린. 침착해야 살아.’
다행히 마물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아무래도 에블린이 보이지 않으니 찾기 위해 두리번 거리는 것 같았다.
‘이대로 누군가 도와주러 올 때까지 버텨야 하나?’
언제까지?
구하러 온다 한들 누가?
순간적으로 체이서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애초에 그는 수도에 있지도 않았다.
그때, 가만히 서 있던 마물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쿵, 쿵 울리는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더니 끼이익 하고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제자리로 돌아간 건가?’
당장 몸을 움직이고 싶었지만, 자신을 유인하기 위한 함정일지도 모른다 생각을 하니 몸이 바닥에 붙기라도 한 듯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생명이 달린 일 인만큼 서둘러서 좋을 것 하나 없었다.
문밖에 마도구가 설치되어 있다면 문만 빠져나가면 무사히 살아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조금만, 조금만 더.’
에블린은 마물이 새로운 행동을 하는지 파악하기 위해 귀를 열어 소리에 집중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 순간 조용히 울리던 숨소리가 변하였다.
마치 잠이 든 것처럼 조금 더 커지고 규칙적인 숨소리로 변하였다.
‘지금이다.’
에블린은 무작정 제가 달려온 문 쪽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에블린의 기척에 깨어난 마물이 쾅, 쾅 땅을 울리며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속도를 높이고, 보폭을 넓혀 젖 먹던 힘을 쏟아 달렸지만, 에블린이 문 앞에 도달하는 것보다 마물이 그녀를 따라잡는 속도가 더 빨랐다.
“꺄아악!”
마물은 커다란 손으로 단번에 에블린의 허리를 낚아채 공중으로 들어 올려 도망칠 수단을 차단해 버렸다.
이대로 마물이 조금만 힘을 주변 허리가 부러질지도 몰랐다.
‘이, 이대로 죽는 건가?’
마물은 당장 에블린을 잡아먹기라도 할 생각인지 쩌억, 하고 입을 크게 벌리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아무리 에블린이 항체라고 하지만 몸이 통째로 물어뜯긴다거나 부러진 뼈가 장기를 찌르면 죽을 것이다.
“사, 살려 주세요. 제발…….”
두려움에 눈물을 흘리며 빌어 보았지만, 마물은 에블린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에블린이 슬쩍 눈을 떠보니 마물이 입을 닫고서 마치 관찰하듯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에블린은 두려움에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이 틈을 타 어떻게든 도망치기 위해서 제 허리를 붙잡은 손을 풀어내기 위해 낑낑거렸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팔과 다리가 자유로우니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면 탈출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벗어나기 위해 힘껏 두꺼운 손가락을 밀어내는데 손에 비늘과 다른 차가운 것이 만져졌다.
‘그러고 보니 아까 마물이 뭘 끼고 있었던 것 같은데.’
최대한 침착하게 손가락 주위를 더듬거리며 만져 보니 동그란 펜던트가 달린 것이 꼭 반지 같았다.
평범한 반지는 마물의 손가락을 버틸 수 없을 테니 특별한 마도구인 것같이 보였다.
이 마물은 혹시 모를 상황을 위해 감금이 된 실험체 같은 존재였던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두려워할까 봐 체이서가 일부러 말 안 한 걸까?’
자신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별관의 지하까지 내려온 것일까.
체이서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는 생각에 뒤늦은 후회가 찾아왔다.
에블린이 머뭇거리던 사이 마물이 다시 입을 벌렸다.
‘그래도 이대로 죽을 순 없어.’
손발이 자유로운데 아직 포기하기는 일렀다.
에블린은 두 눈을 부릅뜨고선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눈을 향해 힘껏 발을 찼다.
그어억-!
발차기가 정확히 눈에 명중한 모양인지 마물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으며 그대로 에블린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에블린은 바닥을 몇 번이고 굴렀지만, 다급히 일어나 문을 향해 뛰었다.
부서진 문의 잔해를 잘못 밟아 미끄러질 뻔한 위기를 넘기고서야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코앞이었다.
에블린은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에 그대로 몸을 내던지며 밖을 향해 손을 뻗었다.
‘됐……!’
그러나 죽을힘을 다해 쏟아 낸 마지막 기회는 실패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무사히 몸이 밖으로 튕기는 찰나의 순간, 정신을 차리고 뒤쫓아온 마물이 뛰어오르는 에블린의 발목을 그대로 낚아챈 것이다.
“이것 놔!”
어찌나 힘을 꽉 주었는지 발목이 부서지는 것만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문을 코앞에 두고 실패할 수 없기에 필사적으로 자유로운 반대쪽 발로 마물의 팔을 걷어찼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싫어, 싫다고!”
마물의 손길에 에블린의 몸은 주체 없이 질질 끌려가기 시작했다.
있는 힘껏 바닥에 손톱을 세워 보았지만, 이 또한 효과가 없었다.
마물은 이번에야말로 에블린을 저 철창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도망처를 차단한 채 자신을 잡아먹을 모양이었다.
“안 돼! 이것 놔!”
아무리 발버둥 치고 애원해도 화가 난 마물을 막을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쾅, 하고 거센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에블린은 죽음의 구렁텅이로 끌려 들어간다는 생각에 눈물을 터트렸다.
“흐윽, 흑.”
에블린은 곧 다가올 고통과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떠오르는 한 사람의 이름을 울부짖기 시작했다.
“체이서, 체이서!”
어린아이가 위기에 닥쳤을 때 부모를 찾듯이 에블린 또한 울부짖으며 저를 지켜 줄 수 있는 가장 믿음직한 이의 이름을 불렀다.
이곳에 체이서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본능적인 외침이었다.
마물이 에블린을 다시 들어 올리려는 그 순간.
“이건 또 무슨 난장판인지.”
기적처럼 가장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블린은 마물에게 질질 끌려가다 말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둠에 가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누군가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체이서? 정말 체이서예요?”
크아아악-!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는 듯 뒤에서 마물의 끔찍한 비명이 들려왔다.
엉거주춤 상체를 일으킨 에블린이 뒤를 돌아보자 에블린을 잡아챈 팔 한쪽에 거대한 불이 휩싸인 것이 보였다.
마물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벽에 몸을 부딪치며 괴로움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정말 구해 주러 왔어.’
에블린은 멍하니 마물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체이서가 옆에 있다는 사실에 그제야 안도할 수 있었다.
‘뭘 잘했다고 계속 우는 거야.’
에블린은 눈가에 고인 눈물을 훔치고는 고개를 돌렸다.
“내 말 다 무시하고, 마물의 먹이라도 되어 주려 왔나 보지?”
불길에 드러난 체이서는 평소와 달리 서늘한 얼굴로 에블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막 공작저로 돌아온 모양인지 외출복 차림에 에블린의 죄책감은 더욱 커졌다.
“체, 체이서. 미안해요. 저는 그냥 아픈 사람이 있는 것 같아서 도와주려…….”
“다친 곳은?”
“괘, 괜찮아요. 정말 미안해요, 이런 사고를 치려던 건 아니었어요…….”
체이서는 단단히 화가 났는지 에블린의 말을 더 듣지 않고 그대로 지나쳐 갔다.
시선도 주지 않고 발걸음을 옮기는 체이서의 모습에 에블린은 밀려오는 서러움을 참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려고 했다.
‘잠깐만.’
에블린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체이서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파견을 떠나던 날 입었던 것과 같은 어두운 망토를 걸치고 있었는데, 그의 왼쪽 가슴팍에는 루이사를 상징하는 백합이 새겨진 펜던트가 달려 있었다.
에블린은 이번에는 고통에 찬 마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대한 불꽃 덕에 마물이 끼고 있는 거대한 반지에 새겨진 문양이 보였다.
바로 루이사를 상징하는 백합 문양이었다.
무언가 머릿속에 팟, 하고 터지는 느낌과 동시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에블린은 과거에 저 반지를 본 적이 있었다.
“설마…….”
바로 게임의 마지막 미션인 공작위를 계승받게 되면 자동으로 받게 되는 아이템인 ‘루이사 가주의 반지’였다.
“그 마물 루이사 공작이에요……?”
바싹 메마른 입술 사이로 거칠게 갈라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체이서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부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차라리 비웃어 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체이서는 에블린의 그러한 기대를 버린 채 싸늘히 비소를 지으며 답할 뿐이었다.
“눈치가 빠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