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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60)화 (60/159)

 60화

착각이 아니라는 듯 어정쩡하게 멈춰 서 있는 에블린의 귀에 다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우는소리 같기도 했고, 고통 어린 신음 같이 들리다가도 다시 들어보면 꼭 짐승의 울음소리와 비슷하게 들려왔다.

“내가 잘못들은 게 아니었단 말이야?”

마치 에블린의 물음에 답을 해 주듯 바람을 타고 예의 그 이상한 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공작이 내는 소리인가?”

그렇다면 공작을 간병하는 사용인들이 나서는 게 맞을 텐데.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꽤 오랜 시간 가만히 서 있었지만, 별관의 불은 켜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설마 안에 아무도 없는 건가?”

보통 이렇게 환자가 있는 경우는 간병하는 이들을 여럿 두고, 주치의도 가까이 두어 급한 상황에 투입될 수 있도록 하지 않나?

이 이상한 상황을 못 본 척, 못 들은 척 돌아가자니 공작이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에블린은 머리를 붙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환자를 두고 떠나자니 가슴 속의 양심이 날카로운 비수에 찔리듯 따끔거려 도무지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도움을 줘야지.”

에블린은 라사냐가 가르쳐 준 가치관을 이기지 못하고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 시간에 약초는 피우지 않겠지. 살펴보고만 오자.”

스스로에게 합리화하듯 혼자 중얼거리며 슬쩍 별관의 문을 열어 보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밖에서 보았던 것보다 저택 안이 더 깜깜했다.

에블린이 랜턴을 들고 안으로 들어서자 그 아래로 비치는 주홍색 불빛이 닿는 곳만 흐릿하게 보일 정도였다.

빛이 들지 않아 더욱 을씨년스러워 보이는 별관에는 에블린의 숨소리 외에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조용하다…….”

새벽의 고요함을 조금 더 즐기고 싶었지만, 환자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미적거릴 시간이 없었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여 2층까지 올라왔으나 그녀가 예상한 대로 가주의 방 앞을 지키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 호위도 없고, 간병인도 없네. 아무리 시간이 늦어도 그렇지. 환자가 있는데 이렇게 자리를 비우는 게 말이 되나?’

공작가라 돈도 많을 텐데 이러한 조처를 한 이유가 따로 있지 않은 한 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내일 마야에게 물어봐야겠네.’

에블린은 그리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공작의 방에 얼굴을 가까이 기울였다.

낮과 달리 약초의 향이 나지 않은 걸 보니 들어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무슨 소리가 들리기라도 할까 봐 문가에 바짝 붙어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별관 밖에서 들었던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실례하겠습니다.”

차마 노크는 하지 못하고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인사를 하며 문을 여는데 방이 꼭 비어 있는 것처럼 에블린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울려왔다.

‘……뭐지?’

랜턴을 들어 앞을 비추자 텅 빈 방이 보였다. 

인상을 쓰며 랜턴을 든 팔을 조금 더 뻗자 다행히도 침대 하나가 보였지만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 외의 다른 가구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환자의 방이라지만 너무 썰렁하잖아.”

그나마 마도구로 방의 온도를 관리라도 하지 않았으면 환자가 머무는 곳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에블린은 훈훈한 공기에 망토를 벗어 팔에 걸고서는 발뒤꿈치를 들고 침대를 향해 살금살금 걸어갔다.

‘그런데 불안하게 왜 숨소리도 안 들리는 거야.’

별관을 지켜보던 사이에 공작이 잘못된 건 아닐지 다시 덜컥 겁이 났다.

그러나 막상 침대 앞에 도착하였을 때 에블린은 다른 의미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없어?”

환자가 얌전히 누워 있어야 할 침대가 텅 비어 있었다.

에블린은 랜턴을 바닥에 내려놓고 침대를 살펴보았지만, 공작은 없었다!

“어떡하면 좋지?”

에블린은 랜턴을 챙겨 들고선 다급히 방을 살펴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공작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의식을 차린 건가?”

그래서 아픈 소리를 내면서 사람을 찾았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문이 열리는 소리 같은 건 들리지 않았으니 분명 별관 어딘가에 공작이 있을 것이다.

“찾아야 해.”

공작이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이런 추운 날 병든 몸으로 밖을 나섰다가는 정말로 큰일이 날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 순간.

으아아아악-

그때, 에블린이 들었던 소리와는 또 다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일부러 목을 긁어 내며 외치는 소리에는 고통이 가득했다.

그리고 지금 이 장소에서 저런 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공작뿐이었다.

“역시 별관 안에 있었구나!”

다행히도 금방 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 에블린이 랜턴을 챙겨 다급히 소리가 들린 쪽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그아아아악-

꾸준히 들려오는 소리에 에블린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계단을 두 칸씩 뛰어 내려가며 1층에 도착했건만 아무리 살펴보아도 1층 어느 곳에도 공작이 보이지 않았다.

그으으어-

에블린이 로비로 돌아왔을 때,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더 아래쪽에서 들리는데?”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따라갔을 때 보인 것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지.”

내려가자니 체이서가 떠나기 전 별관 지하에는 내려가지 말라 했던 말이 떠올랐고, 그냥 돌아가기에는 이 아래에 공작이 있을 게 분명했다.

그것도 큰 병을 앓고 있는 환자인 상태의 공작이 말이다.

에블린은 계단 앞에 서서 차마 내려가지 못한 채 팔만 쭉 뻗어 랜턴으로 아래를 비추어 보았다.

별관을 돌아다니느라 눈이 어둠에 적응이 되었음에도 위층보다 아래층이 유독 더 깜깜해 보였다.

1층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공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소리는 지하에서 들려오고 있다.

마치 에블린을 부르듯이.

“후우.”

사실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사람의 생명이 달린 일이잖아.”

당연히 지하에 내려가 공작을 데리고 오는 게 맞았다.

본관까지 뛰어가 저택의 사용인들을 부르는 방법도 있지만, 그사이 공작이 또 어디로 사라질지 모르니 이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말 안 들어서 미안해요, 체이서.’

어째서 별관의 지하에 가지 말라고 했는지 이유는 듣지 못했지만, 공작과 관련된 일이었다면 그도 충분히 이 상황을 납득하고 이해해 줄 것이다.

어느새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지, 1층 복도의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나가기도 글렀네.’

에블린은 침을 꿀꺽 삼키고선 1층으로 뛰어 내려오던 것과 달리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작은 주홍색 불빛에 의존하여 겨우 내려왔건만 막상 마주한 것은 텅 빈 복도였다.

‘괜히 왔나.’

귀신의 존재를 믿는 건 아니었지만, 막상 혼자서 이렇게 어두운 곳을 탐험하듯 돌아다녀야 한다는 사실에 살짝 겁이 들었다.

에블린은 짧은 후회를 하면서도 앞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복도는 양쪽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방향을 잡는 건 어렵지 않았다.

쿵, 쿵-

지하로 내려오자 무거운 무언가를 내려치고 있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또 한참을 걸었을 때 마주한 것은 복도의 끝에 있는 문이었다.

“방인가?”

하지만 그냥 방이라고 하기에는 문이 너무 컸다.

‘벽에 뭐가 붙어 있는 것 같은데 너무 높이 있어서 잘 보이지 않네.’

에블린은 주위를 불빛에 비추어 보다가 결국 문이 이곳밖에 없다는 것에 한숨을 내쉬었다.

꺼림칙함에 문을 열기 망설이는데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더욱 큰 소음이 진동과 함께 들려오기 시작했다.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에블린은 커다란 문을 몸으로 밀어 겨우 열고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역시나 어둡네.’

조명 정도는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여전히 빛은 에블린이 들고 있는 랜턴이 전부였다.

“공작님, 계세요?”

이곳도 넓은 것에 비해 가구가 없는지 에블린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울렸다.

‘아무래도 별관은 더 신경 써야 할 것 같은데?’

하녀들은 부족한 것이 없다고 했지만, 후에 손님들을 모시게 될 곳이 이리 부족하다면 공작가의 평판은 바닥을 칠 것이다.

‘이 건은 돌아가서 집사랑 이야기해 봐야겠네.’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에블린 바이아르도라고 해요. 체이서와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랍니다. 도와드리러 찾아왔어요.”

방에는 아무도 머물지 않는지 가주의 침실과 다르게 꽤나 쌀쌀했다.

귀찮아서 1층 계단에 두고 온 망토가 그립다고 생각하며 더듬더듬 앞으로 걷는데.

기다란 쇳덩이 같은 게 앞을 막았다.

“이건 뭐지?”

랜턴을 들어 올려 보자 천장부터 바닥까지 연결된 두꺼운 쇳덩이가 에블린 바로 앞에 촘촘히 박혀 있었다.

“꼭 쇠창살 같은데……. 설마 이 안에 계세요?”

마치 감옥을 연상시키는 모습에 에블린이 이상함을 느끼며 중얼거리며 랜턴을 더욱 앞으로 빼보는데.

쾅-!

“꺄악!”

무언가가 쇠창살에 부딪힌 듯 밖에서 들었던 커다란 소리가 눈앞에서 들렸다.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리며 떠는데 부딪혔던 소리와는 또 다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것도 꽤나 가까운 곳에서.

우웅- 하고 부딪힌 쇠가 진동하는 소리와 함께 에블린이 들고 있는 불빛 앞으로 무언가가 튀어나와 쇠창살을 붙잡았다.

날카롭게 갈아진 거대한 발톱, 두꺼운 팔 위를 채운 것은 사람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파충류 특유의 비늘.

그 순간 반짝, 하고 불빛에 비추어 무언가 반사되어 보였다.

‘저건 뭐지?’

거대한 발톱 위로 둥근 형체의 무언가가 감싸 있었는데 아무리 보아도 반지같이 보였다.

하지만 생각을 더 이어갈 수는 없었다.

그어어-

제일 처음 에블린이 들었던 기묘한 울음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아…….”

고개를 들어 올리자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붉은 색의 무언가가 보였다.

에블린은 덜덜 떨면서도 저도 모르게 랜턴을 든 손을 천천히 위로 들어 올렸고.

“허억!”

이내 자신을 내려다보는 거대한 존재와 눈이 마주치며 깜짝 놀라 손에 들린 랜턴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쨍그랑,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이곳을 채우던 유일한 불빛이 사라졌다.

불빛에 비추어 잠깐 보았던 모습은 눈을 형형히 빛내며 저를 노려보고 있는 도마뱀을 닮은 거대한 괴물이었다.

주위의 빛이 사라지자 붉디붉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것이 느껴졌다.

‘마, 마…….’

차마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마치 참사가 일어난 그날 밤처럼 우르릉 쾅, 하고 벼락이 내리치는 소리가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제 목을 조르기라도 하는 것만 같이 숨이 턱 막혀 왔다.

동시에 소중한 수도원의 가족들이 모두 죽은 그날 밤의 장면이, 마물이 되어 버린 그들의 끔찍한 모습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형태는 조금 달랐지만 이건 분명 수도원에서 보았던 마물의 모습과 비슷했다.

‘도, 도망가야 해.’

에블린은 몸을 돌리지도 못한 채 살금살금 뒷걸음을 쳤으나.

“그아아아악-!”

먹이가 도망치는 것을 눈치챈 마물이 소리를 지르며 광포하게 쇠창살을 흔들기 시작했다.

끼기긱.

들려서는 안 될 소리가 함께 들렸다. 

구석에 있던 철창문이 마물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열려 버린 것이다.

에블린은 더는 지체하지 않고 거센 울음소리를 뒤로한 채 그대로 뒤를 돌아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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