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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59)화 (59/159)

 59화

“오늘도 날씨가 안 좋네.”

봄이 오기 전, 비가 크게 내릴 생각인지 근래 며칠 동안 하늘이 먹색으로 우중충하게 물들어 있었다.

에블린은 책을 읽다가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리저리 흐트러진 게 꼭 내 마음 같네.’

체이서가 형제들과 함께 에셋 영지로 떠난 지도 벌써 사흘째.

고작 사흘밖에 지나지 않아서 그런 걸까? 저택을 오래 비우게 되면 연락하기로 약속했었는데도 아직 연락이 없어 요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하지만 이 이벤트에서 꼭 누가 다치던데. ……그런데 플레이어는 나타나지 않는 걸까?’

에셋 영지에서 일어난 갑작스러운 이능력자 규탄 시위는 분명 게임의 중간 정도쯤 나오던 스토리였다.

그렇다는 건 플레이어가 진작 이 저택에 들어와 살고 있어야 한다는 건데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은 걸 보면……. 

‘아무래도 이 세상에 플레이어의 존재가 없는 건 아닐까 싶은데.’

무엇이든 확신하면 안 되겠지만 게임에 나오지 않던 마물화라는 전염병부터 시작해서 에셋 영지에서 일어나는 시위가 벌써 일어난 걸 보면 아무래도 이 세계는 원작 게임과는 조금 다른 방면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이러다가 플레이어가 갑자기 나타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모두가 플레이어에게 사랑에 빠지나?’

반사적으로 체이서가 얼굴 모를 플레이어에게 구애하는 장면을 떠올리자 속이 뒤틀리는 것 같이 마음이 불편해졌다.

“이대로 나타나지 않아 주면 좋을 텐데.”

에블린은 별생각 없이 중얼거리다 뒤늦게 벌떡 일어났다.

“맙소사,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야? 미쳤어!”

정신 차리라는 의미로 제 뺨을 가볍게 찰싹 때린 에블린은 이런 생각을 한 자신이 실망스러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길어서 쓸데없는 생각을 할 시간이 늘어났나 보다.

결국, 도무지 집중되지 않아 그대로 읽던 책을 덮고서는 몸을 돌렸다.

“아가씨, 어디 가시려고요?”

마침 새 차를 가져오던 마야가 갑자기 망토를 찾아 걸치고 있는 에블린을 보며 빠르게 다가와 시중을 들어 주었다.

“나 혼자 쉬려고 있으니 마음이 편치가 않아서.”

“계속 그리 말씀하시며 일하셔서 벌써 본관 저택 관리도 어제부로 끝났는걸요.”

“별관이 남았잖니.”

“별관은…….”

마야가 난감한 얼굴을 하며 말을 흐렸다.

‘이 저택의 사람들은 모두 별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걸 꺼리는 것 같았는데. 마야도 마찬가지인가 보네.’

하녀장인 그녀까지 탐탁지 않아 할 정도의 무언가가 있는 걸까?

“현 가주님께서 계시는 곳이지 않니. 부족한 것 없는지 잘 살펴봐야 하지 않겠어? 오히려 너무 늦은 것 같은데.”

“……하지만 날씨도 좋지 않고요. 그곳에서 일하는 이들에게 보수할 곳이 있는지 확인해 달라고 만 해도 충분치 않을까요?”

“후에 손님들이 오면 별관에서 머물러야 할 테니 내 손길이 좀 닿아야지 않겠니?”

마야는 정말로 내키지 않는지 열심히 에블린을 설득해 보려고 했으나 이건 가문의 안주인의 역할이니 남에게 미룰 수가 없었다.

‘체이서는 지하에만 가지 않으면 된다 했으니까 괜찮겠지.’

다만, 마야가 저렇게까지 꺼리는 걸 보니 쉽사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가주가 많이 무서운가?’

하지만 현 가주는 병져 누워 있기에 의식도 없다 들었기에 그 부분은 문제가 없었다.

“나도 별관은 멀기도 해서 가기 싫지만 어쩔 수 없잖아? 이왕 가는 김에 공작님 얼굴도 뵙고 와야겠다.”

생각해 보면 가문의 가장 큰 어른이니 진작 찾아보는 게 맞았다.

체이서가 약혼과 결혼에 대해 통보에 가깝게 전달했다는 것에 안심하며 잊고 있던 것이 오히려 예의에 없는 행동이지 않나.

‘의식은 없다고 했지만 그래도 인사는 드리고, 필요한 게 있는지 살펴보고 와야겠다.’

겸사겸사 별관의 사용인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는지 의견도 듣고 오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게임에서도 루이사 공작이 아팠던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에블린은 그나마 기억에 남아 있는 일러스트들을 떠올리다가 어째서 플레이어가 나타나지 않는지 깨달았다.

‘맞아. 플레이어는 루이사 공작이 잃어버린 딸이라며 직접 저택으로 데려오잖아. 그런데 공작이 병들어 누워 있으니 플레이어가 나타나지 않은 거였나 봐.’

그동안 시달리던 불안이 순식간에 해결이 되었다.

‘공작이 쾌차하지 않은 이상 플레이어가 나타날 일은 없겠구나. 체이서가 공작위를 뺏길 일은 없겠네.’

체이서의 말에 따르면 공작이 의식을 차리는 건 어려울 것 같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플레이어의 문제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에블린은 밀려오는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웃었다.

“아가씨도 참. 별관에 가시는 게 그리 좋으세요? 가주님께서 의식이 있으셨다면 정말 기뻐하셨을 텐데.”

지금까지 에블린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는 마야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결국 걱정을 지우고선 함께 웃어 주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며 경쾌한 발걸음으로 별관에 도착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예정했던 계획대로 루이사 공작을 만나 볼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약초를 피우는 시간에는 저희도 방으로 들어가지 못한답니다. 공작님께서 폐가 안 좋으신데 연기가 흩어지면 금방 숨을 쉬기 어려워하시거든요.”

거짓말은 아닌지 문과 몇 걸음 떨어져 있어도 문틈 새로 빠져나오는 약초 냄새는 코를 괴롭혔다.

루이사 공작의 병간호를 하는 하녀는 송구하다는 듯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말을 이어 갔다.

“보통 약초를 피우면 기본 세 시간은 소요되기에 아무래도 오늘 뵙는 건 어려울 듯 싶습니다.”

“그래? 결혼 전에 뵙고 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아쉽구나.”

“결혼식 후 소가주님과 함께 오시면 되지요.”

루이사 공작의 방 앞에 도착하자 눈에 띄게 굳어 버린 마야가 하녀를 두둔하며 어색히 웃어 보였다.

‘마야가 오늘따라 왜 이러지? 이상하네.’

“그래, 나도 막상 혼자 뵈려고 하니까 긴장이 되네. 결혼식 후, 체이서와 함께 찾아오마.”

덜덜 떨면서 고하는 모습에 강요할 수도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별관에 보수할 곳이 있는지, 혹 필요한 것들이 있는지 의견을 받고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집사에게 미리 물어보고 방문할 걸 그랬네. 집사라면 공작님의 약초 피우는 시간을 진작 알고 있었을 테니까.”

공작에게 인사를 해야겠다는 마음만 앞서 무작정 마야를 이끌고 별관에 찾아왔는데 모든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하였다.

“원래는 별관을 살펴보기 위해 오신 거니 헛걸음은 아니세요.”

“그런가…….”

‘그런데 마야는 약초 피우는 시간인 걸 몰랐나?’

마야의 위로를 받으며 이만 별관을 나서려는데 문득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발걸음을 멈추고서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세요, 아가씨?”

“아니, 무슨 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데…….”

“소리요? 저는 아무것도 못 들었는걸요. 아마 바람 소리가 아니었을까요?”

“그런가.”

‘저택 안에서 들려온 소리 같았는데…….’

에블린은 계단 쪽을 바라보다가 더 늦기 전에 어서 돌아가자는 마야의 재촉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확실히 별관을 나오자 바람이 거세게 부는 게 비바람을 몰고 올 기세였다.

‘그래,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보다.’

그렇게 찜찜한 마음을 뒤로한 채, 발걸음을 서둘렀다.

*** 

“으음…….”

한참을 사부작거리는 소리를 내며 침대를 뒤척이던 에블린이 한숨을 내며 몸을 일으켰다.

“영 잠이 안 오네.”

신문에도 시위에 대한 소식은 실리지 않았고, 체이서에게서도 연락이 없으니 자꾸만 안 좋은 생각이 깊어져 잠이 달아나 버렸다.

찬 바람이라도 쐬며 차라도 한잔할까 싶어 창문을 열까 말까 고민했지만, 이상하게도 영 끌리지 않았다.

“역시 차는 기분이 좋을 때 마셔 줘야 해.”

오히려 이런 기분으로 차를 마셨다가는 밤을 온전히 새워 버릴지도 모른다.

“잠시 산책이나 좀 할까?”

그러며 문을 열어 보았는데 문 앞을 지키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뭐지? 다들 어디 간 거지?”

교대 시간인지, 혹은 순찰 시간인지, 그것도 아니면 너무 늦은 새벽이라 쉬러 돌아간 건지.

‘이 시간에 깨어 있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네. 차라리 잘된 일인가?’

잠깐 이 앞만 산책할 생각인데 괜히 하녀들이나 호위들을 주렁주렁 달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혹시 저를 찾을지도 모르니 협탁 위에 잠시 산책하고 온다는 메모를 남겨 둔 뒤, 랜턴에 불을 붙여 챙겼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저택은 에블린이 움직이는 속도에 따라 타박타박하는 발걸음 소리만 울리고 있었다.

‘몰래 저택을 돌아다니는 것 같네.’

색다른 경험에 꼭 어릴 때로 돌아간 것 같아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하아아. 춥다.”

막상 잠이 오지 않을 때는 신경이 날카로워져 스스로에게 짜증이 났는데 이렇게 몸을 움직여 나와 찬 바람을 쐬니 답답함이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에블린은 체이서와 함께 산책했던 정원을 홀로 터벅터벅 걷다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가 올 듯 말 듯 하네.’

평소라면 검푸르게 물든 하늘에 별이 콕콕 박혀 있는 모습이 보였는데 오늘은 먹구름에 가려져 달도 별도 잘 보이지 않았다.

‘체이서는 괜찮을까.’

폭력시위라고 한들 기사단이 똑같이 폭력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진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시위대도 그걸 알고 온갖 방법을 이용해서 공격하느라 부상자가 많았던 것 같아. 대치가 길어지면 안 될 텐데.’

조금 전까지는 기분이 좀 괜찮아지는 듯싶었는데 체이서와 에셋 영지의 일을 떠올리니 다시 마음이 갑갑해졌다.

심각한 사안에 집중하느라 저도 모르게 오래 산책하였는지 이제 몸이 으슬으슬 떨려 오기 시작했다.

‘아, 슬슬 돌아가야겠다.’

메모를 남겨 두고 나왔지만, 저택이 시끄러워지기 전에 돌아가야 했다.

“어? 그런데 여기는 어디지?”

그저 앞을 보고 걸었을 뿐인데 오늘따라 날이 어두워 돌아가는 길을 찾기가 어려웠다.

하필 나무가 울창히 자라 있는 정원 깊숙한 곳에 서 있던 탓인지 심지어 커다란 본관의 건물도 정확히 보이지 않았다.

계속 체이서가 걱정이 돼 이렇게 깊이 들어온 줄도 몰랐나 보다. 

‘반대로 돌아가면 되려나?’

에블린은 어쩔 수 없이 반대쪽을 보며 한참이나 걸었다.

‘언제쯤 저택이 나오는 거야?’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드디어 정원이 끝이 났고, 확 트인 공간이 나타났다.

“드디어 도착……. 어?”

그러나 정원을 가까스로 탈출하여 도착한 곳은 저택의 본관이 아닌 별관이었다.

‘어째 밤에 보니까 더 으스스해 보인다?’

건물도 낡은 것 하나 없이 멀쩡하고, 불이 다 꺼져 있는 것도 본관과 똑같은데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별관에서 본관으로 가는 길은 따로 있으니까.’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바람을 타고 무언가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단순한 바람 소리가 아니었다.

‘이 소리는…….’

에블린은 돌리던 걸음을 멈춰 뒤를 돌아보았다.

어두컴컴한 별관, 그곳에서 낮에 들었던 그 소리가 다시 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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