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에블린이 잘못 본 건가 싶어 눈을 깜빡여 봤지만, 라리사의 입가에 자리 잡은 환한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 웃고 계신 건가요?”
라리사가 아차 하며 입을 다물었지만 그렇다고 에블린의 기억에서 그 미소가 지워지는 일은 없었다.
“어머나, 죄송해요. 왜 이리 웃음이 마르지 않는지.”
그걸 알았는지 라리사는 입가를 가리던 부채를 내리고서는 넉살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혹시 오해할까 봐 말씀드리는 거지만 저는 혼사를 반기지 않았답니다. 아버지께서는 꽤 열심히 추진하던 모양이었지만 저와는 상의도 없이 일을 진행한지라.”
“그러시군요.”
‘그럼 굳이 이렇게 말할 필요가 없지 않았나?’
사정을 파악하니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이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도 가슴 속에 차오르던 화가 식었으니 잠자코 이어지는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네, 저는 남편에게 기대어 그 집안을 이끌어가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거든요. 개인적으로 루이사 소공작처럼 성격 나쁜 이도 제 스타일은 아닌지라.”
화가 가라앉았나 싶더니 라리사가 이제는 새로운 방법으로 저를 당황하게 하기 시작했다.
‘분명 작년 에트레라고 하지 않았나?’
처음 만난 상대에게 예의가 없을 정도로 솔직하게 말하는 레이디는 본 적이 없기에 무어라 대꾸하는 게 좋을지 몰라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그건 라리사 또한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뒤늦게서야 제 말이 이상한 것을 눈치챘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지금 굉장히 솔직하게 말한 것 같은데…….”
“……네, 그렇네요.”
“내가 미쳤나? 어머.”
이제는 온전히 말이 주체가 되지 않는지 한껏 당황한 표정으로 굳어 버린 게 보였다.
“이, 이상하게 오늘 처음 보았는데도 꼭 오랜 시간 함께 했던 친구를 보는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자꾸 속마음이 나오네요.”
라리사는 당황한 것도 잊은 채 두 손을 맞대며 활짝 웃어 보였다.
“아무래도 제가 영애와 친해지고 싶나 봐요. 이렇게 우연히라도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이니 영애께서 괜찮다면 다음에 공작저로 편지를 보내도 괜찮을까요?”
사교계에서 사적으로 편지를 보내겠다는 건 친우가 되고 싶다는 것을 뜻하였다.
‘조금 이상해 보이지만 밀리오 후작가의 영애니 편지 정도라면…….’
에블린은 처음 보는 영애의 호의에 어리둥절하였지만, 적어도 악의는 없어 보이기에 그녀의 청을 받아들였다.
라리사는 흔쾌한 수락에 부채를 접고선 웃고 있다가 에블린의 뒤쪽으로 시선을 주저니 슬며시 인상을 찌푸렸다.
‘뭐지?’
뒤에 뭐가 있나 싶어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라리사가 갑자기 덥석 하고 에블린의 손을 붙잡았다.
“참,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영애가 쓰는 향수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요? 청량한 향에 절로 머리가 맑아지네요.”
“제가 고른 게 아니라 잘 모르겠네요. 다음에 편지를 보내 주시면 답장에 함께 써 보내 드릴게요.”
이 답이 만족스러웠는지 라리사는 기쁘게 웃고서는 고개를 숙였다.
“짧지만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다음에 만날 때는 편히 라리사라고 불러 주세요, 영애. 그럼 저는 이만.”
라리사는 빠르게 인사를 마치고서는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에블린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그제야 힘이 풀린 듯 벤치 등받이에 목을 기대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한 눈을 몇 번 깜빡이는데 그녀의 얼굴 위로 길게 그림자가 졌다.
‘설마 아직 안 갔나?’
라리사를 떠올리며 감았던 눈을 뜨는데 건너편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들어 올리는데 어느새 일을 끝마쳤는지 그녀가 등을 지고 앉은 벤치 위의 창문 밖에서 체이서가 에블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올려다 보는데도 얼굴이 완벽하지?’
에블린은 새삼스럽게 속으로 감탄하며 자세를 바르게 앉았다.
그는 서늘한 눈빛이 주위를 살피는 듯싶더니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겨 빠르게 에블린 앞으로 다가왔다.
“언제 왔어요?”
체이서는 그녀에게 손을 붙잡고서는 일으켜 세웠다.
그 와중에도 주위를 살피는 게 꼭 누구를 찾는 모양새였다.
“누구랑 대화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아, 보셨어요?”
자리에서 일어난 에블린이 잠시 말하기를 망설이자 체이서의 시선이 닿았다.
“그냥…….”
“그냥?”
지긋한 시선에 에블린은 잠깐 고민하더니 답해 주었다.
“얼마 전까지 체이서랑 혼담이 갔던 사람이요.”
“……뭐?”
체이서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일축하는 모습에 에블린이 헹, 하고 코웃음을 쳤다.
‘잠깐만. 생각해 보니 결혼 전에 어디서 혼담이 왔었다 정도는 말해 줘야 하는 것 아니었나?’
얼마나 당황했는지 떠올리니 뭔가 억울해져 장난도 칠 겸 새초롬히 그를 노려보는 시늉을 하였다.
“제가 여기 없었더라면 결혼이 진행됐을지도 모른다던데. 정말 모르는 거예요,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예요?”
그러자 체이서가 누군가를 떠올렸는지 확신이 없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아, 밀리오 후작 영애를 말하는 건가?”
“뭐야, 기억하고 계시면서 모른 척하신 거예요?”
아니라는 말이 나오길 바랐는데 그냥 까먹은 거였나?
분명 장난을 치려고 꺼낸 말인데 수긍하는 반응을 보이니 기분이 묘하게 나빴다.
“굳이 제가 없었어도 결혼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 같네요?”
“그럴 리가 없는 거 알잖아.”
“모르겠는데요.”
자세한 설명을 기대했건만 이미 다 안다고 생각해서일까? 체이서는 굳이 설명을 이어 가지 않았다.
“질투라도 했나?”
“질투요? 제가 왜 그런 걸 하겠어요?”
“그래?”
“우리 사이에 무슨 질투람.”
“그래, 그래.”
체이서는 심통이나 보이는 에블린의 손을 잡고서 익숙하게 팔짱을 꼈다.
“오늘 고생했으니 넘어질지도 모르지 않나.”
“제가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니고. 차라리 솔직하게 잡고 싶다고 말하면 될 텐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에블린은 손을 빼지 않았다.
결국, 체이서가 남은 오후 동안 계속 에블린의 곁에 있어 주고, 함께 침대에 누워 잠들고 나서야 이유 모를 심통이 온전하게 풀릴 수 있었다.
***
“늦네…….”
에블린은 저택의 보수 관련 서류를 내려놓고서는 괜히 창문 앞을 서성였다.
저녁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체이서가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리 일이 많아도 저택에는 일찍 돌아왔었는데.’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지 덜컥 겁이 났지만, 별일 아닐 것으로 생각하며 제 일에 집중하려고 했다.
하지만 창문가 앞에서 쉽게 떠날 수가 없었다. 곧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집중을 방해했다.
“아가씨, 아가씨!”
그때 갑자기 밖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거칠게 문이 열리며 마야가 다급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니, 마야?”
평소와 달리 심각한 얼굴에 에블린은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짐작하였다.
“아무래도 나오셔서 배웅하셔야 할 것 같아요.”
“배웅이라니? 혹시 체이서에게 무슨 일이 생겼니?”
심각한 얼굴에 에블린은 머뭇거리지 않고 재빠르게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어서 안내하렴.”
복도를 빠른 속도로 걸으며 마야가 자신이 알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알렸다.
“동부에 있는 에셋 영지에 능력자들을 규탄하라는 폭력 시위가 일어났다고 해요. 속국의 반동분자들과 엮어서 영지가 포위되었답니다!”
에블린은 머릿속으로 제국의 지도를 그려 보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첸트라 변방 백이 수호하고 있는 에셋 영지는 속국인 이웃 왕국 스푸니로드를 곁에 두고 있는 곳으로, 그곳이 무너지게 되면 수도까지 들어오는 길이 손쉽게 뚫려 버릴 위험이 있었다.
“소가주님을 포함한 다른 공자님들이 속한 기사단에서도 정예 부대가 차출되어 그곳으로 파견을 나간다고 합니다. 급히 떠나야 하기에 간단히 짐만 챙기려 조금 전에 오셨어요.”
“들어오는 마차는 보이지 않았는데?”
“서신이 먼저 도착했어요. 곧 짐을 가지러 오신다고. 하지만 짐 때문에 오시는 건 아닌 것 같았습니다…….”
마야는 급한 발걸음 속에서 잠시 고민하더니 슬픈 목소리로 답을 이었다.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아가씨께 인사를 드리려 찾아오신 것 같아요. 곧 결혼식인데 시위대와의 대치 상황이 길어진다면 아무래도…….”
“결혼식이 미뤄질 수도 있으니까?”
정답인지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확실히 결혼식 전에 돌아오는 건 힘들 수도 있겠네.’
마야가 무얼 걱정하고서 저리 뜸을 들였는지 알 것 같았다.
‘세기의 사랑이 시작부터 삐걱거린다며 뒷소문이 따라다닐 수도 있으니까.’
아마도 수군거리는 소문에 상처받을 에블린을 걱정하는 마음을 알기에 씁쓸히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이 로비에 들어서자 체이서가 곧바로 에블린을 발견했다.
“아, 마침 도착했군.”
그는 집사에게 무언가를 명하고 있다 말고 에블린을 향해 반갑게 다가왔다.
걱정되는 에블린과 달리 퍽 속 편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안 그래도 부르려고 했는데.”
다급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타고 내려가니 체이서가 다가와 성큼 올라와 에블린의 손을 붙들었다.
“넘어지니 조심해야지.”
“다시 말하지만 저는…….”
“어린애가 아니니 넘어지지 않는다고? 알아. 설마 내가 어린애를 부인으로 맞이하려고 했겠어?”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조차 농담을 내뱉는 걸 보니 체이서는 조금도 긴장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녀장에게 들었겠지만, 급한 상황이라서 말이야. 결혼식 전에 저택을 비우지 않으려고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네.”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요.”
“걱정되나?”
“당연한 소리를!”
에블린은 불안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그래, 게임에도 이런 내용이 있었던 것 같아.’
동부 에셋 영지에서 열리는 폭력 시위는 게임의 메인 스토리 중 하나였다.
플레이어는 시위를 막기 위해 공략 캐들과 함께 에셋 영지로 떠나게 되며 여행길에서 호감도를 올리는 작은 이벤트들이 발생하는 꽤나 인기 있던 스토리였던 것 같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공략 캐들이 다치는 상황이 발생하였기에 걱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내가 조금만 더 게임을 열심히 했더라면 도움을 줄 수 있었을 텐데.’
이럴 때는 게임을 열심히 하지 않은 게 얼마나 억울한지 모른다.
“어떻게 이렇게 태연할 수가 있어요? 당신은 긴장도 안 돼요?”
오히려 체이서가 긴장했다면 이렇게까지 울컥하고 감정이 오르진 않았을 것이다.
에블린의 울먹이는 얼굴에 체이서는 조금 놀란듯하다가도 이내 웃고 말았다.
“몇 번이고 말했지만, 에블린. 너는 루이사가 얼마나 강한지 잘 모르는 것 같아.”
“누구보다 잘 알거든요!”
에블린이 눈물기 젖은 목소리를 높이자 체이서가 무언가를 참듯 입가를 매만지더니 이내 그녀의 눈가를 부드럽게 훔쳤다.
“나는 괜찮으니 도망치지 말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당신은 이런 상황에서 농담이 나와요?”
“농담으로 보였나?”
체이서가 눈가를 매만지던 손을 움직여 천천히 아래로 내려트리더니 입가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에블린, 나는 농담 따위 하지 않는 이라고 하지 않았나.”
“……다쳐서 돌아오지나 마요.”
“알겠어. 무사히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말고 결혼식 준비하며 기다리고 있어. 꼭 결혼식 전에는 돌아올 테니.”
체이서는 다정히 말해 주고서는 에블린의 여린 어깨를 품에 끌어안았다.
“약속이에요. 다치지 말고, 결혼식 전에 무사히 돌아오기.”
“아무렴.”
헤어짐을 앞둔 연인의 애틋한 모습에 지켜보는 이들은 모두 안타까움을 숨기지 못했다.
계단 위에 서서 한참이나 서로를 껴안고 있던 둘은 슬슬 출발해야 한다는 보좌관의 목소리에 떨어질 수 있었다.
“참, 에블린.”
문을 나서기 직전.
체이서가 갑자기 등을 돌려 에블린을 불렀다.
“이걸 말해 주는 걸 깜빡한 것 같아서. 저택을 둘러보는 건 좋지만 말이야.”
그리고는 에블린만 들을 수 있도록 그녀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절대로 별관 지하에는 가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