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자, 끝났네요.”
대화를 하다 보니 채혈도 금방 끝이 났다.
“아무래도 이렇게 피를 자주 뽑는 게 번거로우시죠?”
“아니에요. 그때도 말했다시피 제가 전염병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언제든지 환영이에요.”
진심이 담긴 말에 하소는 그때와 같이 좋은 사람을 보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마음씨가 참 고우시네요. 누구와는 달리.”
“누구라면……?”
설마 체이서를 말하는 걸까.
에블린의 반짝이는 시선에 하소가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저희 단장님께서는 언제나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시는 분이셔서요. 체력 훈련과 능력의 전문 훈련, 정기적인 순찰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기사단 토의 등 참여하는 일이 많으시죠. 그렇다 보니 아무래도 강한 모습만 보이셔서…….”
역시 체이서를 말하는 거였다.
“그랬군요. 체이서는 통 자기가 하는 일을 알려 주려고 하지 않아서요. 이렇게 많은 일을 하는 줄 알았더라면 조금 더 신경 쓸 걸 그랬나 봐요.”
얼굴을 못 봐서 아쉽다고 했던 에블린은 누구와 다르게 너무도 철이 없었다.
깊은 깨달음에 한숨을 토해 내니 하소가 재빨리 위로를 던졌다.
“영애께서 단장님 옆에 있어 주시는 것만으로도 크게 힘이 나실 겁니다.”
“그리 말해 줘서 고마워요.”
에블린의 미소에 하소가 안타까운 표정을 숨기고는 힘이 될 만한 소식은 전해 주었다.
“정말입니다. 영애께서 이리 고생하는 걸 더 보고 싶지 않으시다며 채혈한 피를 보관할 방법을 알아봐 주신다고 하셨거든요. 혈액 손상 없이 저장이 잘 되는 것이 확인되면 이리 자주 채혈하실 일 없으실 겁니다.”
“체이서가 그랬다고요?”
처음 듣는 소식에 에블린이 우울한 감정을 지우고서는 순수하게 놀란 얼굴이 되었다.
“예. 바쁘신 와중에도 항상 연구실에 들러서 연구 진행 결과도 보고 가세요. 영애께서 함께하는 실험인 만큼 더 주의 깊게 보는 게 아닐까요?”
“전 정말 괜찮은데…….”
괜찮다고 말하는 것치고 에블린은 씰룩거리는 입꼬리가 한껏 위로 치솟지 않게 하려면 입에 힘을 주었다.
“방해하면 안 되니 이만 일어나 볼게요.”
“단장님이 오시길 기다리지 않으시고요?”
“체이서도 찾을 겸 기사단 건물도 구경해 보고 싶어서요.”
“혹 그럴 리는 없지만 거칠게 대하는 이가 있으면 곧바로 신분을 밝히시고, 단장님을 불러 달라고 하셔야 합니다.”
친절한 조언에 에블린이 흔쾌히 그러겠노라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는 제가 저택에 찾아가겠습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영애.”
깍듯한 인사를 받으며 하소의 연구실을 빠져나온 에블린은 텅 빈 복도를 보며 그제야 입꼬리를 끌어 올려 빙긋 웃을 수 있었다.
‘진짜 괜찮은데 체이서도 참.’
아무리 제 몸이 약하다고 해도 채혈을 주기적으로 한다고 쓰러질 일도 없을 텐데.
‘내가 많이 믿음직하지 못했나?’
뒤에서 이렇게 배려해 주려 했던 것을 다른 이의 입을 통해 들으니 이 또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에블린은 자신이 계속해서 웃는 것도 모른 채 한껏 상기된 기분을 품고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기사단 건물은 황후궁 같은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은 없었지만 중후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깔끔한 건물이었다.
조금 걷고 나니 마침 건너편 복도에 체이서가 자신과 비슷한 단복을 입은 누군가와 진지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역시 일 때문에 바빴나 보네.’
에블린은 체이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이해하며 그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어찌나 대화에 열중하고 있는지 에블린이 접근하고 있음에도 두 사람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들키지 않게 살금살금 발걸음을 옮기는데 어느 정도 가까이 다가가니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 발생한 지점에 피해자 수는 어떻게 되지?”
“빈민가의 바스트로 17번 거리에 의심자 두 명이 발생하였고, 마물로 변함과 동시에 일가족을 살해. 총 피해자는 마물을 제외하고 여덟 명입니다.”
“피해자가 모두 가족이었나?”
“사망자는 일가족 세 명이고 나머지 다섯 명은 중경상을 입었으며, 감염자의 이웃이라고 합니다. 감염자의 가족들은 발견 당시 사망한 것을 확인하였으며, 다행히 이웃들은 감염되기 전 상태로 기사단에 의해 전원 구조되었습니다.”
생각보다 더 심각한 이야기에 에블린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사상자들에 대한 의료비 지원, 주거 지원, 심리 치료비 지원과 함께 부상자들 감염 여부 확인 후 입막음 확실히 하도록 해. 더 이상 수도가 혼란스러워져서는 안 된다. 알아들었나?”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보고할 사항이 있나?”
“최근 수도를 제외한 다른 지역 곳곳에서도 전염병 환자가 속출한다는 급보가 날아왔습니다. 주로 높은 산, 혹은 깊은 숲 등 외딴 장소에서 나타났으며 현재는 모두 사살되었다고 합니다.”
체이서는 깊게 팬 미간을 꾹 누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블린은 그런 그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슬며시 몸을 돌렸다.
‘정신없어 보이니 방해하지 말아야지.’
황궁을 구경할 생각에 신이 났던 과거의 철이 없던 에블린은 현실을 깨달았다.
에블린은 그녀가 오가던 복도에서 벤치를 발견하여 그곳에 잠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다 보니 무어라 말하는지 자세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두 사람의 표정은 심각해 보였다.
아니, 심각하다 못해 새로운 이가 나타나 또 무언가를 건의하기 시작했다.
‘정말 열심히구나.’
더는 피해자가 나오지 않기 위해 노력하려는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나도 무언가를 도와주고 싶은데…….’
에블린은 괜히 손가락을 매만지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렇게 기분이 좋지 않으면 체이서가 옆에 앉아 손을 잡아 주며 기분을 풀어 주던 것이 버릇이라도 되었는지 손이 허전하게 느껴졌다.
‘분명 우리는 계약관계이니 더 신경 쓰지 말고 할 일만 하면 될 텐데. 나는 왜 그게 쉽지 않을까.’
오지랖인지 아니면 그저 선한 마음으로 도움을 주고 싶은 건지.
‘함께 치료제를 만들기로 했지만, 실질적으로 피를 주는 것 외에는 하는 게 없어서 이런가.’
에블린은 수도에 올라온 뒤로 계속해서 제가 보잘것없다는 생각에 침울해졌다.
아무도 없는 복도에 앉아서 기다리는 것밖에 하지 못하니 그냥 그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이런 자조적인 생각을 하며 또 한숨을 푸욱 내쉬는데 에블린의 위로 길게 그림자가 졌다.
‘벌써 대화가 끝이 났나?’
에블린은 체이서가 도착했음을 예상하며 고개를 들었지만, 그녀의 앞에는 체이서가 아닌 다른 이가 서 있었다.
강렬한 붉은 머리가 탐스럽게 굽실거렸고, 머리와 대조되는 푸른 눈동자에 흥미가 가득 담겨 반짝이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다 뵙네요. 반가워요, 바이아르도 영애.”
복도를 지나가던 그녀는 대뜸 에블린에게 아는 척을 하며 인사를 했다.
처음 보는 이가 자신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 저도 모르게 맹하니 물어 버리고 말았다.
“저를 아시나요?”
“뵌 적은 없지만.”
화려한 여인, 라리사 밀리오는 에블린을 보며 머리칼만큼 붉은 입술을 부드럽게 끌어 올리며 말했다.
“올해의 에트레가 바이아르도 영애라는 건 알고 있죠.”
에블린의 시선이 곧바로 제 가슴팍에 달린 코사지로 향했다.
‘고작 코사지만 보고 내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고?’
올해의 에트레로 선정된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건만 알아보는 이가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었다.
“반가워요, 작년 에트레의 칭호를 받은 라리사 밀리오라고 해요.”
‘밀리오 후작 영애?’
낯익은 이름에 에블린이 눈을 도로로 굴렸다.
‘아, 초대장에서 보았던 이름이구나.’
현 사교계에서 제일 유명한 미혼 여성이라며 마야가 언젠가 한 번쯤 그녀가 여는 티파티에 참석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조언해 준 것이 떠올랐다.
라리사 밀리오, 밀리오 후작가의 장녀로 황실을 제외하고 보았을 때 레이디 중 가장 높은 권력에 있는 사람이 기사단에는 무슨 일인 걸까.
기사 단복도 아닌 드레스를 입고 있었기에 더더욱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에블린은 궁금증을 접고 마주 보며 인사를 했다.
“반가워요, 밀리오 영애. 에블린 바이아르도라고 해요. 단번에 절 알아보셔서 조금 놀랐지 뭐예요.”
라리사의 분홍빛 눈동자가 에블린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눈꼬리를 살포시 접으며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태양을 녹아내린 것 같은 금빛 머리칼에 여름을 떠올리는 맑은 연녹빛 눈을 가진 아름다운 분이라는 소문을 들었었거든요. 소문 덕분에 알아볼 수 있었지요.”
그녀는 뭐가 즐거운지 계속 미소를 지으면서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솔직히 처음에는 소문이 과장되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전혀 아니었네요. 오히려 소문보다 더 아름다우셔요.”
부끄러움이 넘칠 것 같은 칭찬에 에블린이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자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끊기며 어색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래서 왜 말을 건 거지? 초대장을 거절하니 직접 얼굴 보고 초대를 하려는 걸까?’
차라리 본론을 이야기하고 빨리 떠나 줬으면 좋겠는데 라리사는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죄송해요, 대뜸 인사를 드려 당황스러우셨죠. 저도 모르게 반가움을 이기지 못하고 격식도 차리지 못하고 먼저 인사를 드렸어요.”
반복되는 대화에 에블린이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반가웠다는 건지 말을 해 주면 대화를 마무리하고 좋을 텐데. 곧 체이서도 올 것 같은데…….’
체이서가 기다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대충 대화를 마무리할까 싶은 찰나.
“사실 제 아버지께서는 루이사 공작가와 결혼 동맹을 맺기를 원하셨었거든요.”
충격적인 말에 에블린의 눈이 크게 떠졌다.
“실제로 두 분의 결혼 발표가 있기 전까지는 서신이 오가기도 했고요.”
갑작스러운 인사에 버금갈 만큼 더 당황스러운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그래, 대귀족이니 다른 집안들과 혼담이 오갔을 것 정도는 예상했었지만…….’
설마 이렇게 곧바로 만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라리사는 우아한 손짓으로 입가를 가리고서는 눈가를 곱게 휘며 웃었다.
“두 분이 첫눈에 반하여 결혼까지 가지 않았더라면 소공작 님의 옆에 있는 건 제가 될 수도 있었겠죠?”
순간적으로 체이서의 옆에 라리사가 서 있을 장면을 상상하니 이상하게 짜증이 불쑥 치솟아 오르는 것 같았다.
그런 에블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라리사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귀족 사회에서 서로의 마음이 맞아 결혼하는 게 흔치 않은데.”
어째서 저 말이 그 자리는 자신의 것이었다며 탓하는 것 같이 들리는 건지 자꾸만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정말이지 두 분은 참 낭만적이에요.”
‘설마 이런 대화를 하려고 말을 건 건가?’
아무리 예의가 없다지만 이건 아니지 않나.
이유가 있다고 한들 결혼식을 앞둔 이에게 이런 발언을 하는 건 에블린의 상식에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라리사에게 한 마디 쏘아붙이려던 에블린은 얼떨떨한 얼굴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부채 아래에 가려져 있던 그녀의 입가가 너무나도 기분 좋다는 듯이 곱게 휘어져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