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56)화 (56/159)

 56화

“내 모든 영애들과 대화를 마쳐 본 바, 올해 에트레는 에블린 바이아르도 영애일세.”

모두가 예상했다는 듯 손뼉을 치며 축하해 주기 시작했다.

오직 에블린만 당황할 뿐.

“네?”

당황하며 멍청한 표정으로 서 있는 에블린을 보며 황후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대는 벌써 잔잔한 바닷가를 지나 거친 폭풍우 속으로 뛰어들지 않았나. 다른 이들보다 훌쩍 앞서가고 있으니 당연히 올해의 에트레가 되어야지.”

“제, 제가요?”

멍청한 질문을 했음에도 황후는 인자하게 말을 건네며 거부를 용납지 않았다.

“결혼을 앞두고 있으니 남들보다 앞서고 있는 게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에블린이 빠르게 주위를 훑어보다 체이서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괜찮다는 듯 어서 받으라며 눈짓하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는 사이 황후가 직접 에블린의 가슴에는 봄꽃 코사지를 달아 주었다.

아주 흐뭇해 보이는 얼굴로 그녀는 마지막 인사를 모두에게 전했다.

“그럼 오늘의 일정은 그만 끝마치도록 하지. 이곳은 영애들을 위해 마련된 곳이니 얼마든지 쉬다가 편히 돌아가게.”

황후가 떠날 채비를 하고 온실을 나서자 영애들은 동시에 치맛자락을 붙잡고서 허리를 숙였다.

황후는 그들의 인사를 받고는 흡족한 얼굴로 체이서와 에블린을 향해 미소를 지어 준 뒤 온실을 나섰다.

“우리도 이만 가 볼까?”

체이서가 부드러운 손길로 에블린을 제 곁으로 끌고 왔다.

그녀 또한 익숙하게 그의 팔에 팔짱을 꼈고, 나갈 채비를 마치자 주변의 영애들은 다음에 또 보자며 인사를 하였다.

“이리 나가도 되나요?”

“황후 다음으로 높은 이가 나니까 나가 줘야 그들도 편할 거야.”

슬쩍 뒤를 돌아보니 모여 있는 영애들이 입을 막고 흥분된 얼굴로 대화를 나누는 게 보였다.

‘욕먹을 짓은 아닌가 보네.’

다행히도 인상을 찌푸리는 이가 없었기에 에블린 또한 맘 편히 밖으로 나올 수가 있었다.

황후궁에서 나오니 앞에는 그녀가 타고 왔던 마차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체이서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 위에 오른 에블린이 둘만 남게 되자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정말 여기까지 어쩐 일이에요?”

“갑자기 쓰러지기라도 하면 결혼식에 차질이 생길 테니까.”

“걱정되었다는 뜻이죠?”

체이서는 답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저택에서 가만히 결혼식 날짜만 기다리는 건 지루했지? 이왕 황성에 왔으니 이 주변도 둘러보고 들어갈까?”

에블린은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것에 기뻐 활짝 웃었다.

“그래도 되나요?”

“나와 함께니 문제없지.”

“체이서와 함께면 모든 다 가능한 것 같네요. 수도에 이어서 황성 구경이라니. 조금 설레요.”

에블린이 화색하며 눈에 띄게 좋아하자 체이서 또한 마주 보며 미소를 지어 주었다.

“일정이 촉박해 준비도 힘들었을 텐데. 피곤하지 않나?”

“무리하지 않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그리고 저보다는 당신이 더 걱정된다고요.”

에블린은 창백한 체이서의 뺨을 매만지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이제 이 정도의 가벼운 스킨쉽은 서로에게 자연스러워졌는지 그가 익숙하게 에블린의 손에 뺨을 살짝 기울이며 기대었다.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자잖아요.”

처음 함께 잠들었을 때를 제외하고 항상 체이서가 일하는 걸 보면서 잠들었기에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혼식 올리고 나면 공작위를 계승해야 하잖나.”

현 루이사 공작이 의식불명이니 이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라며 가신들 모두 동의한 내용이라 크게 신경 쓸 것 없다는 말이 이어졌다.

‘트렐로니 백작 건이 있으니 다들 몸을 사리려나.’

“그럼 슬슬 그 일이 시작되겠네요.”

루이사 시험에 참여시킬 아이들을 선별하는 작업이 시작되고, 또 일정 시간이 지나면 시험이 시작될 것을 실감하니 속이 좋지 않았다.

‘트렐로니 백작이 없는데 그 일은 누가 위임받아서 하게 될까. 다른 가신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주려나.’

에블린의 안색이 어두워지며 손을 거두려고 하자 체이서가 냉큼 그녀의 손을 잡고 자연스럽게 옆자리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당장은 시작하지 않으니 그런 표정 말아.”

“……이 악습을 끊을 방법은 정녕 없는 걸까요?”

우울한 목소리에 체이서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흐음. 있긴 있지.”

생각지 못한 답변이었다.

에블린이 놀란 눈빛으로 체이서를 바라보았고, 그 또한 그녀의 시선을 마주 보며 아쉬운 답을 해 주어야만 했다.

“그런데 너는 별로 달갑지 않아 할 거야.”

“어떤 일인지 알려 주지도 않고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돕고 싶단 말이에요.”

“할 수 있다면 할 수 있겠지만.”

애매모호한 답에 에블린이 애간장이 타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혼자만 알지 말고요!”

“그래, 그래. 알겠어.”

체이서는 진정하라는 듯 에블린의 손을 잡고서 그대로 무릎 아래로 끌어 내리고는 마치 벗어나지 못하게 옭아매려는 듯 감싸 쥐었다.

에블린은 긴장되는 얼굴로 체이서의 답을 기다렸다.

더 이상 많은 이들에게 최악의 상황을 안겨다 주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뜬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체이서는 짧고 간결하게 그녀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었다.

“너와 내가 후사를 보면 해결돼.”

아주 말도 안 되는 방안을 제시하면서.

“……네?”

에블린은 눈을 깜빡였다.

혹시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짓궂은 농담을 던지는 건 아닐까.

거칠게 떨리는 두 눈동자를 주체하지 못한 채 한껏 당황한 것을 뽐내니 체이서는 보다가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큭.”

웃음을 참는 소리에 에블린은 그제야 체이서가 자신을 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체이서!”

얼굴이 붉어진 채로 버럭 소리를 높이는 것에 그가 참지 못하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소리 내 웃는 모습이 어찌나 얄미운지 에블린은 눈을 매섭게 뜨며 그를 노려보았다.

물론 큰 타격은 없었으며, 체이서는 양껏 웃은 뒤에 목을 가다듬으며 점잖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농담, 큽. 농담이지.”

“웃음부터 멈추고 이야기하실래요?”

불만이 가득 어린 시선에도 체이서는 겨우 평온을 유지한 듯 평소의 여유로운 모습으로 그녀를 대했다.

“틀린 말이 아니긴 해.”

“또 놀리시려고요?”

“들어 봐. 만약 너와 내가 결혼하고 후사를 보았는데 그 아이가 세기의 천재야. 그렇다면 굳이 시험을 치를 이유가 있을까?”

장난기가 빠진 어조에 에블린은 덩달아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가신들도 굳이 귀찮은 일을 하기 싫어질 테니 일을 크게 벌이지 않으려고 하겠지. 천재 후계자라는 명분이 있으면 내가 나서도 될 테고.”

“……정말 틀린 말은 아니네요.”

확실히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끔찍한 과거를 안겨 주었던 시험이 사라지는 첫 번째 단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에블린은 그리 생각하다가 픽 웃어 버렸다.

“뭐 그럴 일은 없겠지만요. 우리 사이에 아이가 생길 리가 없잖아요?”

서로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계약에 의한 결혼이니 두 사람 모두 몸을 섞을 생각도 없기에 상상에서나 가능한 방안이었다.

그리 생각하며 환히 웃는데 체이서가 그 미소를 보며 갑자기 짜증이 난 눈빛으로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휙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렇지. 그럴 리가 없지. 다른 방법을 찾지 않는다면 불가능할 테니 어디 한번 머리를 열심히 굴려 보든가.”

조금 전까지는 장난을 치며 크게 웃더니 이제는 꼭 빈정 상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모습에 에블린이 고개를 갸웃하고 기울였다.

‘갑자기 왜 저러지?’

“생각해 보니 하소 경이 그대를 찾았던 게 기억나네. 기사단에 잠깐 들렀다 가지.”

체이서는 에블린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을 하며 침묵을 유지했다.

‘도대체 뭐지?’

영문 모를 분위기 속에서 마차는 목적지를 향해 달릴 뿐이었다.

기사단에 도착하자마자 체이서는 에블린을 외딴 방에 데려다주고는 휙 나가 버렸다.

갑자기 문이 열리자 깜짝 놀란 하소 경이 어깨를 파드득 떨었다. 하소는 체이서가 에블린을 두고서 떠나는 모습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이게 무슨…….  단장님은 어디 가신답니까?”

“급한 일이 있나 봐요.”

에블린은 뒤도 보지 않고 사라지는 체이서의 등을 아쉬운 눈으로 좇다가 하소의 부름에 고개를 돌려 버렸다.

“하긴. 단장님은 언제나 바쁘시지요. 그런데 이상하네요.” 

“뭐가 이상한가요?”

하소는 자연스럽게 체이서를 뒤로 미루고는 에블린을 안으로 들였다.

작은 연구실로 보이는 방에는 그녀가 앉아 있던 의자와 두 명이 앉을 수 있는 소파 하나가 놓여 있었다.

“영애께서 황성에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온 김에 채혈하면 좋지 않겠냐고 했다가 된통 깨졌거든요. 그래 놓고 이곳으로 모셔 온 게 어이가 없어서요. 아, 죄송합니다. 그래도 부군이 되실 분인데 너무 편히 대했지요.”

시정하겠다는 듯 금방이라도 땅에 머리를 밖을 기세에 에블린이 고개를 내저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보다는 제 앞에서 하는 게 그래도 기분이 덜 나쁠 것 같네요. 그리고 가끔 상사 욕도 하며 스트레스를 풀어야죠.”

“역시 뭘 좀 아십니다.”

하소는 굽혔던 허리를 펴고서는 테이블 위에 대충 널브러져 있는 잡동사니를 치웠다.

‘청소도 하지 못할 정도로 바쁜가 봐.’

확실히 그녀의 책상 앞에는 여러 플라스크와 긴 시험관이 잔뜩 놓여 있었다.

갖가지 실험 도구들에는 여러 액체가 담겨 있었는데 그 옆에는 연구 결과가 잔뜩 쓰여 있는 구겨진 종이들도 몇 보였다.

‘하소 경이 이 정도 바쁜 거면 상사인 체이서는 더 바쁘겠지.’

조금 전 모임에서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한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던 것이 조금 부끄러워졌다.

“요새 수도에 마물이 나타나지는 않지 않다 들었는데. 여전히 바쁘신가요?”

에블린은 급히 빠져나간 체이서가 신경이 쓰였고, 참지 못해 열심히 청소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게 다 인력을 갈아 넣어서 가능한 일이랍니다.”

하소 경이 드디어 간단한 청소를 끝내고 건너편 자리에 앉으라 손을 뻗었다.

“전염병의 기미가 보이는 이들은 일단 무조건 체포하여 격리 후 경과를 지켜보고 있거든요.”

여전히 뭐가 가득 놓인 테이블과 달리 깔끔한 소파에 앉으니 그녀가 새로운 소식들을 전해 주기 시작했다.

“경과를 지켜볼 수가 있나요? 분명 빠른 시간 내에 감염되어 몸이 변한다 알고 있는데요.”

“저희도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요. 변이가 발생한 모양입니다. 짧게는 한 시간, 길게는 하루가 지나고서 변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더군요.”

“……그런 기사는 본 적이 없었는데.”

하소는 자연스럽게 에블린의 팔에 주사를 꽂으며 씁쓸히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황실에서는 수도가 안전하다는 이미지를 유지하고 싶으니까요. 일단 빈민가에서만 발생한 일이기도 했고요.”

“그렇군요.”

병의 확산세가 줄어들었나 싶었는데 물밑에서는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래도 영애께서 이렇게 피도 제공해 주시니 금방 치료제가 개발될 겁니다. 너무 심려치 마세요.”

하소의 다정한 위로에 에블린은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