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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55)화 (55/159)

 55화

에블린은 수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소공작님께서 임무를 위해 숲을 떠도시다 우연히 만나 서로 첫눈에 반했지요. 처음에는 루이사 소공작님인 걸 모르고 친분을 쌓게 되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네요.”

어느덧 모든 영애가 에블린의 이야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소문이 돌지 않도록 에블린을 최선을 다해 환히 웃어 보였다.

이런 질문이 나올 걸 예상했기에 생각보다 거짓말이 술술 튀어나왔다.

“서로 대화가 통해 친구가 되었는데 시간이 흘러 보니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어느새 결혼을 앞에 두게 되었네요. 제가 몸이 약한지라 친구 하나 제대로 두지 못하였는데 앞으로 평생 함께할 사람이 생겨서 정말 기쁘답니다.”

누군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함이 가득한 얼굴에 황후가 짧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결혼 적령기가 되었는데도 소공작이 결혼 생각 없어 보이던 이유가 영애를 만나기 위해서였나 보아.”

‘조금 양심에 찔리는걸.’

제 가족의 일인 양 진심으로 기뻐하는 황후의 모습에 양심이 콕콕 찔렸다.

황후는 에블린의 두 손을 곱게 붙잡고서는 대견하다는 듯 쓸어내렸다.

“그간 얼마나 외로웠을까. 앞으로는 행복한 일만 가득할걸세.”

“감사합니다, 폐하.”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황후와의 대화가 끝낸 그녀의 시선이 왼쪽으로 향했다.

황후가 왼쪽에 앉아 있는 영애와 이야기하는 것을 본 에블린이 그제야 마른 입을 축였다.

자신은 대화를 마쳤으니 다음 타자를 위하여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줄 시간이었다.

‘나도 온실이나 구경해 볼까.’

궁 밖의 정원도 아름다웠는데 이렇게 본격적으로 관리가 되는 온실은 또 얼마나 아름다울지 절로 기대가 되었다.

배정된 시녀도 멀리서 지켜보기에 부담 없이 천천히 정원을 둘러보고 있자니 옆에서 생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바이아르도 영애. 네하라 세랑드라고 합니다.”

황후의 왼편에 앉아 에블린 다음으로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던 동그란 눈이 매력인 영애였다.

“반갑습니다, 세랑드 영애. 에블린 바이아르도라고 합니다. 성인이 됨을 축하드려요.”

‘생각보다 대화가 빨리 끝났네. 하긴 이제 막 성인이 되었을 테니 황후와는 관심사도 다를 테니 어쩔 수 없으려나.’

생각보다 성인식이 빨리 끝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함께 성인식을 치르게 되어 기쁘네요.”

세랑드 영애 뒤로 대화를 끝낸 영애들이 에블린에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느덧 무리의 중심에 서게 된 에블린은 당황스러움을 삼키며 자연스럽게 그들과의 대화에 동참했다.

대화는 별것 없었다.

이제 막 성인이 되었음을 기뻐하고, 최근 관심이 있는 취미 생활에 대해 대화를 나누어 보고, 약혼자가 있는 이들은 언제쯤 결혼하게 될 것 같다는 평범한 사교계의 이야기였다.

“이렇게 동갑인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니 너무 좋네요. 이후로도 함께 만나서 담소를 나눌 시간이 있으면 좋을 텐데.”

“티파티를 열어서 서로 초대하면 되지요. 근황도 이야기 나누고 얼마나 재미있을까요.”

가만히 대화를 나누던 이들의 시선이 슬금슬금 에블린에게 닿았다.

“그것도 너무 좋겠네요.”

기대에 부응하듯 마주 웃어 준 그녀는 다정한 어조로 자연스럽게 다음을 기약했다.

“안 그래도 곧 티파티를 열까 고민했었는데 영애들이 참석해 준다면 너무 기쁠 것 같아요.”

“어머, 저희는 초대해 주시면 너무 기쁘죠.”

영애들이 손뼉을 치며 티파티 소식에 반가워하는 모습은 분명 진심일 것이다.

루이사 공작가에는 공작 부인도 없고, 공녀가 없다 보니 오랜 시간 동안 공작저에서 티파티가 열린 적이 없어 그녀들에게 더욱 반가운 소식이었을 것이다.

‘체이서뿐만 아니라 두 공자가 더 있으니 눈을 빛낼 수밖에 없겠구나’

여러 명이 모여 있음에도 분위기는 부드럽게만 흘러갔다.

어쨌든 이 정도면 급하게 잡힌 일정치고 순방한 것은 아닐까.

에블린이 그리 생각하며 주변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는데 중간에 합류한 남작가의 한 영애가 긴장감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영애, 곧 결혼식인데 떨리지 않으세요?”

모두가 궁금했던 소식인지 다 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고서 시선을 에블린에게 고정하였다.

“아무래도 많이 떨리죠. 그만큼 기다려지고요.”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이라니 너무나도 로맨틱해요. 결혼 전부터 같은 저택에 사시니 매일 보고 너무 좋겠어요.”

자작가의 한 영애가 두 손을 맞대고서는 상상만 해도 행복하다며 볼을 붉혔다.

“아쉽게도 소공작님께서는 많이 바쁜 분이셔서요. 기대하는 것만큼 자주 볼 수가 없답니다.”

“아앗, 정말요? 너무 서운하시겠어요.”

“하긴, 아무래도 그 흉측한 병 때문에 더욱 바빠지셨잖아요. 정말이지 제가 다 속상하네요.”

이제 갓 성인이 된 이들은 표정을 시무룩이 굳히며 다들 제 일인 것처럼 아쉬워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에블린이 저도 모르게 웃고 있는데 제일 먼저 말을 걸어온 세랑드 백작가의 영애가 이 분위기를 순식간에 뒤엎어 버렸다.

“그래도 같이 방을 쓸 테니 매일 볼 수 있지 않나요?”

“예?”

‘뭐야? 어떻게 알았지? 합방한 지는 사흘밖에 안 됐는데. 설마 세작이 심겨 있는 걸까? 아니면 새로운 소문이 돌았나?’

에블린이 깜짝 놀라 굳자 세랑드 영애의 옆에 있던 이가 입가를 가리며 짓궂게 웃었다.

“아이참, 영애. 요새 사교계의 유행이 결혼식도 올리기 전에 합방하는 거라지만 설마 소공작님께서 그걸 허락하셨겠어요?”

“그렇죠? 농담 한번 해 봤어요. 소공작님께서 그러실 리가요.”

장난이었다며 이어진 세랑드 영애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에블린이 부정하지 못하고 부끄러움에 휩싸이자 농담에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던 모두가 어색히 입을 다물었다.

“어머, 정말로 함께…….”

세랑드 영애가 말실수했다는 얼굴로 제 입을 가리는 것이 더더욱 민망하였다.

다른 영애들은 들뜬 얼굴로 꺄르르 웃음소리를 내며 설레하였지만.

“역시 소공작께서도 사랑하는 여인이 생기시니 많이 변하시네요. 굉장히 보수적인 분으로 알고 있었는데 말이죠.”

“어머, 영애! 요새 약혼을 치른 연인들이 결혼 전에 같이 살면서 침실을 공유하는 건 흠도 아니고 오히려 반기는 분위기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너무 남사스럽지 않나요?”

“뭐 어떤가요? 어차피 결혼하면 앞으로 평생을 같은 침실을 쓸 텐데요.”

남의 침대 사정이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에블린이 한마디도 못 하고 있음에도 대화는 꾸준히 이어졌다.

“그러다 파혼을 하게 되면 그건 그거대로 망신이지 않겠어요?”

누군가의 걱정스러운 말에 어느덧 회복한 세랑드 영애가 코웃음을 쳤다.

“그만큼 확신이 있다는 걸 보여 주는 의미가 있는 거죠. 누가 약혼할 때 파혼할 걸 염두에 두고 하나요? 결혼을 약조하며 약혼하는 거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조금 부끄러울 것 같아요. 아직 부부가 아닌데 그래도 되는 건지…….”

이러다가는 에블린과 체이서의 합방이 대화의 주제로 한참이고 이어질 것 같았다.

‘엄숙한 귀족 사회에서 저잣거리에서나 할 법한 일들이 유행이라니!’

에블린은 대화 주제를 돌리기 위해 침착히 입을 열었다.

“제가 몸이 약하다 보니 홀로 보낼 밤이 걱정되셨나 봐요. 함께 방을 쓰고 있지만 바쁘셔서 자주 보지도 못한답니다.”

욕망에 눈이 멀어서가 아닌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는 말에 얼추 시끌벅적했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래도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아침을 맞이할 수 있다니 너무 로맨틱하네요.”

“조금이라도 얼굴을 볼 시간이 늘어 기쁘긴 하지요.”

마지막 말은 진심이었다.

‘확실히 가까이 있는 시간이 길어지니 몸이 더 빨리 회복한 것 같기도 하고.’

비록 함께 손을 잡고 산책한다거나, 그의 품에 가만히 안긴다든가 하는 가벼운 스킨쉽은 하지 않았지만 같은 방에서 지낸다는 것만으로도 정신적으로 치유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때, 무언가 말하기 위해 입을 열던 세랑드 영애가 갑자기 꺄악, 하며 작게 비명을 질렀다.

저들끼리 재미나게 떠들던 영애들은 세랑드 영애의 시선이 닿은 곳으로 휙 고개를 돌렸고, 곧 그녀처럼 입을 틀어막고 비명을 내었다.

이러한 소란에 어느덧 마지막 영애와 대화를 마친 황후 또한 문 쪽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이것 참, 팔불출이고만.”

웃음기 섞인 감탄사에 에블린이 천천히 몸을 틀었자 그곳에는 체이서가 서 있었다.

어떻게 이곳에 왔냐는 듯한 눈빛에 그가 가볍게 웃으며 다가왔다.

에블린이 당황한 얼굴로 올려다보았지만 그는 그녀의 어깨를 매만지면서 달래 주고는 건너편에 있는 황후에게 인사를 올렸다.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황후 폐하. 그간 건강히 잘 지내셨습니까?”

“기사단장 덕에 불안감 없이 편히 지내고 있네. 그보다 여긴 어쩐 일인가? 오늘 이곳에서 열리는 성인식은 레이디들을 위한 날인 것을, 그대가 예고도 없이 갑자기 이리 나타나면 얼마나 놀라겠어.”

예정에 없던 방문에 화가 날 만했건만 황후는 장난스레 그를 나무랐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폐하. 제 약혼녀가 몸이 좋지 않아 오랜 시간 외출이 어렵다 보니 걱정이 되어 찾아왔습니다.”

그 말에 황후가 다시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퍽 기분 좋아 보이는 미소였는데 언뜻 보기에 흐뭇해 보이기도 했다.

“그리도 바이아르도 영애가 좋아 죽겠나?”

황실과 어울리지 않는 노골적인 말투에도 체이서는 익숙한지 놀라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다.

“그럼요. 얼마나 사랑스러운 이인데요. 폐하께서도 곁에 두시다 보면 제 약혼녀의 매력을 알게 될 겁니다.”

“정말이지. 그리 어리던 공자가 이리 훌륭히 자라 어느덧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을 앞두고 있다니. 웬디가 보면 정말이지 기뻐했겠구나.”

웬디 루이사.

전대 루이사 공작 부인의 이름에 에블린은 티를 내지 못했음에도 많이 놀란 상태였다.

“황후 폐하께서 공작가를 어여삐 살펴 주셔서 이리 훌륭히 자란 것 아니겠습니까.”

아부가 담긴 말에 황후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걱정하지 말라는 건 이런 뜻이었나?’

“내 친우의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정말로 잘 자랐어. 웬디도 그리 허망하게 가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꼬.”

그녀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자기 친구를 입에 담으며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 주었다.

“축하하네, 소공작. 그리고 갑작스러웠을 텐데 내 초대에 응해 줘서 고맙네, 영애. 안 그래도 슬슬 이 행사를 끝낼 참이었는데 잘되었군.”

황후가 시녀장을 향해 손짓하자 그녀가 고급스러운 융단이 깔린 작은 상자 하나를 들고 이곳으로 다가왔다.

그 안에는 올해 처음으로 피어난 봄꽃으로 만들어진 코사지가 올려져 있었다.

어쩐지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불안한 예감은 언제나 피하지 않고 적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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