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결혼식을 2주 앞둔 시점, 이자벨라 황후가 주최하는 성인식 행사인 에트라의 봄이 열리는 날이 되었다.
마야는 기대감이 차오른 얼굴로 드레스 자락을 정돈해 주며 연신 흐뭇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사실 내심 아가씨께서 이곳에 머무시기로 결정되었을 때 이렇게 성인식 행사에 가게 되지 않을까 기대했었답니다.”
올해 갓 성인이 된 영애들이 모이는 자리이다 보니 보통 노랑, 분홍 등 봄꽃 색의 드레스를 입게 되는데 에트레의 봄을 코앞에 두고 있다 보니 화사한 색의 드레스를 구하기 위해 그녀가 마담 그랑티를 얼마나 쪼았는지 모른다.
급박한 일정이다 보니 걱정이었는데 마야는 준비과정이 너무 즐거웠다고 말하며 이번 일정에서 선택되지 못한 개나리꽃 색의 드레스를 아쉬운 눈으로 힐긋힐긋 바라보았다.
“단언컨대 에트레의 봄에 참석한 영애 중 아가씨께서 가장 아름다우실 겁니다. 올해 가장 아름다운 봄꽃이라며 모두가 아가씨를 에트레라고 칭송할 거고요.”
마야의 칭찬에 로피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리 없을 텐데.’
에트레의 봄에 참석한 영애 중 황후는 한 사람을 선정하여 그녀에게 올해의 에트레라는 칭호를 내려 주게 된다.
‘에트레’는 봄을 불러다 줄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뜻으로 보통은 행사에 참석한 이 중 가장 영향력이 높은 가문의 영애에게 주어지는 칭호이기에 ‘루이사 공작가’의 일원에게 주어지리라 생각하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하다지만…….
“그건 미혼의 여성들에게 주시는 거잖아. 나는 곧 기혼이 될 몸이니 다른 이에게 주시겠지.”
한껏 들떠 있는 둘에게 미안했지만, 에블린은 자신은 에트레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농담을 들은 것처럼 웃고 넘겼다.
보통 에트레가 된 이는 황실의 인정을 받은 여인이라 칭해지기에 그해 결혼 시장에서 가장 주목받는 영향력 높은 레이디가 되었다.
이름 대신 붙은 짧은 칭호 하나로 몸값을 높일 수 있다니 다른 지역의 영애들 또한 어떻게 해서든 수도에 와서 성인식을 치르려고 안간힘을 쓸 법하지 않은가.
‘뭐, 일단 나는 에트레가 되기 싫지만.’
세간의 관심은 지금 받는 걸로도 족했다. 앞으로는 이목을 끌지 않고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사교계 생활할 생각이니 받고 싶지 않달까.
생각에 잠긴 사이 준비가 끝마쳐졌다.
평소와 달리 반을 틀어 올린 머리에, 일자로 떨어지는 화사한 연분홍빛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정말 갓 성인이 된 숙녀다웠다.
“소가주님께서도 아가씨의 이런 아름다운 모습을 봤어야 할 텐데요.”
로피는 설렘을 뒤로한 채 한껏 아쉬움을 토해 냈다.
“체이서는 바쁜 이니 방해하면 안 되지.”
“행사가 조금만 더 이른 아침에 열렸더라면 함께 황성에도 가시고 좋았을 텐데 너무 아쉬워요.”
에블린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슬쩍 방문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있을 리가 없는데 말이지.’
이렇게 준비하고 나면 어느샌가 나타나서 아름답다고 해 주던 체이서에게 너무 익숙해진 모양이다.
‘……여기 있었으면 예쁘다고 해 줬겠지?’
에블린은 누가 제 생각을 읽기라도 할까 민망함에 슬쩍 붉어지는 볼을 애써 모른 척하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
“늦기 전에 어서 가자꾸나.”
***
납치 사건 후, 에블린의 컨디션은 날이 갈수록 빨리 회복되어 갔다.
공작저 사용인들의 과보호에 가까운 보살핌과 옆을 지켜 준 체이서 덕분이었다.
그는 정시 퇴근을 고집하여 이른 시간에 저택으로 돌아왔고, 그 덕인지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어져 에블린의 마음에도 평화가 찾아왔다.
‘합방을 쓰기 시작한 후로 조금 더 분위기가 부드러워진 것 같았지.’
바쁜 체이서는 첫 합방 이후로 함께 침대에서 잠든 적은 없지만, 그가 옆을 지켜 주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만큼 든든할 수가 없었다.
‘요새 너무 잠이 늘어난 것 같아. 내일은 일찍 일어나서 배웅도 해 줘야지.’
에블린은 체이서와 처음 외출했을 때처럼 마차 밖을 구경하는 대신 가만히 앉아서 발을 동당이며 기분 좋은 콧노래를 내었다.
즐거움이 가득해 보이는 모습에 이를 지켜보던 마야와 로피가 눈을 마주치고서는 감정을 공유받듯 함께 웃었다.
한참 흥에 잠겨 있다 보니 목적지인 황후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초대장에는 편히 정원을 둘러보고 안으로 들어오라는 말이 적혀 있던데.”
과연, 왜 그러한 말이 끝인사말에 적혀 있었는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이유를 알 수가 있었다.
마차는 황후궁 바로 앞에 내려 주었지만, 황후궁보다 더 눈에 띄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정원의 초입부에 자리를 잡은 붉게 물든 꽃송이들이 손님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아직 동백꽃이 피어 있구나.”
정원 안으로 들어서자 손님들을 환영해 주듯 한가득 피어 있는 꽃들에 꼭 한겨울의 숲에 온 것만 같이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황후 폐하의 궁은 겨울에도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설마 동백나무가 이렇게 심겨 있는 줄 몰랐네요.”
마야의 궁금증에 대한 답은 뒤에서 들려왔다.
“황후 폐하께서는 겨울 길을 산책하는 것을 좋아하셔서 폐하의 정원에는 동백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답니다.”
그들이 정원의 모습에 감탄하는 사이 황후궁의 시녀가 나와 세 사람을 반겨 주며 궁금증을 해소해 주었다.
“성인식을 맞이하는 영애들은 모두 이곳에서 아름다운 광경에 넋을 잃고는 하지요. 다 폐하께서 동백꽃의 꽃말처럼 갓 성인이 된 영애들이 진실한 사랑을 찾아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정성스럽게 가꾸셨답니다.”
“그렇군요. 과연 폐하께서는 다정하고 심려가 깊으신 분이시군요.”
에블린의 말에 시녀가 동의한다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황후궁의 시녀장인 바셸리 다르망이라고 합니다. 바이아르도 영애, 정원을 충분히 구경하셨다면 안으로 모셔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정원 구경도 간단히 마쳤겠다.
에블린은 마야와 로피를 마차로 돌려보낸 후 홀로 바셸리 시녀장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1층 오른쪽 복도 끝에는 거대한 문이 있었는데 시녀장이 문을 열자 보인 것은 커다란 유리 온실이었다.
“마지막 봄꽃이 왔구나.”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온화한 미소로 에블린을 반겨 주던 이자벨라 황후였다.
올해 성인이 된 이들은 에블린을 포함하여 총 열여섯 명으로 황후를 중심으로 긴 타원형 테이블 양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이런 자리에 온 적이 없었기에 절로 심장이 떨려왔지만 내색하지 않고서, 에블린은 두 손으로 치맛자락을 가볍게 들고는 우아하게 허리를 숙였다.
“바이아르도 가의 여식이 존귀한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반갑네, 바이아르도 영애. 내 소문으로만 듣고 어떤 이인지 참으로 궁금하였는데. 어서 이리로 오게나.”
하필이면 황후의 오른쪽 옆자리만 공석으로 남아 있었고, 그 외에는 모두 자리가 차 있었다.
권력의 위세가 강할수록 황후와 가까운 곳에 자리가 배정되기에 곧 루이사의 이름을 달 에블린은 당연하게도 그녀의 옆자리일 수밖에 없었다.
‘부담된다, 부담돼.’
에블린은 제게 쏟아지는 여러 시선에 의식하지 않고 우아한 발걸음으로 자신에게 배당된 자리에 앉았다.
“이리 곱고 아리따운 영애들의 새로운 시작을 제일 먼저 축하해 줄 수 있음이 너무도 기쁘구나.”
황후는 인자한 미소와 함께 따뜻한 눈길로 앉아 있던 모든 영애와 눈을 마주치며 축사를 이어갔다.
“모두들 진심으로 성인이 된 것을 축하한단다. 이제 다들 성인이 되었으니 제국의 자랑스러운 일원으로서 스스로에게 부끄럼 없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갈고 닦아야 하네.”
모인 영애들은 진지한 얼굴로 황후의 축사를 경청하였다.
“지금까지의 삶이 잔잔한 바다 위에 떠 있던 배와 같았다면 이제는 폭풍에 실린 배처럼 거침없이 휘몰아치는 삶이 펼쳐질걸세. 그걸 이겨 내고 나면 그대들은 아름답고 훌륭한 레이디로서 당당히 자신의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걸세.”
‘폭풍에 실린 배와 같다라…….’
평범한 조언 같았지만 얼마 전 큰일을 겪어서 그런지 황후의 말이 크게 공감이 갔다.
‘난 이미 폭풍 속에 들어와 있겠구나.’
앞으로는 이보다 더한 일들이 생길 것 같은 두려움에 마음속의 파도가 더욱 거세졌다.
‘그럼에도 이겨 내야겠지.’
훌륭한 레이디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생을 마감하였을 때 가족들을 보고 부끄럽지 않다면 후회 없는 삶을 살았노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언제나 잔잔한 파도 위에 떠 있는 삶을 살면 더더욱 좋겠지만 말이지. 늙은이의 잔소리가 길었구나.”
황후는 앞에 놓인 동백 차를 한 모금 마시고서는 저에게 집중한 영애들을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그대들의 앞날에 행복만 가득하길 바라네.”
모두가 감사의 인사를 전하면서 황후처럼 동백 차를 한 모금씩 넘겼다.
제국 내 최고 여성이 내려 준 동백 차를 나눠 마심으로써 이곳에 모인 이들은 성인이 되었음을 증명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수녀님께서 이 모습을 보았다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수녀님, 보고 계세요? 제가 어느덧 성인이라니 믿기지 않는다니까요.’
에블린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훈훈해진 분위기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곧 자연스럽게 담소를 나눌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조용하던 온실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제 개인 면담만 하면 얼추 마무리되겠구나.’
동백 차를 나눠 마신 후, 황후의 옆자리에 앉은 이들을 제외한 다른 영애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온실을 구경하게 되어 있다.
자기들끼리 소소하게 인사를 주고받는 이들과 달리 에블린은 아는 이가 없다 보니 대화할 상대가 없었다.
난감한 상황에서 그녀에게 말을 거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그녀의 왼편에 거대한 존재감을 표하는 황후였다.
이자벨라 황후는 푸른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에블린을 향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진귀한 조언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웃어른으로서 할 수 있는 말이었지. 지루하지는 않았나?”
“제 삶의 방향을 다시금 다잡을 수 있는 뜻깊은 말이었습니다.”
“칭찬이 과하구먼.”
에블린의 말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황후의 입가에는 연신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내가 바이아르도 가문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지. 반갑네, 영애.”
“에블린 바이아르도라고 합니다. 저 또한 황후 폐하를 이리 가까이 뵙게 되어 영광이랍니다.”
처음 보는 이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호감이 가득해 보이는 것이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바이아르도에 이리 아름다운 영애가 있는 걸 어찌 이제 알았을꼬.”
“어렸을 적부터 몸이 좋지 않아 영지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요양하며 지냈답니다.”
“몸이 좋지 않아? 지금은 괜찮은가?”
심각하게 굳는 황후의 얼굴과 함께 주위의 소음이 천천히 줄기 시작했다.
슬쩍 주변을 살펴보니 어린 영애들이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다 은근슬쩍 두 사람의 대화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에블린은 부끄럽다는 듯 입가를 가리고는 해사하게 웃었다.
“폐하께 심려 끼쳐 드릴 정도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황후는 간단한 인사말이 끝나자 본격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요양을 보내던 곳은 어떠했지?”
“울창한 숲속에 있는 작은 별장이었답니다. 수풀이 가득 차 있는 그곳은 공기도 좋고,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었지요. 외딴곳에 있었다 보니 가족들과 떨어져 사느라 외로웠던 것만 빼면 즐거웠던 기억이 많은 곳이랍니다.”
“그래? 그럼 그곳에서 루이사 소공작과 만난 건가?”
상기된 목소리로 변한 것을 보니 대화의 목적은 역시 체이서와의 만남에 관한 것이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