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나도 자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에블린.”
그는 다시 몸을 돌려 에블린의 동그란 이마를 부드럽게 쓸며 머리카락을 괜히 더 흩트려 놓았다.
간지러운 손길에 몸을 움츠리니 그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한껏 긴장한 예비 신부에게 걱정을 안겨 주고 싶지는 않아서.”
“……누가 긴장했다고 그래요.”
에블린은 억울함에 중얼거렸고, 그는 피식 웃으며 피곤이 묻어 있는 그녀의 눈가를 조심히 쓸어 보았다.
“이렇게 졸려 보이는데 안 자는 이유가 긴장해서가 아니면 뭔데?”
“……진짜 아닌데.”
“긴장하지 않았으면 내가 방에 들어오자마자 잠옷을 감추려 들지도 않았을 테고.”
몸의 선이 비칠 만큼 얇은 잠옷을 입은 에블린과 편한 옷을 입고 있는 체이서의 옷차림이 비교되니 부끄러운 건 당연했다.
하지만 체이서는 그런 건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에블린의 행동을 관찰하며 그녀가 당황했고, 긴장되어 잠이 오지 않는다고 추론을 끝낸 모양이었다.
억울했지만 사실이라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진짜 아닌 게 맞아?”
눈가를 매만지던 손길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더니 얼굴의 반을 감춘 이불자락을 서서히 아래로 끌어 내렸다.
윗 가슴까지 내려온 이불 아래에 감춰져 있던 얇은 잠옷이 슬며시 드러났다.
느긋한 손길은 다시 위로 올라오더니 에블린의 뺨을 감싸 매만지더니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평소와 같은 익숙한 손길임에도 느리게 움직이는 탓인지 애가 탔다.
손이 멈춘 곳은 평소보다 훤히 드러난 쇄골 위였다.
체이서가 쇄골 위를 부드럽게 쓸자 오소소 몸에 소름이 돋았다.
“에블린.”
“네, 네?”
그런 에블린을 보며 체이서는 언젠가 보았던 야살스러운 미소로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하면 어떻게 하려고 이렇게 같이 자자고 해?”
에블린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름과 동시에 그의 손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더 아래로 내려오려는 손을 다급히 잡아낸 에블린은 움직이지 못하게 그대로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허리를 세워 일어나고서는 움찔거리는 그에게 외쳤다.
“우, 움직이지 말아요!”
“왜? 같이 자자며.”
느긋한 체이서와 달리 에블린은 당황한 채로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제 할 말은 다 꺼냈다.
“그런 뜻으로 말한 것 아니에요!”
“누가 봐도 유혹하는 것 같았는데.”
“아니라니까요?”
에블린은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며 고개를 내젓자 체이서는 그 얼굴을 보며 결국 웃어 버리고 말았다.
물론 체이서가 조금만 힘을 주면 에블린 필사의 노력에도 붙잡은 손이 가볍게 튕겨 나갈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저렇게 여유롭게 웃는 것일까?
체이서가 입가를 가리고 있는 탓에 그가 웃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말하고 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에블린은 차마 답을 하지 못하고 이불 속에 감춰진 발을 동동 구를 뿐이었다.
‘그렇게까지 파렴치한은 아닌 것 같은데.’
계속 어찌할 줄 모르는 모습을 보이니 결국 체이서가 한발 물러나 다시 물어봐 주었다.
“자, 이제 내가 어떻게 할 것 같아?”
부끄러움을 버티다 못한 에블린은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에블린이 잡고 있던 체이서의 손이 서서히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아, 안 돼!”
에블린이 다급히 눈을 뜨며 그의 손을 붙잡으려고 했지만 이미 그녀의 손을 빠져나간 목표물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떻게 하지?’
짧은 순간이지만 수없이 많은 생각들이 에블린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 어떤 것들을 떠올려도 이 상황에서 어울리는 방안인지는 확신이 안 섰다.
그리고 에블린이 그런 생각을 이어 가던 순간 갑자기 옆자리가 묵직하게 가라앉더니 침대가 출렁이며 움직였다.
그제야 에블린은 눈을 떴고, 그녀의 옆에 뉘어 앉은 체이서와 눈이 마주칠 수 있었다.
어느새 조명의 불은 꺼져 은은한 주홍빛마저 사라진 방은 캄캄한 밤에 물들어 있었다.
체이서는 당황한 에블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만 놀릴 테니 이만 자자.”
에블린이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그의 팔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머리를 끌어안고서는 뒤로 눕혔다.
그리고 자신 또한 옆에 자리를 잡고 편히 목을 기대어 누워 버렸다.
에블린은 멍해 보이는 얼굴로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나를 놀렸구나.’
뒤늦게 깨달은 사실에 에블린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부끄러움에 버티지 못하고 몸을 웅크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체이서는 쿡쿡 웃음소리를 내며 동그랗게 말린 에블린의 몸을 그대로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익숙한 체취가 흘러 들어오니 더더욱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너무해요. 놀리는 게 재미있어요?”
“내 요새 취미인데. 몰랐나?”
“악취미예요.”
에블린은 얼굴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체이서의 가슴팍에 그대로 이마를 묻어 버렸다.
평소 제복을 입고 있던 옷차림과 달리 얇은 셔츠 자락 너머로 그의 탄탄한 가슴이 오늘따라 잘 느껴지는 것 같은 건 왜일까.
“더 늦어지기 전에 자야 내일도 멀쩡히 걸어 다니지.”
등을 토닥이는 규칙적인 손이 닿을수록 따뜻한 기운이 몸을 타고 흐르는 것만 같았다.
몸이 노곤히 풀리며 지금까지 잠이 오지 않았다는 게 거짓말이었는지 서서히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익숙한 손길과 온기에 몸을 편히 기대니 잠이 오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
체이서는 어느새 새근거리는 소리를 내며 잠든 에블린을 어이없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졸리면서 버텼던 건가?’
매끈한 코를 톡 두드리니 살짝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곤히 잠들어 깨지 않았다.
깨어나자마자 돌아다녔으니 피곤할 법도 했다.
‘타이밍이 좋았지.’
안 그래도 슬슬 침실을 합치자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었는데 납치 사건이 의외의 도움이 되었다.
조금 전 에블린이 부끄러워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체이서가 저도 모르게 가볍게 미소를 짓는데 그녀가 몸을 주춤거리며 움직이더니 갑자기 등을 휙 돌려 누워 버렸다.
순식간에 품에서 탈출한 에블린을 보며 체이서는 당연하다는 듯 다시 그녀의 몸을 돌려 제 품으로 끌어안았다.
‘잠꼬대 한번 고약하지.’
아플 때는 얌전히 자더니 하필 같이 침대를 쓰는 날부터 이렇게 벗어나려고 하는 걸까.
체이서는 이번에는 벗어나지 못하게 할 생각으로 그녀의 허리 위에 손을 얹어 조금 전보다 더욱 가까이 끌어당겼다.
침대 위에 넓게 퍼진 긴 머리카락에서 은은한 샴푸의 향이 퍼져 오며 평소와 다른 잠자리임을 인식시켜 주었다.
‘나쁘지 않네.’
체이서는 에블린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선 가볍게 체향을 맡았다.
샴푸 향에 가려져 있던 여름의 숲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청량한 기운에 날카로운 기운이 점점 가라앉으며 진정이 되기 시작했다.
체이서는 잠든 에블린을 올려다보며 그녀의 입가를 조심히 쓸어 보았다.
생기 있는 붉은 입술을 머금으면 지금보다 더 몸이 편해지지 않을까?
본능은 가까이 있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당장 저 입술을 탐하라 명하였다.
부드러운 입술을 머금으면 분명 지금보다 더더욱 그의 날뛰는 기운을 잠재워 주고, 숲을 닮은 단정한 기운이 능력을 사용하며 쌓인 그의 광기를 억눌러 줄 것이다.
하지만 체이서는 인내를 학습한 능력자였기에 충동을 억누르고선 에블린을 제 품 안에 가두듯 끌어안았다.
‘다음부터는 조금 더 주의해야지.’
트렐로니 백작이 저지른 일로 인해 에블린을 잃을 뻔했다는 걸 떠올리니 당장이라도 그를 불더미 속에 던져 죽기 전까지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고 싶어졌다.
‘이미 죽었으니 그럴 수는 없겠지만.’
체이서는 피식 웃으며 탐스러운 금빛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그나저나 데몬스에게 가까이 가지 말라 주의시켜야겠군.’
체이서는 낮의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심각히 이야기하던 장면을 떠올렸다.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몰라도 데몬스의 기운이 금방이라도 크게 폭발할 것같이 주변이 요란스러웠다. 체이서가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에블린은 또다시 위험에 처할 뻔했다.
‘그래서는 안 되지.’
에블린은 이제 체이서에게 아주 귀한 존재였다.
처음에는 볼품없는 모습에 가치가 없다 판단하였지만, 항체로서의 가능성 외에도 함께 지내면 지낼수록 체이서의 안에서 에블린의 가치는 더더욱 높아져만 갔다.
그에 체이서는 앞으로 에블린을 절대로 놓칠 생각이 없었다.
‘에블린,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그저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쓸모 있는 순진한 인형으로만 있어.’
그래만 준다면 언제나 이렇게 꾸며진 다정한 모습을 보여 주리다.
체이서는 다시금 에블린의 머리칼을 다정히 쓸어 주고서는 그녀의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깊숙이 아래에 잠들어 있던 이성이 천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에블린은 무거운 눈을 힘겹게 깜빡이면서 주위를 살펴보았다.
‘여기는 어디지?’
자신의 방과 비슷한 스타일로 꾸며져 있었지만. 이곳은 원래 머물던 곳보다 크기도 더 넓고, 가구도 더 많아 낯설었다.
눈을 비비며 마야가 찾으려 고개를 돌리는 순간.
어제의 편한 옷차림을 던진 채 익숙한 기사단 제복을 입고 있는 체이서와 마주할 수 있었다.
“일어났나?”
흐트러진 모습은 사라지고 언제 나와 같은 단정하고 깔끔한 모습의 체이서가 그녀를 반겨 주었다.
‘아.’
그제야 어젯밤 공작 부부의 침실에서 자게 된 것이 떠올랐고, 덕분에 잠이 확 달아났다.
“지, 지금 일 나가는 거에요?”
차라리 아예 늦게 깨어났더라면 이렇게까지 당황스럽지도 않았을 거다.
말끔히 차려입은 체이서와 달리 막 잠에서 깬 에블린의 모습은 비교가 될 정도로 엉망일 게 분명했다.
에블린은 자느라 흐트러진 머리를 대충 쓸어 넘기고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주변을 보니 마야와 로피뿐만 아니라 체이서의 시중을 돕는 하녀들도 함께 침실에 있는 것이 보였다.
‘보는 눈이 많네,’
이렇게 된 이상 적어도 배웅이라도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체이서는 그런 에블린의 어깨를 눌러 그대로 다시 앉혀 주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니 더 자도 괜찮아.”
“그래도 문 앞까지 배웅은 할래요.”
“어제 무리해서 오늘은 힘들 거야. 괜찮으니 어서 자.”
그가 마지막에 내뱉은 말 때문에 어젯밤의 부끄러운 일이 생각이 났다.
에블린은 어젯밤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이 그가 놀렸던 기억 때문이라 애써 모른 척해 버렸다.
‘그래, 체이서만 놀릴 줄 아나? 나도 놀릴 줄 아는 사람이야.’
순식간에 떠오른 기가 막힌 아이디어는 용기가 조금 필요했지만, 아직 아침잠이 온전히 달아나지 않은 탓에 쉽게 용기가 생겨났다.
“잠시만요.”
에블린은 그대로 방을 빠져나가려는 체이서를 붙잡고서 조금만 고개를 숙여 보라며 손짓했다.
“무슨 일…….”
체이서가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에블린이 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쪽, 하고 매끈한 뺨과 부드러운 입술이 맞닿는 순간은 꼭 시간이 정지된 것만 같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오늘도 힘내세요.”
깜짝 놀라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자기 뺨을 매만지는 체이서의 얼굴을 보니 용기를 낸 보람이 있었다.
에블린의 기대 어린 눈빛을 본 체이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마치 돌려주듯 그녀의 반대쪽 뺨에 살며시 입술을 눌렀다.
촉,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지자 그제야 자신이 저지른 일과 제가 당한 일을 자각한 에블린의 얼굴이 목 아래서부터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다녀올게.”
부끄러움에 정신을 차린 에블린과 달리 애초에 맨정신이었던 체이서는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방을 나섰다.
마야와 로피를 제외한 다른 하녀들이 체이서의 뒤를 따라나섰고, 문은 그대로 소리 없이 부드럽게 닫혔다.
다녀오겠다는 인사말을 오래간만에 들은 탓인지, 아니면 그리 말하는 체이서의 얼굴이 어제보다 더 빛나서 그런지.
심장이 어젯밤보다 더욱 크게 요동치는 것만 같아 다시 그 위를 눌러 보았지만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늦었지만 이제야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아, 나는 지금 설레고 있는 거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