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체이서는 데몬스를 지그시 내려보았고, 데몬스는 체이서의 시선을 열심히 피하며 서로 침묵을 유지했다.
에블린은 묘한 분위기 속에서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열심히 눈을 굴리다 어느덧 저를 보고 있는 체이서와 눈이 마주쳤다.
“에블린, 그대가 왜 여기 있을까?”
“네?”
“분명 오늘은 산책하지 말고 가만히 방에서 쉬라고 했던 것 같은데.”
에블린이 아차 하며 어색히 웃는데 체이서의 시선이 그녀가 품에 안고 있던 바구니에 향했다.
“그건 뭐야?”
“아, 레몬 타르트예요.”
“레몬 타르트는 왜?”
“데몬스 님께 구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만들어 봤어요.”
에블린이 무명천을 거두고서는 안에 있는 타르트를 확인하라는 듯 슬쩍 내밀었다.
체이서는 그 안을 들여다보더니 정말 타르트가 있는 것을 보고는 갑자기 인상을 찌푸렸다.
“아파서 쉬라고 했더니 주방을 기웃거리고, 기어코 산책까지 나와?”
화가 난 어조에 에블린이 화들짝 놀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것만 전해 주고 금방 들어가려고 했어요.”
죄인이 된 것같이 어깨를 늘어트리니 체이서가 들고 있는 바구니를 노려보는 게 느껴졌다.
“데몬스는 디저트를 안 좋아하니 주는 게 오히려 실례야.”
“어머, 진짜요?”
처음 듣는 소식에 에블린이 한껏 놀라더니 데몬스를 향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해요, 데몬스 님. 억지로 드시지 않아도 괜찮았는데.”
“아닙니다, 맛있었습니다. 그, 그럼 저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데몬스는 인사를 끝으로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에블린은 그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대화가 너무 어정쩡하게 끝이 난 것이다.
‘체이서가 정말 납치 사건에 대해 미리 알고 있던 걸까?’
데몬스의 일방적인 추측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설마 하는 의심이 싹틈과 동시에 심란해졌다.
‘……만약 체이서가 알고서 그냥 묵인한 일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화를 내야 할까?
하지만 깨어나고서 마주했던 체이서의 모습은 자신을 걱정하던 모습이지 않았나.
뜻하지 않은 정보에 머리가 터질 것만 같이 복잡해졌다.
“에블린?”
데몬스가 사라진 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멍하니 그곳을 바라보자 보다 못한 체이서가 그녀를 불렀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리 심각한 얼굴이야?”
“아, 고마운 걸 보답하고 싶었던 건데 괜한 짓이지 않았나 싶어서요.”
에블린이 시무룩이 어깨를 늘어트리자 체이서는 신경 쓰지 말라며 말을 덧붙였다.
“맛있었다잖아. 그럼 됐지.”
나름대로 위로해 주기 위해 던진 말에도 에블린의 기분이 나아 보이지 않자 체이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그녀가 들고 있던 바구니를 앗아 갔다.
“남은 건 내가 먹을 테니 이만 가지.”
“하지만 단것 별로 안 좋아하시잖아요.”
“누가 그래?”
예쁘게 말해도 충분한데 별일도 아닌 것에 왜 자꾸 성난 목소리를 내는 걸까.
안 그래도 체이서 때문에 심란해진 탓일까, 에블린은 뾰로통한 얼굴로 답했다.
“수도원에서 지낼 때 음식이 조금 달면 인상 쓰는 걸 봐서 그리 짐작했어요. 아니면 말고요!”
그리고는 흥, 하고 고개를 돌리고는 앞장서서 저택으로 향하는데 휙 하고 몸이 잡아채졌다.
“같이 가.”
붙잡힌 팔이 자연스럽게 서로 팔짱을 끼게 되자 에블린은 못마땅한 눈빛으로 맞닿은 팔을 노려보며 말했다.
“왜요? 또 넘어질까 봐요?”
어린애가 아니라고 말을 덧붙이려는데 돌아오는 답은 예상외의 답이었다.
“아니, 오늘은 그냥 내가 잡고 싶어서.”
체이서는 그리 말하고서는 에블린의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어서 들어가지.”
겨울의 햇살이 살며시 내려앉은 오후, 체이서는 조금 전의 뾰족한 모습을 지우고서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햇빛을 머금은 아름다운 외모에 드러난 자연스러운 웃음에 에블린은 마치 취하기라도 한 듯이 멍하니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래요.”
뒤늦게 답을 한 에블린은 마치 체이서를 따라 하듯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띠었다.
‘그래, 일단은 믿자.’
데몬스의 조언은 잊지 않되 증거 없이 체이서를 의심하지 않는 게 옳았다.
오늘 아침만 해도 체이서의 손을 잡고 그를 믿는다고 당당히 말하지 않았나
‘그런데 마지막에 하려던 말은 뭐였을까?’
거센 바람은 뒤로 사라지고, 어느덧 따스해진 해가 두 사람의 앞길을 비춰 주었다.
‘나중에 물어봐야겠다.’
며칠 만에 주어진 이 평화를 즐기고 싶었기에 에블린은 고민을 지워 버렸다.
유독 지독했던 겨울이 끝나 가고 있었다.
***
식당에서 함께 저녁 식사하고 돌아왔을 때 에블린이 사용하던 모든 물건이 새로운 방으로 옮겨져 있었다.
물론 그녀가 안내받은 방도 공작 부부의 침실이었으며, 그곳에서 목욕 시중을 받다 보니 어느덧 늦은 오후가 되어 잘 시간이 찾아왔다.
“합방 첫날이라고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결혼식 전까지 몸 관리를 하셔야 해요.”
멀쩡히 정신을 차리고서 맞이하는 첫날 밤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하녀들을 다루는 마야의 눈빛이 평소보다 조금 더 날카로운 건 착각이 아닐 것이다.
에블린은 절로 드는 민망한 감정을 지워 내고서는 최대한 덤덤히 답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마야. 우리는 아직 결혼도 안 한 사이라고.”
“그렇다면 다행이지요. 어제까지 크게 앓으셨으니 결혼식 전까지는 별 탈 없이 쉬셔야 해요. 꼭 말입니다.”
“알겠어, 알겠어.”
에블린의 대답에 마야는 만족한 듯 인사를 마치고서는 방을 나섰다.
마야가 쓸데없는 소리를 덧붙이고 나가지만 않았더라면 조금 혼란스러울 뿐 금방 진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분명 별게 아니어야 하는데 왜 이리 긴장이 되는 거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멀쩡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에블린은 가만히 침대 위에 앉아 있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얇은 잠옷의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행동에 아무렇지 않은 척 보이는 건 실패해 버렸다.
다행히도 체이서는 그런 행동을 보지 못했는지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에블린을 보며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 벌써 잘 준비가 끝이 났나?”
식사 후 집무실로 향하더니 이제야 일이 끝나고 돌아온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할 말이 있었는데 잘됐군.”
“무슨 일 있나요?”
“황실에서 급히 초대장이 와서 말이야.”
에블린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체이서가 내민 초대장을 받아들었다.
푸른 장미 문양이 찍힌 실링 왁스를 보니 황후궁에서 보낸 초대장 같았다.
“에트레의 봄에 참석해 달라는 초대장일 거야.”
체이서의 말에 에블린은 실링 왁스를 뜯어 편지를 열어 보았다.
“그러네요? 그런데 날짜가 너무 빠듯해요. 사흘 뒤라니.”
‘에트레의 봄’, 온전한 봄이 되기 전에 황후가 직접 수도에 머무는 성인이 되는 영애들을 위해 개최하는 성인식 행사로 수도에 살아야만 얻을 수 귀한 영광의 자리이기도 하다.
“네가 이번에 성인이 된다는 걸 뒤늦게 알고 급히 초대한 모양이야.”
“황후 폐하의 초대니 참석해야 하겠네요.”
지금껏 사교계의 곳곳에서 오는 초대들을 모두 거절했고, 앞으로는 몸을 보양하는 데만 신경을 쓰려고 했더니 어쩜 이리 할 일이 끊이지 않을까.
“어쩐지 수도에 온 느낌이 나요.”
“황후 폐하께서는 우리 집안을 좋게 생각하니 별일은 없을 거야. 걱정하지 말고 잠깐 참석해서 자리만 빛내 주고 와.”
“그럴게요.”
에블린이 협탁 위에 편지를 내려놓자 체이서가 그 옆에 놓인 물잔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약은 챙겨 먹었고?”
“아, 자기 전에 먹으려고 했어요.”
체이서는 에블린이 약을 챙겨 먹는 것을 확인한 뒤에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체이서도 자려나?’
에블린은 다시금 긴장되는 마음에 슬쩍 눈만 굴려 체이서를 올려다보았다.
‘한 침대에서 눕는 건 처음이라 떨리는데. 떨리는 티를 내고 싶지는 않은데.’
에블린이 한참 긴장하는 사이, 체이서가 갑자기 몸을 돌리며 말했다.
“먼저 자도록 해.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서.”
뒤늦게 보니 체이서 손에는 서류 묶음이 함께였다.
그는 긴 장대에 매달린 랜턴에 불을 붙이고는 에블린이 편히 잠들 수 있도록 불을 꺼 주었다.
어두운 방 안에 랜턴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주홍빛 조명이 방 안을 부드럽게 감싸 채웠다.
체이서는 곧 편한 옷차림으로 넓은 소파에 앉아 조용히 서류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고요한 방 안에 사르륵하고 종이 자락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오니 에블린은 뒤늦게서야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나는 도대체 왜 긴장을 한 거지?’
같은 방만 쓰게 될 뿐 이게 당연한 상황일 텐데 무슨 생각으로 그리 과민 반응을 한 걸까.
‘아니, 생각은 무슨 생각. 그냥 남이랑 같은 방 쓰는 게 처음이니까 그런 거지.’
에블린은 붉어진 두 뺨을 손으로 감싸며 이불 속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이상한 생각 했으니 반성하자.’
부끄러움에 절로 몸에 열기가 피어났다.
방 안에 혼자였더라면 망설임 없이 이불을 거칠게 찼을지도 모른다.
‘그냥 잠이나 자야지.’
에블린은 괜히 힘을 빼는 대신 내일을 위해 체력을 보존하자 생각하며 꼼지락거리며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물론 그렇다고 잠이 오는 건 아니었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눈이 말똥말똥했다.
잠이 오지 않음에 괜히 뒤척이는데 갑자기 머리 위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설마 하는 마음에 슬쩍 이불을 거두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체이서가 고개를 살며시 기울이더니 에블린과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어 보였다.
“잠이 안 오나?”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은 탓에 평소보다 더욱 가라앉은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천천히 몸을 움직이더니 에블린의 팔 옆에 손을 짚으며 슬쩍 허리를 숙여 앉았다.
졸지에 체이서의 팔 안에 갇히게 돼 버린 에블린이 당황스럽게 그를 올려다보았고,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평소 밤에 보여 주던 것처럼 다정히 물어왔다.
“재워 줄까?”
쿵, 쿵.
무언가 심장을 거세게 치고 가기라도 한 듯 꽉 조여 오는 느낌이었다.
에블린은 제 심장 위에 손을 올리고는 이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기를 바라며 꾹 눌렀다.
평소와 달리 흐트러진 머리, 피곤함에 더욱 차분히 가라앉은 눈, 낮게 일렁이는 목소리까지.
분명 체이서가 맞는데 체이서가 아닌 것 같았다.
아직 일은 남았지, 피곤하지, 그 와중에 룸메이트는 자지 않고 침대 위에서 뒤척이며 부산스럽게 하지.
그러니 당연히 선뜻 제안할 수 있는 사안이라는 걸 아는데 왜 이리 자꾸만 떨리는 걸까.
‘이게 이렇게까지 긴장이 될 일이야?’
에블린을 냅다 고개를 내저었다.
“그, 그냥 방이 낯설어서 그래요. 체이서는 아직도 일이 안 끝났어요?”
“너무 시끄러웠나?”
“아니에요. 너무 늦게 자면 걱정이 되니까 그렇죠.”
그럼 됐다며 체이서가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나는 괜찮으니 먼저 자. 네가 깨어 있으면 그건 그거대로 신경 쓰이니까.”
방해된다는 말은 교양 있게도 잘한다.
그는 피곤함에 눈을 감고, 눈가 사이를 꾹꾹 누르며 옅게나마 피로를 풀었다.
에블린은 이불 아래에 몸을 숨겨 눈만 빼꼼 내비치다가 이내 체이서가 다시 소파로 돌아가려는 찰나 그의 옷깃을 붙잡아 버렸다.
“체이서도 같이 자면 안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