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음, 맛있는 냄새.”
에블린은 안절부절못하는 사람들을 뒤로한 채 열심히 몸을 움직여 상큼한 냄새를 풍기는 훌륭한 레몬 타르트를 완성했다.
“많이 만들었는데 한번 맛봐 볼래?”
옆에서 많이 도와준 로피에게 작은 조각을 잘라 건네니 이내 눈을 반짝이며 감탄했다.
“세상에나! 너무 맛있어요!”
“그렇지? 심심하면 만들고는 했었는데 이렇게 만들어 보네.”
에블린은 조그맣게 만든 레몬 타르트를 잘 포장하여 가벼운 빵 바구니 안에 넣고는 그 위를 무명천으로 덮었다.
“그럼 이제 가 볼까.”
“어디를요?”
“정원에.”
“하지만 소가주님께서 산책은 삼가시는 게 좋을 것 같다 하셨는걸요. 지금 제빵도 분명 몸에 무리가 갔을 텐데요!”
“그래도 오히려 몸을 쓰니 안 좋은 기억들이 더 빨리 사라지는 것 같아 좋기만 한걸.”
“하, 하지만!”
다급히 마야가 붙어 에블린을 막아 세우려고 했지만, 성큼성큼 걷는 그녀의 발걸음을 따라가기 급급했다.
“괜찮아. 나 생각보다 튼튼해.”
원체 몸이 연약하기는 하다지만, 자주 아프기는 해도 금세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여기 와서 좀 많이 앓게 되네. 체력이 떨어졌나. 몸이 더 약해진 기분이야.’
쉽게 피로해지고, 아프면 오래 앓고.
‘일정이 많으니 피로해지고, 찬바람을 오래 쐬며 산길을 도망쳤으니 오래 앓는 거겠지?’
순간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의문이 합당한 이유가 나타나자 사그라들었다.
에블린은 화창하게 떠오른 햇살을 내다 보다가 씩 웃었다.
겨울의 끝자락이 다가왔다.
***
정원을 조금 둘러보니 지난번 만남처럼 구석진 벤치에 가만히 앉아 있는 남자가 보였다.
“안녕하세요, 데몬스 님?”
“아. 형수님.”
데몬스는 뒤늦게 인기척을 느꼈는지 당황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깨어나셨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몸은 괜찮으신가요? 아무리 날이 풀렸다 한들 찬바람을 조심하셔야 할 텐데.”
“제가 할 소리를 하시면 어떻게 해요. 아침부터 이곳에 계셨잖아요.”
“어떻게?”
“오전에 정원으로 나가시는 것 봤어요.”
에블린은 데몬스를 그대로 벤치에 앉히고서는 자신도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불편한지, 불안한지 눈을 자꾸만 이리저리 굴리며 주변을 살피는 데몬스에게 에블린이 들고 왔던 바구니를 내밀었다.
“이건……?”
“목숨을 구해 주신 것 답례예요.”
“그때 분명 쿠키의 답례라고 했었을 텐데요.”
“쿠키의 답례로 목숨을 구해 주셨으니, 저는 그 답례로 드리는 거예요.”
에블린은 조금 고민하다가 헤실 웃어 보였다.
“이번에는 제가 직접 만들어 봤는데 꽤 맛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에블린이 반짝이는 눈으로 빤히 바라보니 데몬스가 작게 한숨을 쉬다가 바구니 안을 열어 보았다.
“먹어 봐도 될까요?”
“그럼요!”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는 에블린의 말에 그가 작은 한숨을 내쉬고서는 타르트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는 곧장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맛, 있네요.”
“그래요? 다행이다!”
에블린이 손뼉을 치며 기뻐하자 그가 어쩔 줄 몰라 하더니 다시 레몬 타르트를 먹기 시작했다.
잘 먹는 어린 동생을 보는 것만 같아 기분 좋아진 에블린이 훈훈한 눈빛으로 바라보는데 어느덧 한 개를 다 먹은 데몬스가 입을 열었다.
“형수님, 제게 이리 잘해 주려고 노력할 필요 없습니다.”
“네? 그게 무슨 소리세요?”
“특히 사교계에서는 더더욱요. 그곳에서는 저를 아는 척하지 않는 게 앞으로 지내기에 더 편하실 겁니다.”
뜬금없는 소리에 에블린이 눈을 깜빡이자 데몬스는 담담히 제 비참한 처지를 입에 담았다.
“저는 사생아지 않습니까. 곁에 두어서 좋을 필요가 없는 인간입니다. 안 좋은 말을 듣게 되실지도 모릅니다.”
의젓한 태도였지만 차분한 목소리 속에 들어 있는 것은 체념이었다.
꼭 철이 빨리 든 막냇동생을 보는 것만 같은 기분.
언젠가의 알렌이 이런 모습을 보였던 것이 떠오르니 마음이 쓰였다.
‘죽은 이를 이렇게 자꾸만 연상시켜 떠올리는 건 좋지 않을 텐데.’
그리 생각하면서도 답답한 마음이 가시지를 않으니 자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에블린은 할 말을 끝내고 홀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에게 제 생각을 전했다.
“저는 데몬스 님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제 사람에게 잘해 주는 것이 욕먹을 일이라면 저는 그리 말한 분의 예의 없음을 탓하겠어요. 그리고 사생아인 게 데몬스 님 잘못도 아니고요.”
어색한 침묵 속에서도 부디 그가 자신의 탓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에 입이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가주님께서는 그리 생각하지 않으시던걸요. 사생아이니 모욕 정도는 감내하라고 하셨습니다.”
‘억지로 데려온 주제에 말은 잘했네.’
에블린은 얼굴도 모르는 현 루이사 공작에게 치를 떨면서도 겉으로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제 생각은 변치 않아요. 데몬스 님은 아무런 잘못도 없어요.”
“……그런 말을 해 주는 건 형수님이 처음입니다.”
아무렴 루이사에서 이런 말을 해 줄 수 있는 이가 있을 리가.
에블린이 어색히 웃자 데몬스는 그 웃음에 보답하듯 마주 보며 웃어 주었다.
“확실히 둘째 형님 말대로 형수님은 좋은 분 같습니다.”
대귀족의 사생아로 산다는 것은 절로 사람의 악의와 선의를 구별할 수 있게 만들었으니.
고작 몇 번 만나지 못했지만, 데몬스는 제게 향한 친절이 가식이 아닌 진심을 느낄 수가 있었다.
데몬스는 어렴풋이 자신이 처음 루이사 공작가에 도착했을 때가 떠올랐다.
길거리에서 뛰어놀던 그는 처음 보는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이곳에 강제로 끌려와 루이사 공작가의 사생아가 되었다.
키워 주던 이들은 데몬스의 친부모가 아니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받아들일 틈도 없이 만난 친아버지인 더스틴 루이사는 살벌하고 무서운 이었다.
혹독한 교육 아래 데몬스는 감히 반항 따위 하지 못하는 인물로 자라났으며, 반쪽짜리 피가 흐르는 제 주제가 무엇인지 온몸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천한 피가 흐름에도 가족으로 거두어 준 것에 감사하며 가문을 위해 살아야 했고, 그것은 데몬스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부족한 저를 같은 피가 흐른다는 이유로 거두어 준 곳이 루이사 공작가였으니 말이다.
세뇌와 가까운 훈련 덕에 데몬스는 힘든 어린 시절을 버텨 낼 수 있었고, 반쪽치고 나쁘지 않다는 평가를 받아 낼 수 있었다.
데몬스는 그 모든 과정을 걸친 경험자이기 때문일까.
순진한 얼굴로 두 눈을 깜빡이는 맑은 모습에 문득 걱정이 들어 버렸다.
“형수님. 제게 위로를 해 주셨으니 저도 도움이 될 말을 해 드리고 싶어요.”
데몬스는 제게 향한 낯설지만 따스한 선의에 보답해 주고 싶었다.
루이사 가문에 어울리지 않는 순진하고도 친절한 이 여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었다.
“어떤 조언일까요?”
데몬스는 동그랗게 눈을 뜨며 기대를 품은 얼굴이 곧 일그러질 것을 예상하며 힘겹게 입을 뗐다.
“체이서 형님을 어디까지 믿으십니까?”
“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세요?”
데몬스의 예상대로 에블린은 당황한 반응을 보여 주었다.
“형님께서 그간 저택을 비우신 건 기사단 일이 아닌 가문 내의 일 때문입니다. 이건 제 생각입니다만……. 굳이 형님께서 이 시기에 저택을 비울 필요도 없었지요.”
두 사람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찬 기운이 물씬 느껴짐에도 에블린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데몬스의 입이 다시 열리기를 기다렸다.
“바이아르도 백작가가 유서 깊은 명문가라고 하나 루이사 공작가는 그보다 더한 곳이지 않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데몬스의 긴 앞머리가 바람에 휘날리며 차분히 가라앉은 두 눈이 보였다.
“형님께서 그저 말로 경고만 하더라도 바이아르도 백작은 감히 이렇게 나설 수 없었을 겁니다.”
데몬스는 두 손을 모아 쥔 채 땅에 고정하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똑바로 마주한 눈빛 안에 서린 것은 두터운 신뢰였다.
에블린은 체이서를 믿고 있었기에 데몬스는 더더욱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제 의견을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형수님께서 이리 힘들어하셨을 걸 걱정하셨다면 그들이 저택에 방문하는 것조차 금하셨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형님은 일부러 바이아르도 가에서 보내온 사람을 맞이하였습니다. 왜일 것 같습니까?”
에블린이 반갑지 않은 주제에 어색히 웃었다.
“제가 먼저 나서고 싶다고 했었죠. 체이서에게 짐을 안겨 주고 싶지 않아서.”
“형님께서 형수님의 의사를 존중해 주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하셨겠군요.”
조금도 의심해 본 적 없다는 순진한 얼굴에 데몬스는 에블린을 보며 다시금 그녀가 루이사와 어울리지 않는 순박한 이라는 걸 깨달았다.
“만약 형님이 이 모든 걸 예상하고 가만히 지켜본 것이라면…….”
데몬스가 지나친 생각을 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사랑하는 이에게 최대한 가문의 어두운 면모를 보여 주지 않으려 일부러 모든 걸 숨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데몬스는 제 행동이 너무 섣부른 것이 아닌가 하는 후회가 들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사이좋은 두 사람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만 같았다.
‘곧 결혼을 앞둔 신부에게 이런 말을 하다니.’
뒤늦게서야 양심의 가책이 찔려옴과 동시에 형님의 명령을, 가문의 뜻을 멋대로 왜곡하여 분탕을 놓는 것이 꼭 잘못한 일을 저지르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할 기회는 지금밖에 없었다.
보라,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는 저 얼굴을.
“제게 이런 말씀을 해 주시는 이유가 궁금해요.”
에블린의 침착한 되물음에 데몬스의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형님께서 아니라고 하셨는데 내가 괜한 추측으로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것은 아닐까?’
어린 시절 갇혀 지독한 시간을 보냈던 독방이 떠오름과 동시에 호흡이 불규칙적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사소한 조언 몇 마디가 가문에 대해 처음으로 하는 반항이라는 생각이 드는지 자꾸만 심장이 목 밖으로 뛰쳐나갈 것만 같았다.
혼란스럽게 흔들리는 감정에 데몬스의 몸에 서린 일렁이는 기운이 서서히 벤치 주변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작은 조약돌부터 뿌리 깊이 박혀 있는 나무까지. 잔잔한 바람이 불어오는 평화로운 광경과 이질적으로 땅은 요란스럽게 들썩거렸다.
불안감에 미쳐 가려는 찰나.
데몬스의 표정이 점점 좋아지지 않음과 동시에 주변이 이상하게 들썩이자 에블린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가 꽉 쥔 주먹 위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
“괜찮으세요, 데몬스 님?”
데몬스는 저도 모르게 참던 숨을 편히 내쉬었다.
조금 전까지 꽉 막힌 방 안에 갇혀 있던 것만 같았더라면 에블린의 손길이 닿자마자 팍 트인 숲 가운데 던져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코끝에 일렁이는 청량한 향이 거칠게 날뛰려고 하는 기운을 서서히 잠재워 주는 것만 같은 느낌.
꼭 진정제를 먹은 것만 같은 착각 속에서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체이서에 대한 강력한 신뢰와 믿음으로 가득 찬 이의 얼굴 위에 저를 위한 걱정이 어려 있었다.
“안색이 좋지 않으세요. 의사를 불러 드릴까요?”
순수한 걱정에 말문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데몬스는 저도 모르게 멍한 눈빛으로 에블린을 응시했다.
심각한 얼굴을 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자꾸만 그날 체이서의 얼굴이 떠오른다.
모든 상황을 예측한 듯 여유로웠던 체이서의 얼굴이 텅 빈 동굴을 마주하자마자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한 듯 당황하고, 분노를 표출해 내던 모습이.
‘그래, 이건 옳지 않다.’
데몬스는 곧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
“형수님, 이 결혼을 다…….”
하지만 그의 말은 채 끝까지 이어질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 내 형제들이랑 친해진 모양이야.”
이곳에서 들으리라 생각지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데몬스가 파드득 튀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서늘한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는 체이서가 그곳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