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질문에 에블린의 표정이 절로 심각해졌다.
‘이건 고민할 거리도 아닌 것 같은데.’
영지전은 말 그대로 영지를 수복하는 것, 트렐로니 백작의 영지와 가족, 재산, 영지민 등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지만 만약 영지전을 벌이면 양측의 인적, 물적으로 막대한 피해가 일어날 것이다.
‘죄 없는 피해자들도 많이 생기겠지.’
하지만 두 번째 제안은 너무나도 평화로워 오히려 찜찜해질 정도였다.
‘이런 선택지를 주는 걸 보면 분명 루이사 공작은 트렐로니 백작을 용서 안 할 것 같기는 한데…….’
“그런데 루이사 공작께서는 분명 병상에 누워 계신다고 들었는데요.”
“맞아. 그래서 백작이 언제 벌을 받게 될지 몰라. 당장 벌을 내리느냐, 아니면 기다렸다가 벌을 내리느냐 그 차이도 있겠군.”
‘이거 때문이었나? 조금 불안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죄 없는 사람들이 피해를 보는 건 싫어.’
더 고민을 이어 갈 필요도 없었다.
“쓸데없는 피해를 더 키우고 싶지 않아요. 벌이 늦게 집행되어도 좋으니 가주께서 선택할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렇게 말할 것 같았어.”
체이서는 그러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흔쾌히 끄덕여 주는 반응을 보니 무언가 놓친 것 같다는 이상한 생각이 순간 들 정도로.
“그럼 나는 일의 마무리를 해야 하니까 조금 쉬고 있어.”
“벌써 나가요?”
“트렐로니 백작 건만 처리하면 돼.”
닷새나 흘렀다는데 체이서는 여전히 바쁜 모양이었다.
“금방 돌아올 거야.”
“……알겠어요.”
에블린은 제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커다란 손을 아쉽게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 앞까지만 배웅할래요.”
이불을 걷히고 나오자 에블린이 움직일 때마다 얇은 잠옷이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체이서의 시선이 에블린의 얼굴에서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더니 이마를 붙들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한쪽에 얌전히 놓여 있는 숄을 챙겨 에블린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이런 차림을 남들에게 보여 줄 생각은 아니었겠지?”
“마음이 급해서 그만…….”
에블린은 민망한 듯 웃더니 제 어깨에 걸쳐진 숄을 여며 맸다.
“몸도 좋지 않으니 괜히 산책 같은 거 하지 말고 방에서 가만히 쉬고 있어.”
“알겠어요. 얌전히 있을게요.”
에블린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체이서의 옷자락을 잡고 흔들자 그의 시선이 그녀가 붙잡은 옷자락 끝을 향해 고정되었다.
싫지는 않은지 입가에는 미미한 미소도 함께였다.
곧 방문을 열자 문 앞을 지키고 있는 호위 기사 둘과 마야와 로피가 있었다.
숄을 걸치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며 옷자락을 놓아주려고 하는데 체이서가 에블린의 손을 붙잡았다.
“다녀올게.”
촉, 하는 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입술이 에블린의 손등 위에 내려앉았다.
에블린이 당황하여 멍한 얼굴로 체이서를 올려다보자 그는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손을 놓아주고서는 방을 빠져나갔다.
‘어, 어어.’
볼이 빨갛게 물든 에블린을 두고서.
***
에블린이 침상에 누워 꼬물거리며 일어나지 않자 그 모습을 보다 못한 마야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이참, 아가씨. 식사는 하고 누우셔야죠.”
“으응, 그래야지.”
에블린은 멍한 눈빛으로 한참이나 손등을 바라보다가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정도야 신사가 레이디에게 가볍게 보일 수 있는 호의잖아?’
갑작스러운 접촉에 조금 놀랐을 뿐이다.
에블린은 혼자 날뛰는 마음을 가다듬고서는 마야와 로피가 준비해다 준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나 여기에는 언제까지 있어야 하지?’
에블린은 식사를 하다 말고 제가 누워 있는 커다란 침대와 그만큼 커다란 방을 둘러보다가 물었다.
“언제까지 이곳에 있어야 하니?”
“네? 언제까지라니요? 앞으로 계속 이곳에 머무셔야죠.”
“혼자?”
“무슨 소리세요, 아가씨. 당연히 소가주님과 함께죠.”
갑작스러운 소리에 에블린의 얼굴이 당황에 물들자 마야가 입가를 가리며 소녀처럼 꺄르르 웃었다.
“요새 사교계에도 약혼식을 치른 사이면 이렇게 같은 침실을 쓰는 게 유행이에요.”
“뭐? 그러다가 파혼하면 어떻게 하려고?”
“귀족가의 결혼은 보통 가문과의 결합이니 이 결속이 깨지지 않음을 사교계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거죠. 사랑하는 연인들이 반길 만한 소식이죠?”
마치 에블린과 체이서는 사랑하는 사이니 너무 기쁜 소식이지 않으냐는 듯한 말투였다.
“나, 낭만적이네.”
“그렇죠! 이런 날이 곧 올 줄 알고 계속해서 이 침실을 가꾼 보람이 있지 뭐예요.”
“저는 두 분께서 생각보다 늦게 들어와서 너무 아쉬워요.”
갑작스럽게 합방을 통보받아 당황스러운 에블린과 달리 마야와 로피는 굉장히 설렘이 가득한 얼굴로 기쁨을 아낌없이 표현하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에블린이 소심하게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지만 돌아오는 건 짓궂은 농담이었다.
“소가주님께서도 아픈 사람을 두고서 밤일에 힘쓰시지는 않으시겠죠.”
“마, 마야!”
수위 높은 농담에 에블린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자 마야와 로피가 사이좋게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제가 너무 주제넘었지요? 죄송합니다.”
하나도 안 죄송해 보였다.
에블린은 홧홧하게 열이 오른뺨을 매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마음의 준비도 안 끝났는데.’
아무리 사교계 유행이라고 하지만 사람들이 참으로 남사스러운 걸 모른다.
어차피 같은 침실을 쓰기로 한 것, 차라리 이렇게 되었으니 적응하는 게 맞기는 하다만…….
‘당분간 좀 불편하겠다.’
에블린은 이유도 없이 자꾸만 떨리는 가슴팍을 꾹 누르며 괜히 웃었다.
“그리고 같은 방을 사용하시는 게 조금 더 안심이 되실 거예요. 그럴 리는 없기를 바라지만 갑작스러운 암살 시도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장난기가 사라진 마야의 목소리에 에블린도 웃음을 지웠다.
‘루이사 진짜 무섭다.’
치료제를 무사히 개발하여 마물화 전염병을 세상에서 지워 내고, 이에 따라 피해를 보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 소박한 소원을 마음에 품었을 뿐인데.
고작 결혼이라는 조그만 조약이 하나 꼈다고 일이 엄청나게 커져 버렸다는 게 실감이 났다.
‘후계자를 건강히 키우고 적당한 시기에 이혼해서 나가려고 했는데…….’
어쩐지 마냥 쉽지 않을 것 같다.
대충 식사를 마치고 뻐근한 몸을 부드럽게 풀기 위해 방 안을 걷던 에블린은 문득 창밖을 내려다보다가 반가운 사람을 발견했다.
혼자서 어디론가 향하는 데몬스의 뒷모습을 보고서는 그제야 그가 절벽 위에 떨어지던 자신을 구해 줬던 것을 떠올린 것이다.
“있지, 마야. 잠시 주방 좀 빌려 쓸 수 있을까?”
“예? 무얼 하시려고요?”
“답례를 좀 하고 싶어서.”
쿠키에 대한 답례로 구해 줬으니 그에 대한 답례로 이번에는 직접 타르트라도 만들어서 선물해 주고 싶었다.
이야기가 맥락 없이 흘러가자 마야가 당황한 얼굴을 보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
“나를 풀어 주어라, 이 야비한 놈들. 비겁하게 충성을 맹세한 가신들 사이를 이리 갈라 엄한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게냐! 나는 죄가 없다! 당장 가주님을 뵙게 해 주어라!”
루이사 공작저에 있는 지하 감옥, 그곳에 갇힌 트렐로니 백작이 호위를 서고 있는 기사들에게 소리를 꽥꽥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백작과 협조를 한 가신들에게 무어라 회유했는지 몰라도 그들은 비겁하게 꽤 많은 양의 피해보상금을 제시하고서는 처벌을 피해갈 수 있었다고 하였다.
다만, 트렐로니 백작 같은 경우는 사건의 중심에 있기에 엄하게 벌해야 한다는 이유로 가족들도 보지 못한 채 감옥에 갇혀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어찌나 오랫동안 소리를 질렀는지 트렐로니 백작의 목은 쩍쩍 갈라진 채로 쉰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백작은 억울하다며 제 하소연하고 있었는데 기사들은 미동도 없이 그를 무시하였다.
“데리고 나와.”
그때 백작의 귀에 자기 말에 호응해 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작이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렸을 때는 보잘것없던 소년이 장성한 사내가 되어 그를 같잖다는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 능력에 몸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매번 고통스러움을 참던 이가 자신을 한심하게 쳐다보는 눈빛을 백작은 견뎌 낼 수가 없었다.
체이서의 명령이 떨어지자 철창으로 이루어진 감옥 문이 열렸고, 두 명의 기사가 양쪽에서 그를 붙들어 일으켰다.
“그간 루이사에 이바지한 것을 생각하여 가주님을 만나게 해 주마. 너에 대한 처벌도 가주님께서 내리실 거니 정신 똑바로 차리는 게 좋을 거야.”
이는 트렐로니 백작에게 굉장한 희소식이었다.
‘그래, 이래야지!’
백작은 루이사 공작을 만나게 되면 자신이 저지른 죄는 지워지고 공신을 인정받을 숨겨진 비밀을 품에 안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니 이리 자비로운 척을 할 수 있는 거다. 내가 공작님만 뵙고 난다면 너희를 모두 끌어내려 주마!’
“놔라! 내 발로 걸어가겠다!”
며칠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다고는 생각지 못할 만큼 당당한 걸음에 기사들이 남몰래 고개를 내저었다.
체이서의 뒤를 따라가는 트렐로니 백작은 요 며칠 중 가장 흥분상태였다.
어떻게 자신이 품은 비밀을 밝혀야 할지, 이에 따라 루이사 공작이 얼마나 기뻐할지, 그리고 자신이 원하던 염원을 이룰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제 처지를 비관하던 그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기 시작했다.
“가주님은 이 방에 계신다. 단독으로 만나기를 원하시니 혼자 들어가도록.”
백작은 신이 나 씰룩거리는 입꼬리에 힘을 주면서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뭐지? 방이 왜 이렇게 깜깜한…….”
하지만 그의 말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어, 어?”
끔찍한 비명이 울렸고.
문은 그대로 닫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