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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49)화 (49/159)

49화

모두의 시선이 동시에 그쪽으로 쏠리자 체이서가 입을 열어 짧게 명했다.

“모두 나가 있도록.”

그 말에 옆에서 시중을 들던 하녀들과 주치의 모두가 인사를 마치고서 방을 나갔고, 순식간에 방 안에는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

체이서는 침묵을 지키며 에블린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이제 열은 없네.”

“의사 말로는 열도 다 떨어지고 괜찮아졌데요.”

“그래야지. 닷새나 끙끙거리며 앓았는데.”

괜찮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체이서는 주치의가 앉아 있던 의자에 털썩 앉고서는 다리를 비딱하게 꼬았다.

그가 한참 동안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빤히 바라보기만 하자 에블린은 이 묘한 분위기가 너무도 어색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체이서, 제가 왜 공작 부부의 침실에 있을까요?”

“가까이 두어야 도망치는지 아닌지 확인하지 않겠어?”

“네? 제가 왜 도망을 가요? 안 도망가겠다고 했잖아요. 계약도 했고.”

깜짝 놀란 에블린이 되묻자 체이서가 허, 하고 기가 찬 웃음을 내뱉었다.

“계약을 잊어버린 건 아닌가 봐?”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말을 끝으로 체이서는 팔짱을 낀 채 그대로 입을 다무는 걸 선택했다.

‘할 말이 있어 보이는데 왜 삼키는 거지?’

도대체 어디서 저렇게 감정이 상했는지 편히 말해 주면 좋으련만, 체이서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에블린은 체이서가 있는 침대 끝 쪽으로 몸을 슬금슬금 움직였다. 그런데 또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그가 움직이지 말라는 듯 에블린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러다 흠칫 놀라더니 황급히 손을 놓아 버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체이서답지 않게 왜 내 눈치를 보는 거지?’

보다 못한 에블린이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지는 체이서의 확 잡아챘다.

“뭐 하는 거야?”

까칠한 목소리에도 에블린은 맞잡은 손을 살살 흔들며 씩 웃었다.

“말하고 싶은 거 있으면 편히 하세요.”

“무슨 말?”

“왜 제가 도망간다고 생각했는지 같은 거? 그건 체이서가 더 잘 알겠죠?”

체이서가 대놓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에 에블린도 지지 않겠다는 듯 표정을 굳혔다.

이미 할 말, 못 할 말 다 나누어 본 사이에 이렇게 눈치를 보는 게 오히려 당황스럽다는 걸 모르는 걸까?

에블린이 눈에 힘을 풀지 않고 지그시 응시하자 체이서가 힘겹게 입을 뗐다.

“……왜.”

체이서는 막상 입을 뗐어도 말하기가 쉽지 않은지 거듭 한숨을 내쉬었다.

에블린이 재촉하지 않고 침착히 기다려 주니 곧 기다렸던 뒷말이 들려왔다.

“나를 기다리지 않았지?”

설마 이런 걸 물어 올 줄은 몰랐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에블린이 당황하자 체이서는 침착히 질문을 이어갔다.

“이 기회를 틈타 도망이라도 갈 생각이었나?”

“세상에나. 왜 생각이 그렇게 흘러가요?”

“아니면…….”

“아니면 뭐요?”

체이서는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고서는 미간을 구겼다.

“말하기 싫은가 보네요. 좋아요, 제가 먼저 말할게요.”

어째서 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오해가 오래 유지돼서 좋을 것 하나 없다.

“트렐로니 백작이 당신과 협상한다고 했고, 당신은 협상에 응하지 않을 것 같아서 혼자 탈출했어요. 그런 곳에서 죽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리고?”

“끝이에요. 체이서는 할 말 없어요?”

계속되는 답답한 상황에 에블린도 포기한 듯 두 손을 들었다.

“도대체 뭘 듣고 싶은지 제대로 물어봐 주시면 답할게요.”

제대로 말을 꺼낼 때까지는 더는 말 안 하겠다며 고개를 돌리는 에블린의 모습에 그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저러는 거지?’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걸 물어보려고 저렇게 머뭇거리는지.

“……왜 내가 협상에 응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

“트렐로니 백작이 화가 난 건 가신들을 무시하는 태도 때문인 것 같았어요. 당신은 앞으로도 가신들에게 굽히지 않을 테니 협상이 결렬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고요.”

제대로 된 질문이 돌아오자 그제야 에블린은 고개를 돌려 체이서를 마주했다.

“그리고 냉정히 생각해 보았을 때, 조금의 어려움이 따라도 항체와 공작 부인이 될 사람은 다시 구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당신은 가주가 될 사람이잖아요. 그러니 가문을 위해서 사소한 일에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어요.”

“사소한 일이라. 이렇게 말을 들어 보면 내가 아니라 그대가 태생부터 귀족가의 교육받아 온 사람 같아. 내가 아닌 에블린 네가 루이사 가주가 되지 그랬나?”

어디서 빈정 상했는지 체이서가 끔찍한 악담을 퍼부었다. 그는 불쾌감 서린 얼굴로 에블린이 잡고 있던 자신의 손을 매정히도 빼 버렸다.

“협상을 결렬한 뒤, 너를 구하러 갈 생각은 안 해 봤나? 우리가 맺은 계약이 그리 단순했어?”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에요.”

“아니라고? 난 분명히 너를 죽게 두지 않는다고 했어. 그런데 너는 계약도, 나도 믿지 못한 채 멋대로 도망치다가 절벽에서 떨어질 뻔하지 않았나. 내가 미덥지 않았으니 그런 선택을 한 거겠지.”

말해 달라고 해서 솔직히 말해 줬는데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내가 체이서를 너무 냉정한 이라 생각하고 있나?’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당시에는 혼자서 탈출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

‘너무 비약적인 판단이었나.’

어쩐지 뒤늦게서야 왜 체이서가 이렇게 화가 난 것 같은지 알 것 같았다.

에블린이 체이서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많이 걱정하셨어요?”

“…….”

체이서는 답하지 않았지만, 그의 미간이 조금 전보다 더 찌푸려지는 것이 보였다.

걱정되어 구하러 온 사람에게 당신이 나를 구하러 올 것 같지 않아서 혼자 도망쳤고 하는데, 이 이야기를 듣는 당사자의 심정은 얼마나 답답하고 또 화가 날까.

에블린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제 진심을 토해 냈다.

“걱정시켜서 미안해요.”

“…….”

불만스러운 얼굴이 다시 예전처럼 다정히 풀어지기를 바라며 에블린은 부끄러운 속내를 천천히 입에 담았다.

“당신 말대로 바이아르도 백작가의 일도 맡겼더라면 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하는 후회도 들고 트렐로니 백작에게 죽고 싶지도 않고……. 당신이 구하러 온다는 생각을 못 한 건 내가 이 이상의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였어요.”

납치, 구타, 협박 등 모든 과정이 너무도 끔찍하여 떠올리기만 해도 몸이 저절로 떨려왔다.

두려운 기억은 트라우마가 되어 마음속 깊이 안고 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떻게든 탈출해서 도움을 요청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어요. 도망칠 생각은 당연히 없었고요.”

체이서는 여전히 삐딱한 자세로 에블린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건 어렵다고 생각했었어요. 항상 혼자서 잘 헤쳐 왔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을 했던 것 같아요.”

앞으로 비슷한 일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품고 불안한 생을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다음에는 이번만큼 무서울 것 같지 않은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이상하게도 말하면 말할수록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사실 도망칠 때 당신이 보고 싶었어요. 누구에게도 기대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당신이 구해 주러 왔을 때 얼마나 안도하고 기뻤는지 몰라요.”

에블린은 체이서가 구해 주러 온 날 보았던 별이 빼곡히 박힌 밤하늘을 떠올렸다.

“마치 제 인생의 구원자처럼 보였죠. 얼마나 멋졌는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체이서는 어떻게 자신이 죽으려고 할 때마다 나타나 살려 주고는 하는지, 기가 막힌 우연을 떠올리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다음부터는 당신을 믿을게요. 아니, 지금부터 믿을 테니까 화 풀어 주면 안 돼요?”

에블린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더니 비어 있는 체이서의 손을 다시 붙잡았다.

그리고서는 깍지를 끼자 체이서와 눈이 마주쳤고, 헤실헤실 웃어 버렸다.

“하, 참.”

체이서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한번 웃고서는 그대로 손을 맞잡아 주었다.

“사과는 내가 해야지. 가문의 일에 휘말리게 해서 미안하다. 내가 조금 더 신경 썼어야 했어.”

“구해 줘서 고마워요. 당신은 언제나 날 구해 주네요?”

“구할 수 있어서 영광이지.”

드디어 체이서의 굳은 입가가 풀어졌다.

“그리고 앞으로는 내게 기대도록 해. 괜히 혼자서 끙끙 앓지 말고. 너와 나는 곧 부부가 될 사이잖아.”

다행히도 체이서의 화가 모두 풀린 모양이었다. 에블린이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다시금 강조하며 말했다.

“더 하고 싶은 말은 없나?”

“다음부터 저택을 오래 비울 땐 편지라도 보내주세요. 저도 걱정했거든요.”

“……명심하지.”

훈훈한 마무리였다.

“참, 트렐로니 백작은 어떻게 됐나요?”

새로운 대화 주제가 마음에 들었는지 체이서가 이 순간을 기다렸다며 서늘한 낯을 한 채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네게 선택권을 주려고 그의 처벌을 미루고 있었어.”

“선택지요? 그냥 고소해서 법정에 세우면 안 되나요?”

“제일 상식적인 방법이지만……. 아무래도 결혼식 전의 새신부에게 악의적인 소문이 뒤따를지도 모르니까.”

제일 평화적인 방법이 시작부터 막혀 버렸다.

‘루이사는 적이 많지.’

상상하기도 힘든 이상한 소문이 따라붙어 에블린과 루이사를 함께 깎아내리며 괴롭힐지 몰랐다.

에블린이 경청하는 자세를 취하자 체이서가 기다렸다는 듯 제안을 내놓았다.

“첫 번째는 영지전. 트렐로니 백작을 합법적으로 죽일 수 있고, 또 그의 영토와 재산을 모두 압수하여 피해보상금으로 받을 수 있게 되겠지.”

시작부터 너무 잔인한 제안이었다.

“물론 백작은 내가 직접 죽일 거야. 나는 이 방법을 추천하는데.”

“다음 제안은요?”

“두 번째로는 가주에게 직접 찾아가서 용서를 빌게 하는 거야. 모든 처벌은 가주가 직접 내리는 거지. 다만 가주는 트렐로니 백작을 매우 아끼기에 그를 용서해 줄 가능성이 커. 아주 평화적인 방법이지.”

체이서는 에블린이 어떠한 선택을 할지 모두 예상했다는 얼굴로 물었다.

“자, 어떤 벌을 내려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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