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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48)화 (48/159)

 48화

이 짧은 말이 뭐가 그리 안심되는지 에블린이 훌쩍이며 울기 시작하자 주위가 조금 전보다 더 고요해졌다.

체이서는 에블린의 등을 도닥여 주다가 그대로 안전한 곳에 서 있는 데몬스의 옆에 내려다 주었다.

에블린이 떨어지기 싫다고 울먹이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으나 체이서는 그녀의 뺨을 매만져 주며 다정히 속삭였다.

“이번에는 이곳에 얌전히 있어. 알겠지?”

분명 다정한 말투와 행동이었지만 어쩐지 화가 난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에블린은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멀어지는 체이서의 등 뒤를 바라보며 훌쩍였다. 

그러다 곧 제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트렐로니 백작이 가신들과 뜻을 모아 가문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권력 다툼에 바이아르도 영애를 끌어들게 되어 죄송합니다.”

딱딱한 말투로 현 상황을 보고해 주듯 말하고 있었으나 데몬스의 얼굴은 긴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말 한마디를 내뱉으면서 계속 조심스럽게 에블린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에 그녀가 조용히 눈을 깜빡였다.

“……괜찮으십니까?”

데몬스가 에블린과 눈을 마주치기 위해 바닥에 편히 앉더니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손수건이었다.

“지난번 쿠키의 답례입니다.”

에블린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제야 제가 살아 돌아왔음을 실감이라도 했는지, 아니면 이성이 돌아오기라도 했는지.

그녀는 저도 모르게 울며불며 엉망이 된 얼굴로 활짝 웃고 말았다.

“고마워요.”

사실 트렐로니 백작이 혼잣말하는 걸 떠들어 대충 어떠한 상황인지는 알고 있었기에 에블린은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한 것이 있다면…….”

그런 에블린의 반응에 오히려 데몬스는 더 설명해 주고 싶다는 듯 입을 열었다가 황급히 그녀의 앞을 몸으로 가렸다.

“데몬스 님?”

그와 동시에 눈앞에 거대한 불꽃이 치솟았다.

이 산을 통째로 불태우기라도 할 생각인지 거침없이 몸을 키우는 불꽃은 결국 대치하고 있던 기사들을 모두 날름거리며 불 안으로 삼키기 시작했다.

“으아악!”

“사, 살려 주십시오!”

고통 어린 비명과 함께 두 사람이 있는 쪽으로 뛰어오는 기사들은 데몬스의 손짓 몇 번에 땅에 납작하게 붙어 버렸고, 움직이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트렐로니 백작이 능력을 쓰려는지 손을 몇 번 휘저어 보았으니 체이서에게는 무용지물인지 조금의 위협도 되지 않고 있었다.

백작은 수하들을 버리고 도망치려다가 사방을 포위하는 불꽃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증오가 가득 담긴 얼굴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저 공작님을 위하여……!”

하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숨이 막히기라도 했는지 목을 붙잡은 채 고개를 한껏 치켜들더니 이내 거품을 물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그의 주위를 감싸던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다시 볼 수 없는 충신이니 죽기 전 가주님과 면회를 허락해 주어야겠다. 끌고 가.”

한쪽에서 멍하나 불꽃을 바라보던 아군 기사들이 황급히 움직여 트렐로니 백작을 생포하였다.

끔찍한 비명과 고통이 날뛰는 이곳에서 에블린은 원흉이 된 불꽃을 등에 진 채 이쪽으로 다가오는 체이서를 올려다보다 그의 뒤로 시선을 던졌다.

아무래도 납치당한 후 고생하긴 한 모양이다.

불에 타오르는 장면이 수도원이 불타는 장면과 겹쳐 보이면서 살려 달라고 하는 고통 어린 외침들이 환청처럼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해서 미안해, 에블린.”

에블린이 자신을 쳐다보지 않음을 느낀 체이서는 뒤를 힐끗 보더니 그녀의 눈에 서린 지독한 죄책감을 읽어 냈다.

체이서는 이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에블린의 눈을 커다란 손으로 덮었다.

“너를 납치하고 감금했던 녀석들이야. 죽어 마땅한 놈들.”

“…….”

“죄책감 따위 갖지 마.”

“……네.”

“이만 쉬어. 눈을 뜨면 집일 테니까.”

아마 집이라는 건 루이사 공작저를 이야기하는 것이겠지.

불타 없어진 수도원이 아니라.

에블린의 두 눈이 초점을 잡지 못한 채 거칠게 동요하자 체이서는 짧게 혀를 차고선 가만히 앉아 있던 그녀를 안아 들었다.

“미안하다.”

짧은 사과에 어째서 다시금 눈물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에블린은 눈물 한줄기를 흘리며, 혼란스러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 

지독한 감기와 몸살이 다시 에블린에게 찾아왔다.

고작 망토 하나로 추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이마저도 도망치다 옷이 엉망이 되었기에 지난번보다 더 지독한 감기가 찾아왔다.

비좁은 동굴을 빠져나가고, 절벽에 매달리느라 학대당한 몸은 지독한 근육통과 몸살을 호소했으며, 절로 몸에 열이 들끓었다.

어지러운 와중에도 잠에서 깨기는 했는지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오가는 것도 들었다.

마야가 화를 내는 목소리와 슬피 우는 로피의 울음소리, 진단을 내리는 의사의 목소리.

윙윙거리는 소리 뒤로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뒤섞여 들려왔지만, 애석하게도 가장 기다리는 사람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동굴에서도, 절벽에서도 또 쫓기는 와중에도 가장 보고 싶었던 사람.

완벽히 믿지 않음에도 결국 조그마한 희망을 만들어 내준 사람.

‘체이서…….’

몇 번이고 그를 기다리다가 혼절하듯 잠이 든 것 같았다.

며칠이나 흘렀는지 잘 모르겠다.

해롱거리는 정신을 어떻게든 붙잡으려 노력하다 보니 잠깐이나마 정신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침대 옆을 누군가가 지키고 있는 것이 느껴져 힘겹게 눈을 뜨고선 그곳을 쳐다보았다.

옅은 조명을 등진 채, 에블린의 곁을 지키고 앉아 있는 사람은 그토록 보고 싶었던 체이서였다.

지난번 에블린이 아팠을 적과 같이 조용히 그녀의 곁을 지켜 주고 있었나 보다.

시선을 느꼈는지 체이서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에블린을 불렀다.

“에블린.”

흐릿한 시야에 빛마저 등진 탓인지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체이서는 에블린을 불러 놓고 가만히 내려보더니 나지막이 물었다.

“어째서 그 자리에서 날 기다리지 않았어?”

말을 꺼낼 힘은 없었으나 힘없는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꼭 대답해 주고 싶었다.

“그냥…….”

“내가 구하러 오지 않을 것 같았나?”

만약 평소의 에블린이었더라면 상대방을 배려하여 눈치껏 거짓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픈 탓인지 솔직한 마음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네에…….”

에블린은 답을 하고서 거친 숨을 내쉬며 몸을 비틀었다.

다시금 깨질 것 같은 두통 속에서 체이서와 닮은 어린 소년이 울 것만 같은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는 것이 보였다.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자 어린 소년의 모습은 사라지고 체이서의 모습이 나타났다.

흐린 시야 탓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체이서가 죄책감이 서린 눈으로 저를 내려다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픈 탓인지 머릿속이 여러 생각이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체이서는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일까.

모두 자신 탓인데 왜 미안해하는 것일까.

자꾸 이름을 불러 주면서 왜 손은 붙잡아 주지 않는 걸까.

그냥 아무런 생각 말고 언제나처럼 제 손을 잡아 주면 좋겠다.

그런 생각에 에블린은 천근만근 느껴지는 팔을 들어 침대 위에 얹어진 그의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괜찮아요.’


그리 말했던 것 같다.

다시 들끓는 열에 더는 눈이 떠지지 않았고, 의식이 점점 아래로 가라앉았다.

에블린은 다시 거친 숨을 내쉬며 잠이 들었고, 체이서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힘겹게 붙들고 있는 여린 손을 빼내었다.

차갑게 굳은 눈동자는 에블린을 한참이고 노려보더니 이내 방을 박차고 나섰다.

***

며칠간 몸을 짓누르던 통증이 가시고, 숨쉬기가 한결 편안해졌을 때 겨우 정신이 돌아왔다.

‘……며칠이나 지났지?’

에블린은 고른 숨을 내쉬며 잠에 취한 채 상황을 정리해 보기 시작했다.

‘아사블랑한테 납치당했고, 도망치다가 죽을 뻔할 때 체이서가 와서 구해 줬었구나.’

얕은 잠에 빠진 상태임에도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구하러 올 줄 몰랐어.’

적어도 가문의 일을 해결하기 전까지 나서지 못할 것 같았기에 도망치는 걸 선택했다.

하지만 체이서는 곧바로 저를 구하러 왔고, 덕분에 무모한 탈출은 성공으로 끝이 날 수 있던 거겠지.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어느덧 잠이 달아난 에블린은 천천히 눈을 뜨고서는 옆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체이서가 옆에서 그녀를 지켜주고 있을 것만 같은 생각에.

‘……없네.’

옆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당연한 일이 아닌데 이상하게 실망감이 밀려왔다. 

지난번 아팠을 때 옆을 지켜 주었던 게 큰 기억으로 남았던 걸까. 

‘그런데 여기는 어디지? 처음 보는 방인데.’

민망함을 내쫓기 위해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피는데 문가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소리가 들린 쪽으로 시선을 주니 입을 틀어막은 마야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일그러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마야. 좋은 아침이야.”

해맑은 에블린의 웃음에 마야의 입가가 파르르 떨리더니 그녀는 곧 저택이 떠나가리만큼 큰 소리로 외쳤다.

“아가씨께서 깨어나셨다. 로피, 당장 주치의를 불러오렴!”

*** 

그 후로는 모든 게 정신없이 흘러갔다.

로피가 복도를 내달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공작가의 주치의란 자가 찾아왔고, 에블린의 몸을 살펴보았다.

주치의는 내내 굳은 얼굴로 몸 상태를 살펴보다가 시간이 흐른 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닷새 동안 의식을 차리지 못하셨습니다. 무사히 눈을 뜨셔서 다행입니다, 영애.”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어떻게 닷새나 의식을 잃고 누워 있을 수 있을까.

고작 찬 바람을 조금 쐰 것 정도일 텐데.

‘그냥 과장이겠지.’

에블린은 제가 겪은 고난은 생각지도 않은 채 이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가 간신히 눈물을 그친 마야와 여전히 울먹이는 로피를 보고 그 생각을 지웠다.

‘심각했나 보다.’

“입맛이 없으셔도 식사를 제때 챙겨 드시고, 당분간은 무리하지 마십시오. 체력 회복에 도움 되는 약을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그래도 몸 상태가 괜찮아진 탓인지 모두의 표정이 점점 부드럽게 풀려 가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분위기를 좀 전환시키기 위해 웃으면서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 물었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

“공작 부부의 침실이야.”

대답은 멀리 문가 쪽에서 들려왔다.

에블린은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기다 이제 막 방을 들어선 체이서와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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