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체이서는 대답을 듣지 못했음에도 에블린이 마지막 이유로 홀로 도망쳤을 것 같다는 생각을 자꾸만 지울 수가 없었다.
건방진 트렐로니 백작의 작태에 분노한 것보다 에블린이 이러한 선택을 한 것이 더욱더 불쾌하였다.
‘만나서 물어보면 알겠지.’
어째서 도망쳤는지, 왜 자신을 기다리지 않았는지.
‘혹은 나를 못 믿었는지.’
체이서의 눈이 형형한 빛을 내며 살기를 품었다.
성질까지 죽여 가며 귀찮아도 옆에 있어 주고, 그토록 다정히 대해 주었는데 어째서 자신을 믿지 못한 걸까.
체이서는 머리끝까지 치미는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천천히 숨을 골랐다.
울고 있는 에블린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리고, 메마른 입술이 저의 이름을 애달프게 부르는 것이 자꾸만 환청처럼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내가 피곤하긴 한 모양이야.’
체이서는 신경질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귀찮은 것들을 쳐 내고 나면 당분간은 피곤함과는 거리를 둘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
에블린은 거친 숨을 내쉬며 앞만 보며 뛰었다.
보이지 않는 어둠, 매서운 추위, 그리고 엉망진창 험한 산길.
모든 것이 악조건이었으나 어떻게든 이 산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멀리 가지 않았다!”
“잡아라!”
살기를 품은 기사들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에블린의 목덜미를 잡아챌 것처럼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에블린의 옷은 이미 엉망진창이 된 지 오래였고, 굽이 높은 구두는 진작 벼랑 끝에 내던졌기에 맨발에는 상처가 가득 생겨났다.
그럼에도 아픔에 나오는 신음을 꾹 참아 내며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으윽……!”
계속해서 가까워지는 목소리에 자꾸만 뒤를 돌아보다가 발밑에 걸리는 나무줄기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에블린은 최대한 소리를 참아 내고서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옷에 이어 몸도 엉망진창이었다.
‘살아 돌아가도 며칠을 꼬박 앓겠구나.’
제 몸은 제가 더 잘 알기에 에블린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앞만 보고 다시 뛰기 시작했다.
도망치다 보면 언젠가 따돌릴 수 있다고, 숨을 공간이 나타나면 비좁은 곳이라도 몸을 구겨 들어가 숨기겠다고 그리 생각했지만.
이 도망도 끝이 도달한 모양이다.
에블린은 자신의 앞에 펼쳐진 까마득한 낭떠러지를 내려다보며 허탈하게 웃어 버렸다.
없는 길을 헤쳐서 왔더니 하필 와도 이런 곳이었다.
거친 숨을 내쉬면서 멍하니 끝조차 보이지 않는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수풀을 제치고서 그토록 보고 싶지 않던 인물이 나타났다.
“드디어 잡았구나, 이 빌어먹을 계집.”
트렐로니 백작은 핏발 선 눈으로 에블린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 나를 쫓아온 걸 보니 협상이 잘 안 됐나 봅니다?”
에블린은 겁에 질린 모습을 지우고서는 일부러 더 백작을 비웃었다.
어린 여인의 비웃음에 기분이 나쁠 법도 하건만 그는 분노한 것과 별개로 의외로 침착히 그녀를 위아래로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능력자인가?”
“대답해 줄 의무가 있습니까?”
“아닌가 보군.”
에블린이 몇 마디 하지 않았음에도 백작은 짧게 판단을 마친 후에도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그저 내 능력이 자연스럽게 풀린 거라 여겼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란 말이야.
트렐로니 백작은 턱을 매만지며 열심히 에블린을 관찰하였다. 무언가 더 숨기는 게 있는지 볼 모양이었다.
“이능력자가 아닌데 내 능력을 어찌 풀고 그리 도망갔지?”
“자기 능력이 약한 것을 남에게서 찾으려고 하다니. 적어도 체이서라면 그러지 않았을 겁니다.”
트렐로니 백작은 무어라 소리를 치려다가 순간 뭔가를 깨달은 듯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생각해 보니 이름도 낯설지 않았지. 그래, 어디서 보았던가 했더니.”
갑자기 그가 한 손으로 제 이마를 짚더니 미친 사람처럼 광소를 내뱉기 시작했다.
“분명 죽었을 텐데. 어찌 살았지? 체이서 그놈이 살려 준 건가? 그렇다면 그놈은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이 순간을 계획하였단 말이냐?”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에블린은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으며 목소리를 높이는 그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그러다 파스스하고 낭떠러지 끝의 흙들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더는 도망갈 곳이 없었다.
“그래, 네놈들은 꼭 아는 사이라도 되는 양 사이가 퍽 좋아 보였지. 이제야 알겠구나. 남매가 아니라 부인으로 들이기 위해서 널 죽인 척 연기를 했던 거야!”
벌겋게 충혈된 눈은 맛이 간 사람의 눈처럼 광기에 희번덕이며 빛이 났다.
“그 멍청한 이타심이 이제야 이해가 되는구나. 둘 다 이날을 위해 가주를 속이고, 우리의 눈을 속였구나!”
위급한 이 순간, 갑자기 머리를 반으로 갈라 버릴 것만 같은 통증이 찾아오더니 무언가 눈앞에 흐릿하게 비치기 시작했다.
불에 그슬려 엉망이 된 미로, 바닥에 쓰러진 어린아이들의 시신들, 그리고 그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수많은 사람의 시신.
까맣게 불탄 시체들 사이에서 어린 소년이 에블린을 어딘가에 숨겨 주며 작게 속삭였다.
‘넌 살아.’
“아악!”
에블린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소리를 지르며 통증을 이기지 못하고 자기도 모르게 후드득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여러 감정이 소용돌이치며 찾아오기 시작했다.
“허나, 너는 살아 있으면 안 된다. 살아 있어서는 안 될 존재야!”
그 순간 저 멀리서 붉은 불꽃이 피어오르더니 사람들의 비명이 울리기 시작했다.
화려하고도 아름다운 불꽃.
보이지 않았음에도 그 불꽃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에블린!”
멀리서 체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하러 와 줬구나.’
믿지 못할 현실을 직면하기라도 한 듯 에블린은 기쁘면서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희망을 피워 내 준 체이서를 향해 앞으로 다가가려 했으나.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큰 고생을 하였는데! 그 고생을 보상받기 위해서라도 너는 살아 있으면 아니 된다!”
분노에 찬 트렐로니 백작의 움직임이 조금 더 빨랐다.
곧 기사들을 제치고 체이서가 나타났으며, 그 뒤를 따라 블러드윈이 함께 따라왔다.
에블린은 체이서를 향해 손을 뻗었고, 체이서 또한 아래를 향해 손을 뻗었으나 두 사람의 손은 맞닿지 않았다.
추락이었다.
어찌나 낭떠러지의 벼랑 높이가 높은지 거센 바람 소리가 한참이나 울리며 귀 안에 맴돌았다.
‘이렇게 죽는 건가?’
함부로 목숨을 던지려고 했던 벌을 꼭 이렇게 되돌려 받는 것 같았다.
저항 없이 아래로 추락하는 에블린은 다가올 죽음을 예상한 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래도 구하러 와 줬구나.’
떨어지기 직전, 뛰어와 손을 내밀었던 체이서의 다급한 표정에 숨이 턱 막히며 가슴을 옥죄였다.
평소답지 않게 적나라하게 드러난 다급한 표정에 힘껏 뻗은 손.
마치 그날 밤, 에블린을 살려 주었을 때를 보는 것만 같았다.
그와 동시에 에블린은 깨달았다.
손을 붙잡지 못했음에도 후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 이유를.
‘아, 나는 살고자 원했으면서 마음 한편으로는 죽음을 바라고 있었구나.’
아직도 죽음의 끈을 놓지 못했다는 스스로가 너무도 어이없어 에블린은 허공에 헛웃음을 흘려 버렸다.
업보란 것이 정말 있나 보다.
무사히 빠져나왔음에도 결국 이렇게 자살하려고 했던 방법과 똑같은 방법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니.
에블린은 그저 웃었다. 그리고 그대로 바람에 제 몸을 맡겼다.
‘적어도 전염병 치료제가 완성되는 것 보고 싶었는데.’
그저 아쉬운 점을 마음속에 품으며, 체이서가 뒷일을 성공시켜 주길 바라며 그렇게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데.
‘으응?’
무언가 이상했다.
어느 순간부터 귓가를 때리는 바람 소리가 들려오지 않고, 몸이 아래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추락이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벌써 죽은 걸까?’
너무 큰 충격에 고통을 이겨 내지 못하고 곧바로 죽은 것은 아닐까.
여러 의문 속에서 에블린은 두려운 마음으로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보인 것은 별이 흐르고 있는 이름다운 밤하늘이었다.
야속한 달은 구름 뒤에 숨어 제 자취를 감추었으나, 밤하늘에 빼곡히 찬 별빛은 아직 에블린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려주듯 환히 제 몸을 빛내고 있었다.
문득 에블린은 아래를 내려다보고 싶어져 고개를 돌려 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낭떠러지가 보였고, 이내 자신이 허공에 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살았나?’
그제야 숨통이 트이기라도 한 듯 에블린은 머리가 맑아지기 시작했다.
‘아직 죽지 않았구나.’
묘한 아쉬움이 사라지자 갑자기 덜컥하고 겁이 났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다시 밀려오며 동시에 조금 전에 했던 생각들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아 버리는 것 또한 함께였다.
에블린은 두려움에 온몸을 말고 덜덜 떨다가 시선을 느껴 그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려 보았다.
그리고 벼랑 끝에서 저를 빤히 보고 있는 체이서와 눈이 마주쳤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트렐로니 백작을 금방이라도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트려 버릴 생각인지 그의 뒷덜미를 붙잡은 채 벼랑 끝에 세워 두고서는 가만히 에블린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데몬스가 있었는데 그의 눈이 평소보다 유독 까맣게 빛이 나는 게 보였다.
그가 원을 그리듯 손을 크게 움직이자 에블린의 몸이 둥둥 떠다니면서 천천히 그들에게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데몬스의 능력이구나.’
둥실둥실 떠오른 몸이 천천히 벼랑 안쪽으로 향하자 체이서는 혀를 차면서 트렐로니 백작을 반대쪽으로 내던졌다.
“에블린.”
형편없이 넘어진 그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에블린은 들려오는 목소리에 시선을 움직였다.
체이서가 에블린을 향해 팔을 뻗고 있었다.
이번에는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에블린이 손을 뻗자 그대로 그의 품에 안길 수가 있었다.
익숙한 온기에 에블린은 그제야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어째서 죽고 싶은 마음을 여태 마음에 품고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적어도 체이서가 옆에 있는 이 순간만큼은 죽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놓지 않겠다는 듯 그의 어깨를 꽉 붙들었다.
“이제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