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체이서는 브렌다 자작 부인이 저택에 도착하기 전부터 트렐로니 백작과 바이아르도 백작이 접선한 것을 알았으며, 자작 부인이 외출할 때 심부름꾼을 통해 통신구를 받은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뿐일까, 자작 부인과 바이아르도 백작이 계획을 바꿔 트렐로니 백작과 손을 잡아 에블린을 납치할 것 또한 미리 알고 있었다.
가신들에게 세작을 심어 두었으니 그들의 행동이 모두 체이서에게 보고 되고 있었으며, 또한 타이밍 좋게 트렐로니 백작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마튜디오 백작이 직접 세작 노릇을 하며 가신들의 행태를 전해 왔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언젠가 치려고 했던 이들이다. 에블린이라는 먹이 좋은 미끼가 나타났으니 일을 벌이리라 예상했지.’
하지만 굳이 그런 사실을 심약한 데몬스에게까지 이야기해 줄 필요는 없었다.
‘안 그래도 화가 올라오는데 귀찮게 하기는.’
체이서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냉정히 가라앉히면서 이번에는 진실을 내뱉었다.
“우리가 기사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온전히 가문의 세력만 움직이는 이유는 결혼을 앞둔 에블린에게 괜히 이상한 소문이 붇지 않기 위해 은밀히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야. 심약한 이라 작은 소문에도 벌벌 떠는 가녀린 여인이거든.”
이상하게도 진정하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속에서부터 다시금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분명 이러한 일이 벌어질 것을 어느 정도 예상하였기에 일부러 자리를 비워 이 상황을 유도하였다.
그런데 무언가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같이 가슴이 갑갑했다.
‘지금도 이 상황에서 에블린은 겁에 떨고 있겠지.’
가만히 서 있던 체이서는 에블린을 떠올렸다.
에블린은 최대한 이성적으로 파악하려고 노력하겠지만 결국엔 두려움에 눈물을 보이고 말 것이다.
그녀가 겁을 먹으면 어떻게 변하는지 직접 목도하였기에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예상이 되었다.
아, 어째서 기분이 나쁜지 알 것 같았다.
‘다른 녀석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얼굴을 보인다 생각하니 열불이 끓는구나.’
붉어진 얼굴로 애처롭게 한 방울씩 뚝뚝 눈물을 흘리는 외모에 평범한 사내들이라면 모두 홀린 듯 바라볼 터.
에블린을 향해 볼을 붉힐 이들의 눈을 그대로 불에 짓이겨 놓고 싶다고 생각하던 체이서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하나하나 설명해 줄 시간에 조금이라도 빨리 움직인다면 에블린이 흘릴 눈물의 양이 조금이나마 줄어들 텐데.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를 납치하여 가둔 이들에게 굉장히 분노하고 있고, 이 화를 네게 풀고 싶지 않구나. 그러니…….”
“입 다물고 조용히 따라가겠습니다.”
데몬스는 체이서가 말을 다 잇기도 전에 겁에 질린 얼굴로 빠르게 답변하였다.
체이서가 데몬스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앞장서서 나가자 그제야 그가 속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가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블러드윈이 고개를 내젓고서는 위로하듯 데몬스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려 주고서는 체이서의 뒤를 따랐다.
데몬스는 여전히 겁에 질린 얼굴로 격차가 아득한 두 형제의 등을 경외심을 담아 바라보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으시니 훌륭하시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지금껏 형제들의 말에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살아왔건만 이상하게도.
‘조금 전의 말에서 흔들림이 보였다.’
데몬스는 허튼 생각이라는 양 고개를 휙휙 내저었다.
그리고서는 벌써 저만치 멀어진 두 형제를 향해 뛰어갔다.
에블린 바이아르도, 자꾸만 그녀를 떠올릴수록 정원에서 만났을 때 가까이서 풍기던 푸릇한 여름의 향내가 떠나지를 않았다.
쿠키를 내주면서 보여 주었던 미소가 이대로 사라지리라 생각하니 가슴이 쿵 무겁게 가라앉는 것 같았다.
데몬스는 이것이 두 형제가 계획한 일이든, 혹은 예상치 못했던 일이든 가녀리지만, 미소가 아름다운 형수님을 구하고 싶어졌다.
처음으로 제게 진심으로 웃어 준 그 따사로운 눈빛을 다시금 보고 싶었기에.
***
겨울이 끝나가고 있다지만 여전히 기온은 낮았으며, 저녁 바람은 매서웠다.
에블린은 거센 바람에 라사냐를 만나러 갈 뻔한 위기를 몇 번이나 이겨 내고서야 무사히 절벽을 건너 평지에 발을 딛을 수 있었다.
‘여기는 어디일까.’
얼마나 오랜 시간을 절벽에 딱 달라붙어 움직였는지 모르겠다.
에블린은 안도와 해방감에 눈시울을 적셨고, 동굴에서 빠져나와 절벽을 무사히 돌파했다는 사실에 스스로가 대견했다.
하지만 동굴을 빠져나온 것이 이제 시작이라는 듯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건 저문 해와, 어둠에 물든 깊은 산속이었다.
에블린은 제가 뛰어내린 절벽과 자신의 앞에 도사리고 있는 새까맣게 물든 산속을 번갈아들여다 보았다.
‘선택지가 없구나.’
어차피 이곳에 가만히 앉아서 구조를 기다린다고 한들 감시하던 기사들이 절벽을 타고 빠르게 추적해 올지 모른다.
아니면 트렐로니 백작에게 보고하여 그의 수하들이 산속을 뒤집어 어떻게든 에블린을 찾아낼 수도 있다.
이러나저러나 가만히 있으면 기다리는 건 죽음뿐이다.
이곳이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제일 가까운 마을을 찾아서 수도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게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옳은 방법이었다.
‘체이서가 구해 주러 오면 정말 좋겠지만…….’
에블린은 작게나마 품은 기대를 품다가 마치 누군가에게 그 마음을 들키기라도 할까 봐 재빨리 고개를 털어 냈다.
‘스스로 어떻게든 빠져나가야 해.’
에블린은 추위에 떨리는 어깨를 움츠리고서는 어두컴컴하게 물든 산속을 쳐다보았다.
“이쪽에 길이 있다!”
그러다가 저 멀리서 웅웅 울려오는 노기 띤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다 입술을 앙다물었다.
‘괜찮아, 난 괜찮을 거야.’
하나도 무섭지 않다고, 그냥 평상시 수도원에서 머물 때처럼 산속을 산책하는 것이라고.
문득 체이서가 보고 싶었지만, 에블린은 슬픈 얼굴로 다시금 그런 마음을 접었다.
괜찮다고 속삭이며,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 그녀는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없군.”
체이서는 텅 빈 동굴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동굴 안을 살펴보았다.
“트렐로니 백작이 사냥꾼의 오두막에서도 철수했습니다. 아무래도 눈치를 채고 도망친 모양입니다.”
미리 주변을 살피고 있던 마튜디오 백작이 조심스럽게 현 상황을 보고 했다.
“트렐로니 백작은 서신의 내용을 보고 격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고, 잠시 후 쩌렁쩌렁 비명을 지르더니 기사들을 소집시킨 걸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변명은 짧고 단순했다.
마튜디오 백작은 트렐로니 백작의 병력이 모였으니 한 번에 치기 좋다고 생각하였고, 곧바로 근처로 접근하던 체이서를 데리러 간 것.
하지만 마튜디오 백작이 오판한 게 있더라면 그 짧은 사이에 트렐로니 백작과 그의 기사들이 모두 이 거점을 두고 떠났다는 것이다.
“……에블린은?”
하지만 남아 있던 보초가 확인하였을 때 그들은 에블린을 끌고 가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렇기에 우선 에블린을 구출하고, 트렐로니 백작을 손수 잡아 주려고 했던 계획이 첫 장부터 어긋나 버렸다.
“죄송합니다, 소가주님. 트렐로니 백작이 접근을 불가시켜 확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듣기로는 그가 능력을 써서 속박해 두었다 들었습니다.”
체이서는 서늘한 눈으로 천천히 동굴을 둘러보다 커다란 바위 뒤에서 바람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찾아냈다.
밤이다 보니 동굴의 끝은 어두워 보이지 않았지만, 보아하니 사람 한 명 정도는 충분히 지나갈 만한 공간이었다.
만약 낮이었더라면 끝에 있는 작은 빛은 앞을 안내해 주기에 충분한 길잡이가 되어 주지 않았을까?
“이 동굴 뒤에 뭐가 있지?”
“산세가 깊고 험하여 절벽이 주로 자리 잡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웬만한 약초꾼이 아닌 이상 잘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다더군요.”
체이서는 빤히 그곳을 노려보다가 멍청이 서 있는 기사들에게 명했다.
“이 절벽의 반대편과 연결된 산길을 찾아라.”
“하지만 소가주님, 이곳은 너무 통로가 좁아 여러 명이 이동하기가 어렵습니다.”
눈치를 보던 마튜디오 백작이 입을 열었다가 그의 매서운 눈빛에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체이서는 한심한 것을 보듯 백작을 깔보는 눈빛으로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에블린이 이곳으로 도망갔고,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트렐로니 백작이 화가 나서 그녀를 쫓기 위해 산에 기사를 풀었을 거다.”
“예?”
마튜디오 백작과 기사들은 말이 안 된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트렐로니 백작이 가신들 사이에서 가장 입김이 강했던 이유는 그가 꽤나 강한 이능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인데 평범한 여인이 그걸 풀 방도가 없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런 줄 알지, 왜 자꾸 의문을 가질까.”
가만히 지켜보던 블러드윈이 나서자 마튜디오 백작이 정신을 차리고서는 알겠다며 힘차게 대답했다.
“잘 들어라, 트렐로니 백작보다 우리가 먼저 에블린을 찾아야 한다.”
체이서는 짧게 명령하고서 몸을 돌리려다가 발을 멈추고서는 잠시 고민하더니 덧붙이듯 말을 이었다.
“이제 갓 20살,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여인이다. 명문 깊은 바이아르도 백작가의 영애고, 곧 루이사 공작 부인이 될 자다. 그러니 다치는 곳 없이 무사히 구출한다.”
“예, 알겠습니다!”
체이서는 힘차게 답하는 이들을 보다가 조그만 통로를 내려다보았다.
‘왜 도망갔을까.’
몸도 약해, 체력도 약해, 그렇다고 위기를 헤쳐 나갈 능력을 지닌 것도 아닌 에블린이 어째서 가만히 앉아서 구출을 기다리지 않고 혼자서 탈출을 감행한 것일까.
트렐로니 백작의 뜻대로 해 주고 싶지 않아서?
아니면 제 언니로 인해 루이사 공작가에 폐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 이상 짐이 되고 싶지 않아서?
그것도 아니면 자신을 못 믿어서?
여러 갈래로 치솟던 생각은 이곳으로 오는 내내 가슴 속을 가득 채웠던 의미 모를 화를 더욱 키워 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