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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45)화 (45/159)

 45화

체이서를 믿는 것과 별개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어렴풋이 알고 있기에 자신을 선택하지 않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적이 많다는 뜻이 내부에도 많다는 뜻이라는 걸 빨리 눈치챘어야 했는데.’

에블린은 평소와 달리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생각이 정리되자 아사블랑에게 맞았던 몸이 뒤늦게서야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다.

‘아사블랑은 죽겠지?’

맞은 건 억울했지만 그녀가 죽기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기에 입맛이 썼다. 

여러 생각이 거칠게 휘몰아치고 나니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와중에 작은 의문도 하나 생겨났다.

‘분명 백작 말로는 눈이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야 하는데…….’

어째서 멀쩡히 앞이 보이고, 소리가 들리는 걸까.

‘혹시 백작의 능력이 약해서 서서히 풀리는 걸까?’

그렇다면 손과 발도 풀려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이 의문 또한 오래가지 않았다.

‘어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과 발을 움직여 보았더니 속박하던 것이 모두 사라진 상태이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능력 부족이었나.’

에블린은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서는 소리가 나지 않게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두운 동굴, 바람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 보니 얕은 동굴은 아닌 것 같고…….’

주변을 살금살금 둘러보던 에블린은 곧 어디선가 희미하게 바람 소리가 들려온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기사들이 호위를 서고 있는 쪽을 다시 한번 살피고서는 살금살금 발을 옮겼다.

아니나 다를까, 거대한 바위가 가리고 있는 동굴 벽 한쪽에 기어가면 사람 한 명이 지나갈 수 있을 법한 작은 통로가 나 있었다.

저 멀리 희미한 빛이 보이는 것이 동굴과 다른 곳으로 연결된 곳 같았는데, 그곳에서 희미하게나마 바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에블린은 다시금 뒤를 살펴보고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대로 가만히 있는 것 보다는 차라리 도망가는 게 나을 것 같지?’

그래, 도움이 되지는 못할망정 짐이 되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언제 백작이 돌아올지도 모르고, 다시 그가 돌아올 때면 나는 죽을지도 몰라. 그래, 차라리 있는 힘껏 발버둥 쳐 보자.’

그렇다면 어떻게든 살 방도가 나올지 누가 알겠는가.

에블린은 짧은 고민을 끝내고선 허리를 숙여 어둑한 구멍 안으로 들어섰다.

***

허락되지 않는 이가 들어올 수 없는 루이사 공작저의 별관.

체이서는 별관 안에 있는 화려한 침실 안으로 들어오더니 시린 눈빛으로 방을 살펴보았다.

지독한 약초 향이 가득 퍼진 병자의 방은 예전과 달리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 방의 주인인 현 루이사 가주는 언제나 가신들을 믿으라 하였다.

그들은 영혼을 걸고 루이사에게 충성한 이들이니 절대로 배신하지 않고 충성스러울 것이라며.

체이서는 침대를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이내 짧게 코웃음을 쳤다.

“하.”

루이사 현 가주의 말은 틀렸다.

가신들은 루이사 공작이 직접 임명한 후계자의 의견에 반발하였고, 명령에 불복하였으며, 루이사에서 정한 미래의 공작 부인을 납치한 것도 모자라 그들이 원하는 이를 공작 부인의 자리에 앉히라며 협박까지 서슴지 않는 행동을 보였다.

공작이 다시 눈을 뜰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의사의 소견이 적힌 진단서가 가신들에게 향한 지 고작 반년도 채 되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내가 많이 우습게 보인 모양입니다.”

하하, 짧은 웃음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 퍼졌다.

현 가주가 믿고 있던 충신들은 가주의 병이 완치가 어렵다는 판정을 받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가신들끼리 똘똘 뭉쳐 루이사에 손을 뻗기 시작했다.

현 가주와 달리 젊은 소가주는 어떻게든 주무를 수 있다고 여겼던 걸까?

루이사의 내정에 간섭하려 드는 건방진 작태를 지금껏 웃으며 지켜봐 주었으나 이번에는 그들이 선을 넘고 말았다.

“제가 유한 이로 보인다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아무래도 가주보다는 한참 부족한 모양입니다.”

체이서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더니 침대를 벗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어두운 암막 커튼을 거두자 어두운 흑색으로 칠해진 마차 한 대가 공작가의 정문을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뭐, 그들의 우두머리가 누구인지 뻔히 알고 있는 상황에서 가만히 있기도 우습고.”

트렐로니 백작에게 전달할 서신을 품은 마차는 유유히 정문을 빠져나가더니 수도 외곽으로 향하는 길에 올랐다.

“결혼식 전에 피를 보고 싶지 않았건만 성질이 급해도 단단히 급한 놈들이더군요. 덕분에 꽤 귀찮아졌습니다.”

그리 말을 하던 체이서가 잠시 말을 멈추더니 피식 웃었다.

현 가주는 억지로 가신들의 목숨줄을 휘어잡았고, 그들은 충성심 대신 복수심에 이를 갈며 때를 노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다음 후계자를 어떻게든 손에 넣어 권력을 휘두르기 위해 이 난리를 떠는 것이겠지.

“잘못된 관례가 오랜 시간 이어져 오니 충신들은 모두 떠나고 욕심쟁이들만 그 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아무런 답이 돌아오지 않음에도 체이서는 조곤조곤 제 이야기를 남겼다.

“아, 물론 저 또한 욕심쟁이입니다. 가주의 자리를 얻게 되는 날, 나를 이 자리까지 올라오게 만든 이들을 모두 죽이고자 이렇게 버티고 있으니 말입니다.”

창문 너머에서 들어오는 노을빛이 내려앉은 얼굴은 꼭 고해성사를 듣는 신부와도 같은 성스러움이 맴돌았으나, 그는 신부에게 고해성사하는 악마에 더 어울리는 사내였다.

“그래서 트렐로니 백작이 이리 급히 나선 걸지도 모르겠군요. 어린 시절 우리를 그리 괴롭혔으니 가장 먼저 죽음을 맞이할 사람은 당연히 자신인 걸 알았나 봅니다. 똑똑하기도 하지.”

체이서는 커튼을 치고서는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그래도 너무 화를 내지 마십시오. 이리 자라도록 한 것은 당신이니.”

그는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약초 향이 가득 퍼진 방을 나섰다.

“언제 맡아도 기분 나쁜 향이야.”

의복에 묻은 향을 조금이라도 떨치기 위해 툭툭 털어 내는데 방문 앞에서 체이서를 기다리고 있던 블러드윈이 웃는 얼굴로 다녀왔다.

“고해성사 끝났으면 이만 가자. 이러다 정말 형수님 죽을라.”

그는 언제나처럼 웃고 있었지만, 이 사태가 일어난 것이 불만임을 숨기지 않으려는지 꽤나 화를 참는 눈빛이었다.

그에 옆에 있던 데몬스가 기다렸다는 듯 현 상황을 입에 담았다.

“바이아르도 영애의 납치 사건의 경위는 트렐로니 백작이 바이아르도 백작을 통하여 브렌다 자작 부인과 연결한 것으로 보입니다. 두 사람은 보육원 방문 후 레스토랑에서 식사한 뒤, 같은 마차를 타고 함께 성문을 빠져나갔다는 목격이 있습니다. 마부와 호위 기사 둘은 모두 살해당한 채 빈민가 구석진 곳에서 발견된 것을 보아 마차 통째로 납치된 것으로 확인됩니다.”

체이서는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데몬스를 향해 더 보고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또한 브렌다 자작 부인은 수도를 벗어난 외진 길에서 산적에게 습격당했으며, 얼마 도망가지 못해…….”

“데몬스, 제일 중요한 것을 먼저 읊어 줘야지.”

열심히 상황 보고하던 데몬스는 갑작스러운 체이서의 지적에 황급히 말을 돌렸다.

“현재 바이아르도 영애가 납치된 지 하루가 지났습니다. 뒤를 밟은 마튜디오 백작의 말에 의하면 영애의 목숨은 무사하나 오늘 가신들의 조건을 거절한 서신이 백작에게 닿게 된다면 목숨을 위협당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에 다시금 체이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로서도, 신사로서도 부족한 놈들이구나. 죄 없고 여린 이를 납치하여 인질로 삼다니 말이야.”

평상시와 같은 덤덤한 어조로 말을 꺼냈으나 그 속에 서린 분노를 읽은 데몬스가 나올 것 같은 딸꾹질을 참기 위해 입을 틀어막았다.

“우리 가신들께서 꽤나 마음이 급했나 봐. 이리 서두를 것 없었는데. 아, 트렐로니 백작이 급했던 건가?”

맞장구를 쳐 주던 블러드윈이 진심으로 그들을 비웃듯 키득 소리를 내며 웃었다.

“어린 시절을 오랫동안 함께 보내서 그런가?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아는 것도 참 피곤하단 말이야.”

그의 말에 체이서가 아득한 과거를 떠올리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초대의 루이사와 그의 가신들은 분명 뜻을 하나로 모아 루이사의 발전을 위해 함께해 왔을 것이다.

하지만 뜻은 변질하여 불쌍한 희생자들을 만들어 왔고, 그 과정에서 물이 너무도 고여 썩었을 뿐인 그런 상황이었다.

전 가주에게 데일 대로 데인 가신들은 다음 후계자 후보인 체이서와 블러드윈을 제 입맛대로 길들이려다 실패하였고,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의 증오를 샀다.

뒤늦게 입적된 데몬스를 그들의 입맛대로 가꾸고 가주 자리에 앉히려고 노력했지만, 장남과 차남과 비교하면 삼남은 자존감이 낮았고, 감히 손위 형제들에게 도전할 생각 또한 하지 못하는 자였다.

체이서는 조용히 칼날을 갈아 오며 자랐다. 그리고 가신들의 성급한 움직임에 예정보다 빨리 칼날을 뽑게 되었을 뿐이었다.

여유롭게 목적지로 향하는 두 사람을 겁에 질린 눈빛으로 보던 데몬스가 용기 내어 물었다.

“두 분은 이 상황이 놀랍지 않으셨습니까?”

“놀랐지.”

블러드윈이 곧바로 대답해 주었으나 데몬스는 믿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제가 보기엔 꼭 두 분께서는 형수님께 이러한 상황이 일어나리라 예상했던 것…….”

데몬스는 말을 채 다 잇기도 전에 제게 닿는 서늘한 시선에 입을 다물었다.

살기 어린 금빛 눈동자가 마치 그를 갈기갈기 찢어 버릴 양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그가 겁에 질려 턱을 덜덜 떨며 고개를 숙이자 익숙한 커다란 손이 그의 어깨를 짚었다.

“데몬스, 우리는 불충한 가신들이 움직일 것은 예상하였지만 그게 지금이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하물며 에블린을 인질로 삼고 당당히 협박하는 것 또한 상상하지 못했지.”

체이서는 데몬스의 걱정과 고민을 덜어 주기 위해 답지 않게 다정하게 속삭였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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