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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44)화 (44/159)

 44화

‘어째서 저자가 여기에 있는 거지?’

시험에 깊숙이 관여할 정도라면 분명 루이사를 따르는 가신이라는 뜻일 텐데 어째서 자신을 납치한 것일까.

에블린의 눈동자가 잘게 떨리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내가 큭큭 소리를 내며 사악하게 웃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어째서 저를 이리 납치한 거죠?”

“이런 상황 속에서 꽤나 침착해 보이는군요. 반갑습니다, 영애. 이 몸 트렐로니 백작이라고 합니다.”

에블린이 아픔에 눈을 찡그리다 말고 그의 소개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트렐로니 백작이라면 루이사 공작가의 가신이잖아?’

루이사 공작가를 보필하는 많은 가신 중 대표인 트렐로니 백작이 어째서 영지에 있지 않고 수도까지 올라와 이런 짓을 벌이는 건지 감히 짐작도 가지 않았다.

과거에도 본 적이 있는 얼굴이기에 그가 자신의 신분을 두고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은 확실했다.

에블린은 함부로 추측하지 않고, 침착히 물었다.

“트렐로니 백작이라면 루이사 공작가의 가신 아닙니까. 도대체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고 계신 건가요?”

몸을 제대로 가누지는 못했지만, 에블린은 트렐로니 백작이 있는 곳을 향해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물었다.

백작은 예의를 갖춘 척 진중히 답해 주었지만, 에블린이 여전히 앞이 보이지 않는다 생각하는지 비아냥이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별것 없습니다. 체이서 공자께서 자꾸만 결혼식 후 곧바로 공작위를 이어받겠다 통보하는 불효를 저지르니 그것을 막기 위해서지요. 공작님께서 병상 중에 있다지만 아직 멀쩡히 살아 계신데 어불성설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가신 된 도리로서 불효를 저지르지 않게 이리 도움을 드렸지요.”

평정을 갖추던 목소리가 끝으로 갈수록 점점 높아져 갔다.

에블린이 무어라 더 물으려다 홀로 열받은 백작이 쉬지 않고 입을 놀리는 것에 잠자코 그의 말을 들어 보았다.

“어디서 먹다 굴러온지도 모를 천한 놈들이 공작위를 잇는다고 제가 뭐라도 된 것인 양 구는 게 어찌나 어이가 없는지 아십니까? 가신들의 뜻을 무시한 채 제멋대로 안주인을 결정하고, 공작위를 계승받겠노라고 통보하면 뭐든 뜻대로 다 되리라 생각한 그 녀석의 오만함이 영애를 이러한 상황에 휘말리게 한 것입니다!”

점점 높아지던 언성은 분노로 끝을 맺었으나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는지 백작은 씩씩거리는 거친 숨을 고르며 에블린을 노려보았다.

“제가 탐탁지 않았더라면 이런 방법 대신 좀 더 옳은 방향으로 소공작님을 설득하셨으면 될 일이었을 텐데요. 이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지 않습니까.”

겁에 질린 모습을 감추기 위해 애써 힘을 주어 말을 꺼냈으나 목소리의 끝이 떨리는 것까지는 감추지 못했다.

“아무리 소공작이라고 한들 결혼하지 않은 이상 공작위에 오를 수 없지요. 사랑에 빠진 여인이 갑자기 실종되어 버리면 제멋대로 굴던 그 버릇이 조금이라도 잠잠해지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그 틈을 노릴 생각입니다.”

겁을 먹은 듯 에블린이 눈에 띄게 몸이 움츠러들자 그제야 그가 기분 좋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앞도 보이지 않고 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여인에게 내가 너무 박하게 굴었군. 그래, 이토록 별것 없는 계집을 부인으로 맞아들이겠다고 한 이유가 뭘까. 아무리 생각해도 외모 외에는 별것 없어 보이건만.”

백작이 다 들리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에블린의 턱을 거칠게 부여잡고선 그녀의 얼굴을 천천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어쩐지 낯이 익은 얼굴인데. 혹시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습니까, 영애?”

에블린이 답하지 않자 그가 괜한 것을 물었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아무렴, 시골의 촌뜨기 따위가 나를 봤을 리가 없겠지.”

백작은 코웃음을 치고서는 그제야 에블린을 놔주었다.

“나를 죽이실 겁니까?”

“소공작께서 결혼에 대한 의사를 거두지 않으면 그럴 겁니다. 사랑하는 여인을 지키고 싶다면 그 고집도 조금이나마 꺾이고, 충신들의 말을 귀담아 주시겠죠.”

‘거짓말이구나.’

살려 줄 생각이었더라면 제 앞에서 괜한 소리는 지껄이지 않았을 것이다.

적당히 인질로 삼다가 죽여 버릴 생각이 분명해 보였다.

힘없이 고개를 떨구는 에블린의 모습을 양껏 비웃은 백작은 멀리 떨어져서 숨죽이며 이 장면을 지켜보는 아사블랑에게 말을 걸었다.

“덕분에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브렌다 자작부인.”

“아, 아닙니다. 도움을 드릴 수 있게 되어 기뻤습니다. 그보다 저는 이제 돌아가도 괜찮을까요? 집에 있을 남편이 걱정되어서…….”

말을 이어 갈수록 아사블랑의 안색이 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의 광경을 보고 나서야 단신으로 서슬 퍼런 권력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 것을 깨달은 듯한 모습이었다.

“아무렴요. 도움을 받았으니 무사히 돌려보내 드려야죠. 동생분도 걱정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소공작과 타협이 된다면 무사히 내보낼 것이니.”

백작은 에블린의 곁에 서 있던 두 명의 기사에게 눈짓을 보냈다.

“정중히 모시거라.”

아사블랑이 두려움에 찬 얼굴로 기사들의 뒤를 따라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며 에블린을 쳐다보는 것이 괜한 일에 끼었다는 후회감이 옅보이기도 했다.

확실한 건 에블린에 대한 미안함은 보이지 않았다.

아사블랑이 온전히 몸을 감추자마자 백작은 짧게 경고했다.

“마차에 태워 보낸 뒤 적당히 사고로 위장해라.”

“예, 알겠습니다.”

에블린의 머리칼을 붙잡고 있던 기사마저 이곳을 나서자 동굴로 보이는 낯선 이곳에는 에블린과 백작만이 남았다.

“얌전히 인질의 노릇을 해 준다면 살려보내 줄 터이니 말썽 피우지 말고 있게. 도망치려고 해도 몸이 움직이지 않을 것이며, 앞에는 기사들도 지킬 터. 도망은 불가능할 테니.”

어느새 편히 말을 놓은 백작의 거만한 모습에도 에블린이 그의 심기를 거슬리지 않기 위해 정중히 말했다.

“도망치지 않을게요. 그러니 적어도 안대라도 풀어 주시면 안 될까요? 앞이 보이지 않아 너무 무서워서 그러니…….”

에블린이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간절히 애원하자 그의 입가가 기분 좋게 상승하는 것이 보였다.

“그건 불가하다. 애당초, 네 눈을 가린 건 안대가 아니기 때문이지.”

아사블랑과 똑같은 말을 내뱉은 백작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오더니 허리를 숙여 에블린의 귀를 톡톡 하고 두드렸다.

백작의 눈이 기묘하게 빛나더니 갑자기 들려오던 모든 소음이 사라졌다.

세상이 멈춰 버린 것 같은 이 순간, 백작은 입을 놀리며 무어라 지껄이기 시작했다.

입 모양이라도 읽기 위해 눈살을 찌푸리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작 안대 따위가 아닌 나의 이능력이다. 신체의 기능을 멈출 수 있는 아주 무섭고 위대한 능력이지. 뭐, 이제 들리지는 않겠다만.”

백작은 숙였던 허리를 세워 경멸에 찬 시선을 거두었다. 마치 에블린에 대한 본론은 여기까지라는 듯 가차 없이.

“현 가주께서 체이서 그놈을 소가주로 임명하는 잘못된 선택을 하셨으니 충신인 이 몸이 바로 잡아 드려야지. 암, 어딜 보아도 이런 충신은 없다. 말을 잘 듣는 데몬스 놈이 다음 가주가 되면 참 좋을 텐데, 끌끌끌.”

백작은 혀를 차고는 들어왔던 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제 막 소가주에게 서신이 전해졌겠군. 나는 장소를 옮겨 답을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너희는 저 계집을 무사히 잘 데리고 있어야 한다. 눈과 귀를 봉했고, 손과 발이 묶여 도망치지 못할 테지만 두려움에 미쳐 자살할 수도 있으니 주기적으로 잘 살펴보도록.” 

“명 받듭니다!”

두 명의 기사가 큰 목소리로 대답하자 동굴이 가볍게 울렸다.

백작은 만족한 듯 이내 사라졌고, 기사들은 에블린을 감시하기 위해 저 멀리 보이는 통로 입구에 남았다.

‘아무리 봐도 여기는 동굴이지?’

그렇다면 수도와 멀리 떨어진 외딴곳으로 납치를 해 왔을 것이다. 도움을 바라기 어려운 장소임을 확인하니 절로 탄식이 나왔다.

에블린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서는 그들과 자신의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 예상해 보았다.

다행히도 그들은 에블린이 무얼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꽤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천천히 정리해 보자.’

에블린은 몸을 꾸물꾸물 움직여 보이는 돌벽 뒤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트렐로니 백작은 체이서가 단독으로 내린 이 결혼이 마음에 안 들어서 바이아르도 백작가와 연락해 나를 납치한 것 같은데…….’

분명 바이아르도 백작은 처음부터 이럴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분명 루이사 공작가에 빌붙어 이리저리 돈을 뜯어낼 생각이었겠지.

다만 에블린이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이자 마음을 바꿔 이 납치극에 동참했을 것이다.

‘고작 하룻밤 만에 이리 해낸 것도 대단하다. 돈으로 회유하기라도 한 걸까?’

아니, 아사블랑의 도움이 있어 납치가 쉬워졌을 뿐이지, 트렐로니 백작은 바이아르도 백작에게 손을 내밀기 전부터 자신을 납치하고 협박할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그동안 참고 참던 것이 이번 결혼과 공작위 계승으로 인해 터져 버렸고, 전부터 체이서에게 불만이 있던 가신들과 뜻을 모아 이러한 일을 벌였다면 어느 정도 납득은 되었다.

‘문제는 체이서가 어떻게 나올지가 관건이라는 건데……. 과연 나를 구하러 올까?’

계약 결혼, 항체 등 여러 관계가 얽혀 있다지만 냉정히 말하자면 결혼 상대는 얼마든지 다시 찾을 수 있고, 항체는 미리 채혈해 놓은 피로 어떻게든 연구를 이어 갈 수 있다.

‘체이서는 가신들의 의견을 따라 줄 생각이 없을 거야. 보아하니 처음부터 그런 것 같으니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겠지.’

에블린을 대체할 방법은 많았기에 굳이 가신들의 뜻에 휘둘려 줄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이르자 눈앞이 막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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