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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43)화 (43/159)

 43화

“으으음…….”

에블린은 머리에서 느껴지는 두통에 고통을 호소하며 천천히 눈을 떴다.

앞이 보이지 않아 몇 번 눈을 깜빡여 보았지만, 시야를 온전히 차단한 새카만 암흑은 사라지지 않았다.

서서히 의식이 깨어나자 그제야 이질적인 무언가가 눈가를 감싸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잠에서 깨어나 서서히 정신이 들었는지 눈가를 감싼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안대로 눈을 가렸는지 앞도 보이지 않았고, 손과 발도 꽁꽁 묶인 채 차가운 바닥에 쓰러진 상태였다.

‘여기는 어디지?’

멀리서 웅웅 거리며 울리는 바람 소리가 들려왔고, 바닥은 흙냄새가 나지 않았고, 돌이 넓게 깔린 듯 흙바닥보다 딱딱하였다.

‘여기는 어디지? 설마 납치당한 건가?’

인지함과 동시에 쓰러지기 직전 갑자기 아사블랑이 했던 짓이 떠올랐다.

‘하지만 마차를 호위하는 기사들도 있었는데 어떻게?’

아무래도 이곳은 밖인 모양인지 실내보다 서늘한 기운이 가득하여 몸이 찬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달달 떨기 시작했다.

‘약까지 준비한 걸 보면 사전에 계획했던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부터 이럴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단 말이지. 내 축객령에 화가 나서 저지른 일이라 해도 혼자서 해결할 만한 일은 아니고. 그렇다면 찬슬러가 도와준 걸까?’

앞이라도 보였다면 이곳이 어딘지 짐작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이래서야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차라리 체이서에게 부탁할 걸 그랬나 봐.’

바쁜 체이서에게 짐을 얹혀 주기 싫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 알았더라면 절대로 자신만만하게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한심한 속에서 피어난 무기력감이 에블린을 감싸며 뒤늦은 후회를 불러왔다.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았던 것도 너무 커다란 욕심이었을까?

에블린은 밀려오는 추위와 서러움에 몸을 웅크렸다. 할 수 있는 게 이런 것밖에 없었다.

‘적어도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만 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이런 부질없는 생각을 하던 도중, 조용한 이곳에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머, 일어났니?”

아사블랑의 목소리였다.

에블린이 몸을 치켜세우며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들자 비웃음이 가득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 비루한 꼴을 좀 보라지. 내 동생의 이름을 훔친 채 화려한 공작저에서 지내니 네가 뭐라도 된 줄 알았지? 내가 그 꼴을 가만히 보고 있을 줄 아니.”

“……언니?”

아사블랑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에블린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녀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함부로 언니라고 부르지 마! 나는 너 같은 동생 둔 적 없으니까!”

“우리 아무래도 대화가 필요한 것 같아요. 안대 좀 풀어 주시면 안 될까요?”

흥, 하며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대가 씌어져 있다면 벗겨 줬겠지. 애석하게도 네 눈을 가린 건 안대가 아니라 이능력이라서 내가 어찌해 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구나.”

이능력?

아사블랑이 속한 브렌다 자작가나 찬슬러가 있는 바이아르도 백작가는 이능력자를 고용할 돈이 마땅치 않았을 텐데 어떻게 이능력자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걸까.

불리한 상황이지만 에블린은 마음을 침착하게 다잡고선 그녀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입을 열었다.

“언니는 제가 진짜 에블린인지 의심이 되는 거죠? 그럴 법도 해요. 7살 생일에 실종된 아이가 10년이 훌쩍 지나서 멀쩡히 나타났으니까요.”

“하! 말은 잘하는구나.”

비아냥이 가득한 반응에도 에블린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에블린은 부디 아사블랑이 흔들리기를 바라며 기억을 더듬어 누구에게도 보여 준 적 없는 과거 기억의 파편을 꺼내었다.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하는 게 좋을까요. 으음, 저는 늦둥이로 태어나서 가족들의 사랑을 참 많이 받았다는 걸 기억해요. 몸이 약하니 모두가 아껴 주었죠.”

“우리 영지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진부한 이야기를 하려나 보구나.”

무례한 태도에도 에블린은 화내지 않고 차분히 답을 이어 갔다. 

“우리 집안은 겉으로 보기에는 부유했지만 속은 썩어들어 가고 있었죠. 어린 나이임에도 우리 집안이 얼마나 엉망인지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어요. 아버지는 도박병, 어머니는 불륜, 오라버니는 사업에 미쳐 있었고, 언니는…….”

에블린은 아사블랑의 반응이 달갑지 않음을 예상한 듯 머뭇거렸다.

“성인이 되기도 전에 가문을 돕겠다는 이유로 어머니와 함께 집안의 재산을 관리하게 됐죠.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재산을 횡령했었잖아요.”

“너, 너 그걸 어떻게? 아아, 네 남편이 될 사람이 알려 준 거구나. 다 조사한 게지?”

“아니에요. 언니가 신난 얼굴로 제 앞에서 말했잖아요. 덕분에 핑크 다이아몬드가 박힌 목걸이를 샀다 자랑했었죠. 제 선물로 들어온 보석함에 그 목걸이를 넣겠다며 웃었었잖아요. 언니, 저는 다 기억하고 있어요.”

어릴 적 즐거운 추억을 상기하듯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자 아사블랑의 눈매가 더욱 가늘어졌다.

“……너 정말 에블린인 거니?”

“몇 번이고 말했잖아요, 언니. 저는 에블린이에요. 에블린 바이아르도. 7살 생일을 맞이하여 부모님과 함께 소풍하러 갔다가 그 후로 집에 돌아가지 못한 에블린이요.”

놀란 듯한 목소리에 우선 아사블랑을 설득한 기회가 생겼으리라 생각했건만 돌아오는 건 자비 없는 발길질이었다.

“그런데도! 네가 내 진짜 동생임에도! 그리 나를 매몰차게 쫓아내려 했다고! 감히!”

“으윽, 윽!”

앞이 보이지 않은 탓에 발이 어디서 날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몸을 한껏 웅크려 보았으나 거센 화풀이는 한참 동안 이어졌다.

“허억, 헉. 독한 계집애.”

에블린이 비명 한 번 지르지 않고 입술을 깨문 채 꾹 참고 있자 아사블랑은 혼자 지쳐 나가떨어졌다.

“네가 내 동생이었더라면 어째서 언니를 그리 내쫓았던 거야!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유산과 공작가에서 줄 지참금! 내가 원하는 건 딱 그것뿐이었는데 네가 일을 키웠어!”

역시나 이들의 목적은 돈이었다.

에블린은 바로 성급히 답을 던지지 않고 조용히 물었다.

“돈이 필요하셔서 절 이렇게 납치한 거였나요? 돈이 필요하다고 제게 말씀해 주셨더라면 가족으로서 얼마든지 도왔을 거예요.”

왜 미리 말하지 않았느냐는 뜻이 섞인 말에 빠드득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와서 그런 소리를 한들 뭐 하겠니! 이미 벌어진 일을!”

“아니에요, 언니. 늦지 않았어요. 함께 공작저로 돌아가요. 그곳에서 언니의 이야기를 해 주세요. 어려움이 있다면 얼마든지 도울게요. 언니는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잖아요. 저를 많이 예뻐해 주셨잖아요.”

어떻게든 납치범을 설득해 보려 이것저것 말을 붙여 보았으나 돌아오는 답은 짙은 한숨이었다.

“……이미 늦었다고.”

한참 만에 들려온 말은 후회가 섞인 낮은 읊조림이었고, 그에 뒷받침하듯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렴, 그렇지. 미래의 공작 부인을 납치했는데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될 리가 없지.”

가래가 끼기라도 한 듯 거친 목소리는 꽤나 나이가 많은 중년 사내의 목소리였다.

“끌끌, 드디어 깨어나셨구먼. 기다리는 게 어찌나 지루하던지. 자, 어디 어떻게 생긴 얼굴인지 보여 주거라.”

사내가 명을 내리자 어두운 시야 너머로 여러 명의 거침없는 발소리가 에블린을 향해 다가왔다.

버둥거리며 뒤로 벗어나려 했으나 보이지 않는 손들은 에블린의 뒷머리를 거침없이 확 잡아챘다.

조금만 힘을 주면 잡힌 머리칼이 모두 뽑혀 나갈 것 같은 진득한 고통에 에블린은 간신히 고개를 젖히고서는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으윽.”

“어허, 아무리 어디서 굴러온 계집인지 몰라도 미래의 공작 부인이 될 몸이라고 하지 않더냐. 살살 하거라, 살살.”

그 말에 머리칼을 붙잡은 손아귀의 힘이 약하게 풀렸다.

“흐음, 꽤나 반반하게 생긴 게 사교계의 웬만한 여인들보다 아름답구나. 하지만 그 녀석이 고작 미인에게 흔들릴 만한 녀석은 아닐 텐데.”

그 녀석이라면 누구를 말하는 걸까.

도대체 이 사내는 누구고, 또 어떠한 이유로 아사블랑을 도와 자신을 납치한 것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니면 결국 미인에 흔들리는 정도밖에 안 되는 녀석이었나? 공작위에 오르기도 전에 약점을 보이다니. 패배자가 따로 없구먼.”

에블린은 눈앞에서 허튼소리를 지껄이는 목소리의 주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도대체 누구인지, 어째서 이런 일을 벌이는 건지 당장이라도 캐묻고 싶었지만 아무런 힘이 없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상황이 너무도 원통했다.

“아무렴, 패배자를 기다리는 건 비참한 죽음뿐이지.”

‘어?’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려던 그 순간, 낯선 중년의 사내가 중얼거리는 말에 무언가 기시감이 느껴졌다.

에블린은 언젠가 이와 똑같은 말을 꺼냈던 사내를 본 적이 있었다.

‘설마?’

작은 의심이 피어난 순간과 동시에 마치 안개처럼 시야를 가리던 기운이 사라지며 눈앞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너무 깜짝 놀라 눈조차 깜빡이지 못한 채, 에블린은 제 앞에서 흉측하게 울고 있는 사내의 얼굴을 보았다.

‘어떻게…….’

에블린은 이 사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부모에게 팔렸다고 너무 억울해하지 말거라. 인생 역전의 기회가 네 눈앞에 주어진 거니까.”

“음, 눈빛은 좋구나. 명심하렴, 아이야. 패배자를 기다리는 건 비참한 죽음뿐이다.”

그래, 눈앞의 사내는 분명 에블린을 루이사의 시험이 이루어지는 저택까지 안내해 준 그 사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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