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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42)화 (42/159)

 42화

에블린이 괜히 뺨을 매만지며 부끄러워하자 그 모습을 풋풋하게 지켜보던 마야는 두툼한 망토를 입혀 주며 옷시중을 마쳤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보육원에 가서 아이들과 잠깐 인사만 하면 되었지만, 아가씨께서 원하시는 대로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시간을 부탁했습니다. 간식시간과 놀이시간을 따로 빼놓는다더군요.”

“고마워. 아이들이 기뻐하면 좋겠다.”

에블린은 피곤한 기색을 지우고서는 밝게 웃어 보였다.

‘아이들을 제대로 보는 게 얼마 만일까.’

어제까지만 해도 아사블랑을 열심히 일을 시킬 생각만 했었는데 동생들이 세상에서 지워진 뒤 아이들을 접할 일이 없다는 걸 깨닫고 나니 어쩐지 긴장이 되었다.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걸음을 하는데 반대쪽 복도에서 오래간만에 보는 얼굴이 보였다.

“아, 형수님. 오래간만이에요.”

블러드윈이 경쾌한 발걸음으로 단번에 에블린의 앞에 도달했다.

“어, 어. 저택에 계셨어요?”

“저는 어젯밤에 돌아왔어요. 형님은 어제도 못 왔죠? 귀찮게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처리하고 온다던데. 형수님이 많이 서운하겠어요.”

“서운할 게 뭐가 있어요. 일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 챙길까 봐 그게 걱정이죠.”

에블린의 말이 만족스럽다는 듯 그는 싱글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블러드윈 님도 잠은 충분히 주무시면서 일하시는 거죠? 식사도 잘 챙겨 드시고 있고요?”

“저야 언제나 알아서 잘 챙기죠. 그보다 말 편히 하세요. 앞으로 가족이 될 사이인데 이렇게 어렵게 부르실 거예요?”

그 말에 에블린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이상하게도 날 좋게 봐주는 것 같단 말이야.’

가끔 마주칠 때마다 이리 호감 가득한 얼굴로 반겨주는 그의 모습이 퍽 신기했다.

“아직 낯설어서 그러니 조금만 봐주세요. 결혼식 올리고 나면 천천히 연습해 볼게요.”

“좋아, 저랑 약속한 겁니다. 그보다 외출하시려고요?”

블러드윈이 뒤늦게 에블린의 옷차림을 보았는지 궁금한 얼굴로 물어왔다.

“네, 보육원에 잠시 다녀오려고요. 루이사 공작가에서 후원하는 곳인데 아이들의 얼굴도 보고 오면 좋을 것 같아서요.”

“아, 아이들을 좋아하시는구나. 밖을 보니까 마차 앞에 처음 보는 여자도 있던데 그 사람도 함께 가요?”

아사블랑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혹시 언니가 무례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겠지?’

부디 마지막 날까지 패악을 떨치지 않았기를 바라며 에블린은 긴장을 숨기고 말했다.

“네, 제 언니인데 오늘 하루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해서요. 보육원에서 시간을 보내다 밖에서 식사하고 헤어질까 해요.”

“아, 자매였구나. 하나도 안 닮아서 몰랐네요. 조금 더 머무르다 가셔도 될 텐데.”

반갑지 않은 인물의 언급에 에블린은 그저 어색히 웃으며 말을 흘렸다.

난감해하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지켜보던 블러드윈은 여전히 싱글싱글 웃는 낯으로 말했다.

“도움이 필요하세요?”

“네?”

“브렌다 자작 부인이라 했던가. 거슬리는 것 같길래.”

장난스럽게 짓는 웃음에 이상하게도 등골이 오싹하고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왜 그런 감정이 느꼈는지 깨달았다.

‘……언니에 대해서 알고 있으면서 물어본 거였구나.’

에블린은 순간 기묘한 기시감에 입술이 마르는 걸 느꼈다.

‘꼭 체이서를 처음 봤을 때 같네.’

그가 직접 제 신분을 밝힐 때 느꼈던 긴장감이 몸을 타고 흘렀다.

‘이렇게 보면 하나도 안 무서워 보이지만 블러드윈도 루이사니까 당연한 건가…….’

블러드윈의 능력이 무엇인지 자세히 알게 된다면 더 주의할 수 있을까?

‘게임할 때 제일 관심이 없던 캐릭터여서 기억이 안 나네.’

분명한 건 블러드윈은 정신계와 관련된 능력이기에 더더욱 조심할 필요성이 있고,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가족이기는 하지만 언니가 너무 낯설더라고요.”

긴장한 기색을 지우고서는 치부를 들킨 얼굴로 조용히 답하였다.

“걱정시켜 드려서 죄송해요. 하지만 언니는 오늘 떠날 거니까 괜찮답니다.”

에블린의 정중한 거절에 블러드윈은 그렇다면 다행이라면서 환히 웃었다. 절로 긴장감이 풀어질 만큼 화사한 웃음이었다.

하지만 에블린은 긴장을 풀지 않은 채 블러드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고요.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세요. 형수님 부탁이면 들어드릴게요.”

하나, 저 가벼운 미소와 달리 꺼낸 말은 분명 진심이리라.

조금 전 편안하게 해 줬던 분위기가 믿기지 않을 만큼 모골이 송연해졌다.

“물론 저보다 형님께 먼저 말해 주면 더 좋아할 거예요. 솔직히 말하자면 저 사실은 형님이 여자를 데리고 올 줄 몰라서 많이 놀랐었거든요. 일밖에 모르는 무서운 사람인지라.”

정말 이리저리 통통 튀는 사람답게 갑자기 대화의 주체가 아사블랑에서 체이서로 넘어가 버렸다.

“형제애도 없는지 매번 차갑게 대하기만 하고. 하나뿐인 형이지만 얼마나 냉정한지. 어렸을 때부터 변함이 없다니까요.”

“그래요?”

“그래도 형수님께는 다정히 대해서 다행이에요. 어릴 적 모습 그대로면 형수님이 도망갈지도 모르니 열심히 노력해야 할 거예요.”

넉살맞은 말투에 에블린이 입가를 가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제대로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일정이 있다니 너무 아쉽네요. 복도에 너무 오래 세워 두었죠?”

“괜찮아요. 저도 모르는 체이서의 이야기를 들으니 너무 즐거운걸요.”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아, 제가 형 이야기했다는 건 비밀이에요?”

“물론이죠.”

“그럼 먼저 물러날게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블러드윈 님.”

에블린은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온전히 멀어지기 전까지 등 뒤에 꽂힌 시선은 거둬지지 않았다.

*** 

블러드윈과 헤어진 후 저택 밖으로 나오니 그의 말대로 마차 옆에는 아사블랑이 서 있었다.

“좋은 아침이지, 에블린.”

처음 이곳에 온 날 들고 있던 짐가방을 든 채 싱긋 웃는데 어제의 당황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에블린의 시선이 들고 있던 가방으로 향하자 아사블랑이 부끄러운 듯 뒤로 숨겼다.

“같이 점심을 먹고 바로 영지로 내려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짐도 챙겨 왔어. 너 안 그래도 바쁠 텐데 나 때문에 신경 쓰이면 안 되잖니. 남편도 기다리고 있을 테니 아쉬워도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지.”

어제의 모습을 지운 채 상식을 토로하는 말에 에블린의 눈이 순간적으로 가늘어졌다.

‘진심인 걸까?’

외출 후 피곤하다며 어떻게든 저택에 머물고자 끝까지 빌붙을 줄 알았는데 의외의 반응이었다.

‘포기했나?’

아사블랑은 후퇴하고 찬슬러가 방문하는 걸까, 또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걸까.

‘아니면 일부러 동정심을 자극하려는 걸까?’

하인들에게 부탁하면 될 것을 직접 가방을 들고 있는 제 모습이 얼마나 초라해 보일지 알고서 일부러 저러는 것 같기도 했다.

어제와 같이 노골적인 기대감은 비치지 않았기에 더더욱 혼란스러웠다.

‘차라리 흥분하고 날뛰어 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에블린은 슬쩍 시선을 굴려 함께 가는 기사들이 있음을 확인했다.

‘적어도 호위가 함께니 문제는 없겠지.’

애초에 보육원도 루이사의 보호를 받는 곳이니 별일은 없을 것이다.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괜찮을 거야.’

에블린은 불안한 마음을 다독이며 아사블랑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바이아르도 가문과의 연이 오늘로써 완전히 끝나기를 바라며.

***

보육원에서의 일정은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별일 없이 무사히 끝이 났다.

아사블랑은 의외로 아이들이 귀찮게 굴어도 화를 내지 않았고, 체력이 약해 금방 지쳐 버린 에블린과 달리 꽤 오래 아이들과 함께 어울렸다. 

투덜거리면 어떠한 이유를 붙여서라도 보육원 청소시켜 주려 했으나 그녀는 연신 생글거리며 봉사를 마무리하여 아쉽게도 기회는 물러났다.

“보육원 행사는 처음인데 생각보다 뿌듯한걸. 에블린 덕분에 이런 좋은 일도 해 보고. 오늘을 잊지 못할 것 같아.”

와중에 힘든 기색이 가득한 행태를 숨기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니 개인적으로 품었던 아쉬움도 지워 낼 수 있었다.

이후의 일정도 평화로웠다.

에블린과 아사블랑은 디센트라 거리에 있는 유명한 레스토랑에서 함께 점심을 즐겼고, 와중에 아사블랑은 연신 얌전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설득할 생각이 보이지 않네? 그럼 하루만 더 유예기간을 달라고 한 건 왜지?’

점심 식사가 끝나감에도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아사블랑은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그저 동생과 하루를 보내고 싶었던 언니일 뿐인 걸까?

식사가 끝이 나고, 결국 헤어질 시간이 찾아오자 아사블랑은 그제야 헤어짐을 입에 담았다.

“이렇게 헤어져야 한다니 너무 아쉽다. 오래간만에 만나서 너무 즐거웠고, 다시 한번 결혼 축하해, 에블린.”

“저도 언니를 만나서 즐거웠어요.”

형식적인 답을 하며 혹시 숨겨진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가만히 지켜보았지만, 아사블랑은 헤어짐에 아쉬워할 뿐 그 이상의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성문 앞에 남편이 보내 준 마차가 있다고 해서 그걸 타고 가려 하는데. 혹시 성문까지 배웅해 줄 수 있겠니?” 

‘뭐지? 정말 아무런 생각이 없는 걸까?’

아쉬움이 가득 서린 얼굴에 괜한 억측을 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에블린은 서서히 의심을 거두기 시작했다.

“그럼요, 당연히 배웅해야죠.”

“다행이다. 아무래도 일정이 바쁘니 어렵지 않을까 걱정했거든.”

아사블랑은 뺨을 감싸며 처음 재회했을 때처럼 기쁘게 웃어 보였다.

“그럼 성문 앞까지는 제 마차를 타고 가도록 해요.”

“고마워, 에블린.”

아사블랑이 곧 떠난다는 사실에 들떴고, 생각보다 마지막 헤어짐은 나쁘지 않았음에 안일하게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을까.

“언니, 성문 앞에 마차가 없는 것 같은데요.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걸까요?”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길을 피해 한쪽에 마차를 세워 밖을 살펴보았으나 아사블랑이 말한 마차는 보이지 않았다.

별 의심 없이 물으며 고개를 돌린 순간 돌아온 대답은 예상치 못한 행동이었다.

아사블랑은 어디선가 꺼낸 손수건으로 갑자기 에블린의 입을 그대로 틀어막았고, 그녀가 거세게 반항해도 절대로 손수건을 떼지 않았다.

“읍! 으읍!”

처음 맡아 보는 탁한 냄새에 취하기라도 했는지 눈앞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도움을 청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에 힘이 쭈욱 빠져 뻗었던 손이 그대로 아래로 떨어졌다.

빠르게 몰려온 졸음은 에블린을 의식 아래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없는 게 당연하단다. 마차는 부른 적도 없거든.”

점점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쨍한 목소리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체이서…….’

에블린은 결국 무겁게 감기는 눈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눈을 감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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