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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41)화 (41/159)

 41화

“그러니 저는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언니도 슬슬 집으로 돌아가야 하잖아요? 자작님이 기다리고 계실 테니까.”

“……그렇지. 그럼 이렇게 가면 우리는 결혼식에서야 볼 수 있는 거니?”

“결혼식이야 초대는 하겠지만 그때도 이번처럼 저택에 머무는 건 어려울 것 같아요. 그이가 친정을 반기는 건 아닌지라.”

현재 체이서가 저택에 없다는 것은 아사블랑 또한 알 터.

루이사 공작가의 소가주가 자리가 없기에 잠시나마 이곳에 머무를 수 있었음을 깨달은 아사블랑의 얼굴이 서서히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건 가문 간의 화합이기도 하지 않니! 내가 아니더라도 오라버니와 소가주님께서 만나 보셔야 하지 않겠어?”

“하지만 오라버니께서 제 결혼을 반대하셨잖아요? 그 때문에 체이서가 화가 많이 나서 시간을 낼지 모르겠네요. 애초에 다른 이의 눈치를 보는 이가 아니어서요.”

“……무슨 소리야. 결혼 소식은 애초에 전해지지도 않았는데!”

그에 에블린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체이서가 그리 말했는걸요. 오라버니께서 우리 사이를 맹렬하게 반대하셨다고요. 그래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결혼을 급하게 서두르는 거라고.”

에블린은 자리에 없는 체이서의 이름을 거론하며 소문을 진실로 만들어 버렸다.

바이아르도 백작이 아무리 억울하다 항변해도 체이서가 그리 말했다면 사실이 되는 법.

‘권력이란 건 이런 거구나.’

에블린은 쉽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만족스러웠지만, 티 내지 않고, 일부러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냈다.

“저도 가문에서 반대하는 결혼을 하는 처지니 집안의 도움을 삼가려고 했던 거랍니다. 부디 제 진심을 알아주세요, 언니.”

이렇게 에블린은 아사블랑이 항변해 볼 기회마저 지워내 버렸다.

“자, 잠시만. 잠시만 에블린!”

아사블랑은 억울한 마음과 타오르는 분노를 누르며 필사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에블린의 변화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 언니. 결혼하게 된 이상 저는 앞으로 바이아르도가 아닌 루이사가 되는 거니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요. 그래도 가문과의 화합을 원하신다면 그이에게 따로 서신을 넣어 보세요.”

진심으로 가족을 그리워했던 척하더니 이렇게 갑자기 가족들을 모두 쳐 내고 있는 모습은 뭐란 말인가!

“연을 이어 갈 생각이 있다면 답변을 줄 거예요.”

자신과의 연락은 기대하지 말라며, 명백히 남이라고 선을 긋는 태도에 가슴 속의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아사블랑은 아무런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머리가 굳어 버리기라도 했는지 억울하다는 말 외에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은 것이다.

“어머,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아시다시피 제가 결혼 준비로 바빠서요. 마저 드시고 천천히 일어나세요.”

에블린은 입가를 가볍게 닦아 내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멍하게 굳어 있는 아사블랑을 뒤로한 채 떠나던 발걸음이 잠시 멈추었다.

“참, 떠나실 때 하녀에게 말하면 마차를 내줄 거예요. 아쉽게도 바빠서 인사할 시간도 없을 것 같으니 미리 인사할게요. 조심히 돌아가세요.”

아사블랑이 애처로운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매정하게도 문은 그대로 닫혀 버릴 뿐이었다.

*** 

“마야, 언니가 돌아가면 언니에게 배정되었던 하녀들에게 휴가를 주렴.”

식당에서 나오자마자 에블린은 다정한 목소리로 그리 명했다.

“휴가 말입니까?”

“응, 그 애들이 많이 욕봤잖니. 고생했을 텐데 그렇게라도 보상해 줘야지.”

주인도 아닌 이에게 모진 대접을 받았으니 작게나마 무언가라도 해 주고 싶었다.

그 다정한 마음씨를 읽은 마야는 흐뭇하게 웃으며 속상한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아가씨께서 이렇게 걱정해 주시고 신경을 써 주셨다는 것만으로도 그 아이들에게는 큰 힘이 될 겁니다.”

“그리 생각해 주면 고맙지.”

에블린은 옅은 한숨을 내쉬다 말고 복도의 닫힌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화창한 햇살이 내려앉은 겨울 정원이 제게 오라고 유혹하는 것만 같았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혼자서는 싫었다.

‘며칠 못 봤다고 자꾸만 생각이 나네. 보고 싶은 걸까.’

에블린은 자연스럽게 체이서를 떠올렸다.

“체이서에게 연락은 없었니?”

“예. 아무래도 일 때문에 바쁘신 모양입니다.”

“그렇구나.”

‘얼마나 바쁘길래 연락 한 통 없을까. 혹시 다른 지역에서 마물화 환자가 나온 건 아니겠지?’

에블린은 체이서의 부재에 아쉬워하다가도 이내 아사블랑의 얼굴이 떠오르자 오히려 다행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아니야. 차라리 체이서가 오기 전에 가족 일을 해결했으니 좋은 거지 않겠어?’

분명 아사블랑은 지금쯤이면 자기를 반기기는커녕 내쫓으려고 했다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집안의 도움이 필요 없다는 말에 이름만 빌릴 뿐 연을 이어 갈 생각이 없다는 것도 함께 말이다.

‘애초에 체이서와 결혼하는 게 아니었더라면 이리 관심을 주지도 않았을 거면서.’

바이아르도 백작가와 관련된 일은 그들이 벌였으니 남에게 손을 벌리지 말고 스스로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에블린은 조금의 동정심도 가지지 않기로 했다. 그들은 13년 전, 부모에 의해 팔려 갔을 때부터 남이었으니까.

*** 

식사 이후 정신을 차린 아사블랑은 의외로 에블린의 의사를 존중한다는 말을 전해 왔다.

다만 이대로 떠나기는 아쉽다며 하루 정도 함께 더 있고 싶다는 말과 함께, 부디 시간을 내어 달라는 간곡한 부탁도 함께였다.

‘어떻게든 설득해 볼 생각인 모양이네.’

더 시간을 가진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을 정녕 아직도 모르는 걸까.

에블린은 내일 일정이 ‘보육원 후원 행사’인 걸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내가 바빠서 시간은 따로 못 내고, 보육원에 가야 하는데 함께 갈 생각이 있다면 따라와도 좋다고 전해 주렴.”

간단하게 후원금만 전해 주면 되었던 일정이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열심히 봉사도 해 주고 와야겠네.

에블린이 열심히 하면 눈치를 보며 자연스럽게 따를 수밖에 없을 테니 이 기회에 열심히 봉사나 시켜 줘야겠다.

‘힘들다고 도망이나 가지 않았으면 좋겠네.’

당연하지만 아사블랑에게서 온 대답은 함께 가겠다는 흔쾌한 수락이었다.

***

“이대로는 안 돼. 이대로는 안 된다고.”

아사블랑은 불안함을 숨기지 못하고 이미 피범벅이 된 손톱을 물어뜯으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에블린은 고약했다.

가족을 아끼는 척 반기는 모습을 보여 주더니 급격히 태도를 변화하며 망설이지 않고 내쳐 버렸다.

엄청난 지참금을 기대하며 온 아사블랑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 꼴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아사블랑은 품속에서 작은 구슬 하나를 꺼내었다.

지난번 심부름꾼을 만났을 때 찬슬러가 맡겨 놓고 간 것이라며 전해 준 물건으로, 찬슬러와 직통으로 연락이 가능한 소통용 마도구였다.

<어떻게 됐나, 아사블랑?>

아사블랑은 구슬 안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오라비의 목소리에 울먹이면서 지난 사정을 말했다.

<생각보다 호락호락한 계집이 아니었군.>

모든 사정을 들은 찬슬러는 짧게 한탄하더니 울먹이는 동생을 진정시켰다.

<이렇게 잔악한 계집이 내 동생일 리가 없다. 분명 루이사 공작가와 손을 잡고서 사기를 치는 이인 게 분명해.>

“내 생각도 그래요! 에블린이 얼마나 착하고 심성이 곱던 아이였는데! 이 언니가 동생과 하루만 함께 더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했더니 뭐라 하는 줄 아세요? 보육원에 가니까 올 테면 와 보라지 뭐예요! 오라버니, 나는 저 여자가 내 동생의 신분을 뺏고서도 발 뻗고 편히 살 수 있게 할 수는 없어요.”

다정하게 대해 줄 때는 친동생이라 믿기 의심치 않았던 아사블랑이었지만, 지독한 배신감과 분노에 손바닥 뒤집듯 생각을 바꿔 버렸다.

<그래, 내 생각도 그렇구나. 그보다 내일 외출을 한단 말이지? 타이밍이 좋구나.>

“타이밍이라니요?”

<루이사 공작가는 위세가 대단한 곳인 만큼 적이 많은 가문이지 않더냐. 동생이 납치당한 게 얼마나 상심이 크냐며 도와주겠다는 손길이 있더구나. 혹 동생을 제거하고 싶다면 그 또한 도와주겠다더구나. 그들을 이용하여 가짜 에블린에게서 돈을 뜯어내야겠다.>

찬슬러는 아사블랑에게만 들릴 정도 의 작은 목소리로 사악한 계획을 속삭였다.

모든 계획을 들은 그녀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고, 그제야 울음기를 지우고선 환히 웃을 수 있었다.

“역시 오라버니는 천재세요. 아아, 내일이 기다려지네요!”

<내 동생의 신분을 맨입으로 훔쳐서는 되나. 그러니 좋게 좋게 말할 때 들어주었으면 될 것을. 일을 키운단 말이지. 뭐, 내일 되면 제 행동을 후회하겠지.>

“맞아요, 제 업보인 걸 어쩌겠어요?”

벌써 계획을 성공시키기라도 한 듯 두 남매의 웃음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훌륭히 방음이 되는 곳임을 알기에 소리도 죽이지 않고 깔깔대며 웃은 그들에게는 오로지 내일만 기다려질 뿐이었다.

멀리서 듣고 있는 이가 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 

“체이서가 어젯밤에도 들어오지 않았다고?”

에블린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피곤한 낯으로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는 듯 물었다.

시중을 돕던 마야가 꼭 제 탓인마냥 죄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급한 일이 생겨서 한동안 기사단에서 숙식을 해결하실 모양입니다. 일이 끝나는 대로 빠르게 돌아오신다고 하였으니 너무 염려치 마세요.”

“벌써 사흘째인데…….”

에블린은 창문가로 걸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황성이 위치한 방향 쪽에 시선을 던졌다.

‘얼마나 바쁘면 저택에 들를 시간도 없는 걸까.’

“아마 결혼식을 앞두고 계시니 더 바삐 움직이시는 걸 거예요. 결혼식 후 휴가도 받으셔야 하니까요.”

“휴가?”

“그럼요. 결혼하셨으니 짧더라도 신혼을 즐겨야죠.”

“아.”

생각지도 못했던 단어가 나오자 에블린의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럼 결혼 후에 함께 있을 수 있으려나.”

바이아르도에서 편지가 온 그날 이후 제대로 얼굴도 본 적이 없어서 서운하기라도 했는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소식이 너무도 반가웠다.

아니면 그때 끌어안았던 품이 너무도 포근하고 따스해서 자꾸만 떠오르는 걸까.

이상하게 그 밤을 떠올리면 자꾸 심장이 간질거리고 볼이 따끈하게 열이 오르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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