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에블린은 아사블랑 앞으로 배정된 하녀들에게 그녀의 행보를 듣고선 혀를 찼다.
“고작 이틀인데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그간 바쁘다는 핑계로 아사블랑을 만나기를 피해 왔는데 그사이 그녀는 자신에게 허락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누리고 있었다.
“드레스가 마음에 안 든다고 새로 구해 오라고 하고, 저택의 물건을 시도 때도 없이 탐냈습니다! 아가씨의 것임을 알게 되면 더더욱 욕심을 부려 제 품에 안고 가더군요!”
“그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용인을 함부로 대합니다. 하녀들뿐만 아니라 식사가 마음에 안 든다며 주방장을 불러 호통도 쳤답니다. 집사님께 언성을 높이는 모습이 얼마나 추악해 보이던지 몰라요!”
아사블랑 앞으로 배정된 하녀인 엘라와 챠피는 그간 쌓인 서러움에 컸는지 목소리를 높이며 그녀의 행태를 낱낱이 전달했다.
그녀들의 말을 가만히 듣던 에블린이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다가 무언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너희 뺨이 왜 그러니?”
두 하녀의 한쪽 뺨이 티가 날 정도로 빨갛게 부어 있었다.
“……손톱 정리를 도와드리다가 저희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무슨 실수?”
두 하녀는 억울한 눈빛을 감추기 위해 푹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지켜본 에블린은 안타까움에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뺨을 때렸다는 게 말이 되니?’
얼마나 세게 내려쳤는지 몰라도 두 사람 다 오른쪽 뺨이 왼쪽보다 살짝 부어올라 있었다.
“언제 그랬니?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괜찮니? 많이 아팠을 텐데.”
“괜찮습니다. 저희가 부족했던 탓이니까요. 손님을 완벽히 모시지 못한 저희의 잘못이에요.”
엘라와 챠피가 송구하다며 고개를 푹 숙였다.
주인의 따스한 위로에 감동을 받은 두 사람이 훌쩍이면서도 끝까지 괜찮다며 웃어 보였다.
에블린은 화를 참으며 두 사람의 고개를 들게 했다.
“주치의에게 말해 놓을 테니 약을 받아 가렴.”
두 사람은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계속되는 에블린의 권유에 결국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떠났다.
고작 이틀 만에 저지른 패악질에 에블린은 혀를 내둘러 버리고 말았다.
“심성 한번 못됐네.”
좋게 좋게 해결하려고 했던 제가 멍청하게 보일 만큼 아사블랑은 예의가 없었다.
‘내가 얼마나 호구처럼 보였으면 이리 막 행동하는 건지.’
체이서의 말이 맞았다.
좋게 해 줘 봤자 배려가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는 이 작태에 에블린은 화가 났다.
쫓아낼 방법은 많았다.
다만 좋게 쫓아내기 위해 시간을 천천히 두려고 한 것인데 이렇게 나와 준다면야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지금껏 피한 시간이 아까울 만큼 가치 없는 손님을 더는 저택에 두고 있을 수는 없는 법.
에블린은 심각한 표정을 갈무리하고 웃음기 어린 얼굴로 마야에게 말했다.
“내일은 언니랑 함께 점심을 들까 해. 일정을 좀 조정해 주겠어?”
***
이틀, 이 짧은 기간 동안 루이사 공작저의 생활은 아사블랑은 인생 최고의 순간이라 꼽을 정도로 흡족한 시간이었다.
결혼식을 앞둔 에블린은 아사블랑을 신경 쓸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바쁜 덕분에 그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얼마든지 여유로움을 즐겼다.
착한 동생인 에블린은 바쁜 와중에도 언니를 신경 써 주는 것인지 아사블랑에게 힘들게 시간을 내었으니 내일 함께 점심을 먹자며 약속까지 잡아 주더라.
에블린을 만나 보기를 원하는 수많은 이들이 줄을 서는 이 상황에서 누구보다 우선시된다는 것은 아사블랑의 기분을 퍽 즐겁게 했다.
‘오랜 시간 동안 떨어져 있는 가족들이 그리웠나 봐. 웬만한 건 해 주라고 하니 앞으로도 더 잘해 주려고 할 게 분명해.’
제게 잘해 주는 행동에서 진심이 느껴진다며 아사블랑은 에블린의 실체에 대한 의심도 순식간에 지워 버렸다.
그래서 찬슬러에게 전해 줄 편지에 기회만 오면 동정심을 자극하여 가문의 빚을 탕감시켜 달라고 하겠다는 내용을 적었고, 미리 그가 심어 둔 심부름꾼을 만나기 위해 외출을 감행했다.
귀하게 모시고 있는 걸 보여 주듯, 잠시 외출하고 싶다고 하니 호위가 붙어 그녀를 지켜 주기까지 하였다.
마치 부유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추억에 그녀는 한껏 들떴다.
아사블랑은 심부름꾼에게 편지를 전해 주고는 다시 루이사 공작저로 돌아가는 길에 화려한 수도의 거리를 보며 행복한 망상에 빠졌다.
사람이 가득 차 있는 저 고급스러운 살롱의 단골이 될 생각을 하니 실실거리며 웃음이 주체가 되지를 않았다.
아직 시기가 일러 대놓고 쇼핑은 하지 못했지만 적당한 시간이 지나면 촌스러운 옷들은 모두 버리고 새로운 드레스와 장신구를 잔뜩 사 달라고 할 것이다.
예약해도 한참을 기다렸다가 들어갈 수 있는 살롱들도 에블린과 함께라면 순식간에 통과가 될 것이고, 굽실거리며 필사적으로 그녀를 모실 것이 안 봐도 선했다.
‘언제 한번 같이 외출하자고 해야지.’
부담스럽더라도 분명 에블린은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고위 귀족일수록 사회적 평판이 중요하지 않겠어? 심지어 이렇게 신분 차이가 나는 결혼이니 더 신경 써 주겠지.’
사교계의 이목이 이곳에 집중되어 있다는 걸 들은 이상 아사블랑은 더욱 은밀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에블린은 정에 굶주려 있으니 금방 많은 걸 내주겠지만.’
즐거운 생활을 하며 아사블랑은 내일이 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물론 금방 사라지고 말 물에 젖은 솜사탕과 같은 꿈임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
“오래간만에 함께 식사하니까 너무 좋다. 공작가의 음식은 훌륭해서 혼자 먹어도 맛있었지만 함께 먹으니 더 좋네.”
혼자여서 외로웠다는 말에 에블린은 미안했는지 눈썹을 아래로 늘어트리며 미안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간 제가 너무 무심했죠? 미안해요, 언니. 결혼이 코앞이다 보니 너무 바쁘지 뭐예요.”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내가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왔잖니.”
아사블랑은 제 예상과 똑같은 에블린의 모습에 입가를 가리며 교양 있어 보이게 웃었다.
“혼자 준비하려니 많이 힘들지? 보통 결혼식은 양가 어머니들이 함께 꾸려 나가야 하는데 그걸 너 혼자 하려니 얼마나 버겁겠니.”
“전혀 힘들지 않아요. 오히려 결혼식이 다가올수록 설레기만 하던걸요.”
결혼 이야기가 나오자 에블린은 기뻐 어쩔 줄 모르는 듯 수줍게 웃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순진한 에블린을 얼마든지 이용해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즐거웠는데 행복해하는 저 얼굴을 보니 갑자기 배알이 꼴렸다.
‘하! 그래, 무려 루이사 공작가에 시집가는 거니 기쁘겠지. 루이사 공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던데, 잘난 가문에 멋진 남편까지 함께니 얼마나 기쁠까!’
늙은 남편과 막대한 빚이 가득 쌓인 제 처지와 비교되는 순간을 보니 화가 난 것이다.
‘두고 보라지.’
아사블랑은 어릴 적 키웠던 인내심을 최대한 끌어 올리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연기했다.
“저택 관리까지 도맡아서 한다 들었는데 괜찮은 것 맞니? 이틀 전보다 안색도 안 좋아 보이고 말이야. 넌 몸도 허약하니 걱정이 된단다.”
아사블랑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쥐고 있던 식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진지한 얼굴로 제 필요를 강조했다.
“내가 진지하게 생각해봤는데 결혼은 가문 간의 화합이 이루어지는 일이기도 하잖니? 그러니 필요하다면 언제든 언니에게 도움을 청하렴. 얼마든지 도와줄 테니까.”
그에 에블린은 그건 상상하지도 못했다며 두 눈을 크게 뜨며 깜짝 놀란 모습을 보여 주었다.
“언니가 그렇게 저를 걱정해 준다니 너무 기뻐요.”
화사하게 웃으며 기뻐 어쩔 줄 모르는 모습에 아사블랑 또한 훈훈한 분위기에 어울리는 미소를 지어냈다.
“가족 좋다는 게 뭐니.”
아사블랑은 비릿한 미소를 삼키며 확실하게 종지부를 찍으려고 했다.
하지만 에블린은 곧 그녀의 기대를 너무나도 손쉽게 무너트리고 말았다.
“하지만 도움은 괜찮아요.”
“으응? 뭐라고?”
예상치 못한 말에 아사블랑의 입가에 지어진 미소가 파스스 흩어졌다.
“결혼식은 제 손으로 꾸려 가고 싶어요. 이건 제 일이니까요.”
“어, 어머나. 혼자 하기 많이 어려울 텐데? 나도 경험해 봐서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안단다.”
“결혼하게 되면 앞으로 공작가의 내정을 관리하게 될 거예요. 그러니 미리 연습한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해 보려고요.”
이런 대답을 예상치 못한 아사블랑은 당황하며 눈을 굴렸다.
‘이게 아닌데?’
설마 제안을 거절할 줄 몰랐기에 다음 단계를 생각지 못했다.
눈에 띌 정도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아사블랑을 보며 에블린은 비웃음을 속으로 삼켜야 했다.
‘이렇게 직설적으로 나오다니. 내가 어지간히 우습게 보였나 봐.’
그래도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와 준 덕분에 생각보다 양심에 찔리지 않고 그녀를 내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참, 이 이야기를 먼저 한다는 걸 깜빡했네요. 그이와 지참금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어?”
아사블랑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에블린은 선수를 쳐 버렸다.
“제가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해 고생했잖아요. 그래서 가문끼리 지참금을 주고받는 대신 그 돈을 병원과 보육원에 기부하기로 했어요.”
“……뭐?”
아사블랑이 표정 관리를 하는 것도 잊고 얼굴이 와락 구겼으나 에블린은 모른 척 해맑게 말을 이어 갔다.
“제 지참금은 어릴 적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유산으로 해결했으니 가문에서 신경 써 주지 않으셔도 되고요.”
“유산이 있었다고?”
“네. 큰 금액은 아니지만요. 지참금도 문제없고, 결혼식 진행도 척척 진행되고 있어요. 가문에 손을 벌리지 않고 오로지 제 손으로 해낸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에블린은 제 이야기에 심취하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그럴수록 아사블랑의 얼굴은 더 일그러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