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하녀의 안내에 따라 손님방에 도착하자마자 아사블랑은 고맙다는 말과 함께 그녀들을 내보냈다.
그리고 홀로 남았을 때, 그제야 자비롭게 짓던 미소를 지우고서는 흥얼거리며 침대로 뛰어들었다.
“동생 덕에 이런 호강도 누려 보네? 으음, 진짜 동생인지 아닌지는 나도 잘 모르지만.”
에블린 바이아르도, 아사블랑의 늦둥이 여동생인 그녀는 어린 시절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라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부모님의 아낌없는 지원과 관심 아래서 귀하게 자라났다.
선대 바이아르도 백작 부부는 손위 형제인 찬슬러와 아사블랑에게 그녀를 상냥히 대하라며 단단히 타일렀고, 그렇지 못한 모습을 보이면 호되게 혼을 내고는 했다.
어린 날의 아사블랑은 어린 제 여동생에게 뿌리 깊은 질투를 품었음에도 부모님의 감시에 그것을 티를 낼 수도 없었다.
그렇게 억울한 어린 날을 보내던 어느 날, 에블린의 7살 생일에 부모님은 기쁜 얼굴로 앞으로는 에블린을 볼 수 없다며 일방적인 통보를 날렸다.
찬슬러와 아사블랑은 당황했지만 기쁜 얼굴로 두둑이 용돈을 얹어 주는 부모님의 모습에 좋은 게 좋은 거라며 갑작스러운 여동생의 실종에 의문을 접기로 했다.
‘어딘가에 팔아 버리기라도 했나 보지.’
두 사람을 그리 생각하며 더는 관심을 주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주위에는 병약한 에블린이 시골 영지로 요양하러 갔다는 소문이 흘렀다가 조용히 그들의 기억에서 잊혀 갔다.
그 이후로 부모님은 갑작스러운 마차 사고로 동시에 돌아가셨고, 진작부터 백작 부인과 함께 재산을 관리하던 아사블랑은 조금씩 저지르던 횡령을 대놓고 저지르기 시작했다.
누구도 모르는 그 죄는 아직 미성년인 찬슬러 바이아르도를 대신하여 가주 대리를 맡게 된 숙부로 인해 들통나고 말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숙부는 크게 분노했으며 결국 아사블랑은 그의 화를 피하고자 급도 맞지 않는 늙은이에게 지참금을 받고 팔리듯 시집을 가게 되었다.
그렇게 만나게 된 남편, 브렌다 자작은 그녀의 아버지와 같이 알아주는 도박광이었고 집안의 가세를 기울이는 데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녀를 도박판으로 끌어들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브렌다 자작가 앞으로 쌓인 빚은 자작 부부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거대해져 있었다.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친정인 바이아르도 백작가에 손을 벌려 보려 했으나 그곳 또한 사업 병이 도진 찬슬러 때문에 파산 직전인 상황이었다.
심지어 당시 찬슬러는 ‘에블린 바이아르도’를 꾸며 내어 아사블랑 때와 같이 큰 지참금을 받고 지헤스 자작가에 시집을 보낼 생각이었고,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아사블랑은 찬슬러와 ‘에블린 바이아르도’의 존재를 두고 싸우기 시작했다.
결국 두 사람은 지참금을 사이좋게 반씩 나누기로 하고 나서야 싸움을 끝낼 수가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찬물을 끼얹듯 스스로를 ‘에블린 바이아르도’라 주장하는 이가 나타났으니.
이것이 바로 아사블랑이 변방의 영지에서 수도까지 올라오게 된 경위였다.
‘보아하니 꽤 닮았던데.’
이곳에 있는 에블린이 진짜든, 아니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느 집안 사람과 결혼하는지가 가장 중요할 뿐.
‘진짜면 가족의 정에 약하던 이었으니 그걸 자극해서 돈을 뜯어내면 되고, 가짜면 그걸 빌미로 협박해서 돈을 뜯어내면 되겠지.’
어디 시골에서 구르다 온 계집인지 모르겠지만 순진무구한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릴 생각을 하니 절로 즐거워졌다.
‘두고 보라지.’
순진한 에블린을 앞장세워 공작가를 제 손으로 주무르겠다는 야심 찬 포부를 다짐하며 아사블랑은 환히 웃었다.
***
“에블린, 요 잠꾸러기. 생일날 소풍 간다고 신나 하더니 늦잠을 잔 모양이구나. 그래도 이 오라비 선물은 받아야 하지 않겠니?”
“언니랑 같이 선물을 뜯어보자 했잖니. 어서 일어나렴.”
아사블랑을 만난 탓일까.
오래간만에 바이아르도가에서 지냈던 어린 시절의 꿈을 꿨다.
꿈의 내용은 별것 없었다.
아마 7살 생일 즈음이었던 것 같다.
부모님과 사이좋게 소풍을 가기로 한 아침, 제 방에 가득 쌓인 선물을 보며 기뻐하는 어린 에블린이 그곳에 있었다.
그 옆에는 아사블랑도 함께였다.
그녀는 선물을 뜯어 보는 에블린의 옆에서 정말 멋진 선물들이라 감탄하며 함께 손뼉을 치며 기뻐해 주었다.
‘그런데 이건 에블린이랑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럼 언니가 가질래?’
‘어머, 그래도 될까? 에블린 선물인데. 그래도 준다니 고맙게 받을게. 정말 에블린밖에 없다니까?’
아마 영지의 유명한 상단에서 보내 준 작은 보석함이었던 것 같다.
아사블랑은 눈을 빛내며 보석함을 탐냈지만 어린 동생 앞에서 티를 내지 않아 하며 자연스럽게 동생의 선물을 받아 갔다.
‘심지어 루이사에 팔려 가기 직전이었네.’
그리고 이날 오후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강제로 저택을 떠나게 되었으니 참 스스로의 처지가 딱하기 짝이 없었다.
에블린은 퍽 불쾌한 낯으로 몸을 일으키고는 허탈하게 웃으며 협탁 위에 올려진 물을 마셨다.
현실까지 따라온 불쾌한 감정은 고작 미지근한 물로 씻어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정말 그대로구나.”
자연스럽게 부탁을 요구하는 얼굴부터 미안한 척하다가도 제게 오는 호의를 모두 받아들이는 모습이 정말 예전과 달라지지 않고 그대로였다.
“언니만 그랬던 것도 아니긴 하지.”
에블린의 오빠와 언니인 찬슬러 바이아르도와 아사블랑 바이아르도는 욕심이 많았다.
물욕도 많았고, 주위의 관심도 오로지 제 것이 되어야 속이 풀리는 이들이었으니 어린 동생에게 억지로 양보하며 사는 게 얼마나 짜증이 났었을까.
에블린이 7살일 때, 찬슬러 바이아르도는 열아홉, 아사블랑 바이아르도는 열일곱으로 한창 사춘기이니 더 열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를 찾지 않은 걸까?’
꿈자리가 사나우니 아침부터 기분이 영 별로였다.
‘체이서가 있었더라면 나를 보며 뭐라 했을까?’
기사단에 급한 일이 터졌다며 당분간 저택으로 돌아오지 못한다고 하는 갑작스러운 소식에 에블린은 혹시나 그가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어젯밤 잠을 설치고 말았다.
일에 치여 피곤할 체이서가 걱정이 되다가도 혹시 아사블랑이 저택에 있는 게 불편해서 일부러 귀가하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부정적인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그래서 이딴 꿈을 꿨나?’
아니지, 자기 전까지 본 것들이 너무나도 정신을 쇠약하게 만들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에블린은 협탁 위에 올려진 구겨진 서류 종이들을 보았다.
그곳에는 에블린이 체이서에게 미리 부탁해 받아 놓은 바이아르도 백작가와 브렌다 자작가를 조사한 내용들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찬슬러 바이아르도는 갓 성인이 되자마자 백작 위에 올랐고, 그 후로 매년 꾸준히 새로운 사업을 진행했지만 실패했으며 그의 앞으로 막대한 빚이 쌓여 현재 바이아르도 백작가는 파산 직전에 놓여 있었다.
아사블랑 바이아르도는 집안의 재산을 관리하다 횡령한 사실을 들켰고, 분노한 숙부의 눈을 피해 도망치듯 브렌다 자작가에 시집을 갔으며, 남편과 함께 도박에 빠져 큰 빚을 지고 있다 적혀 있었다.
“백작 대리를 하던 숙부도 함께 사이좋게 횡령했다니. 집안 꼴이 이게 뭐람.”
에블린은 힘을 쥐어 잡아 구깃구깃해진 종이들을 협탁 위로 거칠게 내던지고는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서 목을 뒤로 젖히고서는 그대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런 와중에 바이아르도 백작은 빚을 감면하기 위해 ‘가짜 에블린’을 만들어서 지헤스 자작가와 혼담을 주고받는 중이라 적혀 있는 부분이 가장 최악이었다.
‘어떻게 하면 여동생을 늙은 자작의 첩으로 팔 생각을 할 수가 있을까? 내 이름을 사용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을 수가 있나?’
물론 이는 에블린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서 자연스럽게 혼담이 파기되었다고 한다.
바이아르도 백작가에서 신이 나서 직접 자작가에 깽판을 친 뒤, 혼담 파기 요청을 넣었다는 말을 끝으로 조사 내용은 끝이 나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뻔하구나.”
자작가와의 혼담을 파기했다는 건 에블린을 통해서 그 이상의 이익을 챙겨 나가겠다는 뜻과 다름없었다.
돈이 많은 자작가보다는 돈과 권력이 많은 루이사 공작가에서 떨어질 콩고물이 탐이 났으리라.
‘그러니 체이서의 말대로 양심 없이 이렇게 나를 보러 찾아왔겠지.’
돈 벌 수단이 필요한 바이아르도의 두 사람은 루이사에게 빌붙어 최대한 많은 돈을 뜯어내려는 게 분명했다.
‘당장이라도 내쫓고 싶지만, 주변에 보는 눈이 너무 많아.’
수도의 사교계는 희대의 결혼을 앞둔 ‘에블린’에게 관심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아직 사교계 데뷔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 에블린의 모든 것이 유행처럼 따라올 정도였다.
에블린이 다녀간 후 그랑티 살롱은 매출의 최고치를 찍으며 다시금 사교계의 작은 모임의 장이 형성되었다.
후원자로서 방문했던 보육원 역시 주목을 받아 귀족들 사이에서 후원, 기부 행렬이 유행처럼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제국 최고의 가문과 몰락을 앞둔 가문의 결합은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의 흥밋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건 안다지만.
‘너무 피곤해.’
체이서는 주위의 눈은 신경 쓰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라고 하였지만, 그에게 피해가 될까 봐 선뜻 움직이지를 못하니 답답한 건 사실이었다.
‘그냥 체이서에게 맡길 걸 그랬나.’
그에게 짐을 얹어 주고 싶지 않아 스스로 하겠다고 당차게 말했던 것인데 생각보다 방법이 많지 않아 힘들었다.
‘두고 보다가 자연스럽게 내보내야겠다. 물론 돈은 한 푼도 주지 말고.’
피곤한 탓인지, 아니면 힘들 때마다 그에게 기대는 것이 익숙해져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상하지? 당장 체이서가 보고 싶어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