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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38)화 (38/159)

 38화

“배덕감이 생길 것 같은 말은 그만해 주세요.”

“어차피 피도 안 이어진 사이인데 배덕감은 무슨.”

체이서는 에블린을 손을 천천히 떼어 내더니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마주했다.

“결국 어떻게든 넌 루이사가 될 운명인 것 같다는 결론밖에 나지 않는데. 곧 루이사가 될 소감은 어떤가?”

“벗어나고 싶다?”

앞선 체이서의 농담에 지지 않겠다는 듯, 에블린이 드물게 장난기 서린 말을 꺼내자 체이서가 곧바로 맞장구쳐 주었다.

“하지만 벗어나기엔 늦었지.”

진심이 담긴 체이서의 말에 두 사람은 동시에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니 루이사답게 멋대로 굴도록 해. 에블린, 너는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고.”

에블린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지. 고작 체이서가 옆에 있을 뿐인데 자꾸만 마음이 편해지니.’

추웠던 마음에 온기가 차오르는 것만 같았다.

편지를 받은 후,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팔려 나가던 그 순간에 멈춰 있던 에블린의 시간이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다.

*** 

속성으로 받은 수업들이 종료된 후, 에블린은 체이서의 부탁을 받고 저택 관리를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에블린도 부담스럽다고 거절했다.

‘어차피 공작 부인이 되면 해야 할 일이니까 네 취향대로 저택을 꾸며 봐.’

하지만 체이서가 힘내 보라고 웃으며 그녀의 거절을 다시 거절했다.

‘저택 관리가 끝나면 다른 것도 맡기는 건 아니겠지?’

무늬만 공작 부인이 되지 않게 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져서 솔직히 조금 무섭기도 했다.

‘무서운데 기대가 되는 나도 참 이상한 사람이야.’

자신이 없었지만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뻐 열정은 가득 넘쳤다.

열심히 하자며 다짐했지만, 아쉽게도 루이사 저택은 건국 초부터 대대로 유지되던 기품이 있는 저택이었고, 여전히 아름다움을 띠고 있었기에 저택의 디자인에 손댈 곳이 많지는 않았다.

‘차라리 보수가 필요한 부분을 살펴보는 게 낫겠어. 공작저는 본관과 별관 총 두 채, 아마 별관이 더 보수할 곳이 많겠지.’

집사가 미리 준비해 놓은 저택의 평면도를 확인하며 복도를 걷는데 저 멀리서 로피가 빠르게 다가오며 에블린을 찾았다.

“아가씨, 저택에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아, 설마.”

에블린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묻자 로피는 그녀의 추측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러운 손님의 방문에 에블린은 놀랐다가도 올 게 왔다는 생각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에블린을 찾아온 사람은 오래된 기억 속에 있던 바이아르도 가의 사람이었다.

‘아사블랑 바이아르도.’

항상 에블린을 향해 어여쁘다며 속삭여 주며 열심히 아껴 주던 척을 하던 그녀의 언니였다.

기억 속의 얼굴과 닮아 있었지만, 에블린이 예상했던 어릴 적 특유의 여유로웠던 분위기는 남아 있지 않아 보였다.

그래, 애석하게도 아사블랑의 모습은 촌스러웠다.

수도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유행이 지난 원색의 드레스, 관리를 받지 못하고 대충 정리한 머리에 단출한 여행 가방 하나.

힘주어 차려입고 온 것 같았지만 수도에서는 흔히 말하는 촌뜨기 취급을 받을 만한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귀족 가문의 여식이 일행 한 명 없이 홀로 찾아왔다니.

바이아르도 백작가를 대표하여 찾아온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만한 초라한 방문이었다.

그 때문인지 로비에는 꼭 그녀를 감시라도 하는 듯 몇몇 고용인들이 주위에 서 있었는데 아사블랑 또한 그들의 눈치를 보며 초조한 얼굴로 눈을 굴리고 있었다.

그러다 에블린을 발견하곤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신이시여, 맙소사.”

아사블랑은 마치 귀신을 본 것 같이 경악한 얼굴로 더듬거리며 물었다.

“저, 정말 에블린이니?”

아사블랑은 스스럼없이 에블린을 향해 다가오려다 그녀의 뒤에 서 있는 마야의 매서운 눈빛에 주춤거렸다.

“그러니까, 혹시 나 기억하니? 아사블랑 바이아르도, 아니 지금은 아사블랑 브렌다란다. 네 언니인데 기억나?”

꼭 자신을 알아봐 달라는 듯 퍽 간절한 목소리와 달리 그녀는 재빠르게 에블린을 탐색하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빠르게 훑는 시선을 느낀 에블린은 모른 척 빙긋 웃었다.

“그럼요, 언니. 제가 언니를 어떻게 잊어버리겠어요.”

“에블린, 나의 사랑스러운 동생아! 어쩜, 이 사랑스러운 미소는 어릴 적과 똑같구나!”

아사블랑은 감격한 얼굴로 에블린을 와락 끌어안았다.

뒤에서 마야가 기겁하며 나서려 했지만, 에블린이 손을 들어 그녀를 막아 세웠다.

그녀는 불만스러운 얼굴을 펴고서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선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네가 얼마나 보고 싶었던 줄 아니? 별장에서 사라졌다는 말에 얼마나 심장이 철렁거리도록 놀랐는지 몰라. 그런데 갑자기 결혼이라니!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에블린이 자신을 기억해 준 것이 기뻤는지 아사블랑이 벅찬 표정으로 서서히 목소리를 키워 갔다.

“언니, 진정하세요.”

“내가 어떻게 진정할 수가 있겠니! 오래간만에 만난 내 사랑스러운 동생이 이렇게 좋은 곳으로 시집을 간다는데!”

도무지 말을 들어 먹을 것 같지 않았다.

에블린은 차분하게 아사블랑을 불렀다.

“언니.”

부드러운 어조였지만 절로 시선을 이끄는 단호함이 담긴 목소리에 아사블랑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붉은 립스틱을 바른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보였다.

부산스러울 정도로 손을 꼼지락거리는 것에 에블린은 그녀가 제 눈치를 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에블린은 일부러 아사블랑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따사로이 웃었다.

“언니는 제 손님이잖아요. 손님을 이렇게 로비에 세워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아요. 자리를 옮겨요.”

“그럴까?”

그제야 안심한 듯 미소 짓는 모습에 슬쩍 옆으로 시선을 던졌다.

“설마 수도까지 홀로 찾아오신 건가요? 수행원 하나 없이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이럴 게 아니라 우리 우선 안으로 들어가자! 어서 너와 회포를 다지고 싶어.”

빈약한 처지를 확인받고 싶지 않았던지 아사블랑은 재빨리 말을 돌려 버렸다.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꺼내는 건 조금 안쓰럽게 보이기도 했다.

‘이렇게 눈치를 보던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루이사에 기가 죽은 건가.’

에블린은 별스럽지 않게 생각하고는 그녀와 함께 응접실로 향했다.

마야와 로피는 간단한 다과를 마련해 준 뒤 조용히 응접실을 나섰다.

설렘이 가득한 얼굴로 응접실을 둘러보던 아사블랑은 에블린이 소파에 앉는 것을 보고 냉큼 건너편에 앉았다.

그리고는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선량한 얼굴로 반가움을 토해 냈다.

“그간 잘 지냈니, 에블린? 우리는, 우리는 지금까지 네가 죽은 줄로만 알았단다!”

응접실에 단둘만 남은 것에 안심했는지 곧 남들 앞에서 꺼낼 수 없는 사실을 막힘없이 주절대기 시작했다.

“네가 어디 갔냐고 물어도 부모님은 앞으로 널 보지 못할 거라고만 말씀하시니 얼마나 답답했던지 몰라.”

“부모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래. 귀족 계보에는 네 이름을 지우지 않으시는 걸 보고 밖에서 너를 잃고 미치셨나 싶었어. 자세한 사정을 듣기도 전에 두 분은 돌아가셨고, 자연스럽게 네 행방은 묘연해졌단다. 그러니 당연히 죽은 줄 알았지.”

아사블랑은 눈가에 고이기 시작한 눈물을 닦아 내며 기쁨을 숨기지 않았다.

“저택의 누구도 네가 살아 있었단 사실을 몰랐단다. 심지어 오라버니마저도! 그런데 드디어 이렇게 소식이 닿았구나. 지금 얼마나 기쁜지 몰라!”

에블린은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아사블랑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녀는 감동한 얼굴로 손수건으로 조심스럽게 눈가를 닦았다.

“그간 어떻게 지냈던 거니? 네 이야기를 좀 해 주렴.”

자기 이야기가 끝나자 드디어 에블린의 이야기가 궁금했는지 훌쩍이며 물었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날이 선명하네요.”

에블린은 우선 대화를 맞춰 주기 위하여 미리 짜 놓았던 거짓말을 입에 담았다.

“제 일곱 번째 생일날, 부모님께서 외딴 별장에 저를 데려가셨죠.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도 잠시 두 분은 저를 그곳에 두고 떠나면서 이리 말씀하셨어요. 저는 호흡기가 약해서 항구가 아닌 공기 좋고, 물 맑은 숲에서 살아야 한다고. 그래야 오래 살 수 있다고요.”

“부모님께서……?”

“네, 저는 건강해질 수 있다는 말에 좋다고 말했죠. 만약 앞으로 가족들을 볼 수 없다는 말까지 함께 해 주셨다면 그런 선택은 하지 않았을 거예요. 많이…… 외로웠거든요.”

슬픔이 어린 목소리에 아사블랑이 에블린의 곁으로 와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이제부터는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으니 상심치 말렴.”

에블린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어깨를 들썩이더니 아사블랑의 어깨에 기대 고개를 푹 숙였다.

“저를 만나러 와 줘서 고마워요, 언니.”

애처롭게 떨리는 목소리에 아사블랑은 오히려 벅찬 목소리로 쓰린 그녀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나는 네 언니잖아. 내가 얼마나 너를 아꼈니? 걱정하지 말고, 언니에게 편히 기대렴.”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기도 하지.

분명 진심을 담아 위로를 하는 것 같은데 그 마음이 와 닿지 않았다.

에블린은 서늘히 굳은 얼굴로 아사블랑의 뒤통수를 시린 눈으로 바라보다가 적정 시간이 흘렀다 판단되었을 때 천천히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다시 마주 보았을 때는 조금 전의 표정을 지우고서는 수줍은 얼굴로 기쁨의 인사를 건네었다.

“고마워요, 언니.”

에블린의 입가에 지어진 미소에 아사블랑은 그제야 울음기를 지우고서는 활짝 웃었다.

그리고는 슬쩍 에블린에게서 떨어지더니 문가를 살피며 은근슬쩍 물어 왔다.

“참, 소공작님께서는 어디 계시니? 인사를 드려야 할 텐데.”

“그이는 일이 많아서요. 저도 최근에는 얼굴 보기 힘들어요. 다른 공자님들도 마찬가지고요.”

“세상에나. 그럼 이 저택에 너 홀로 지내고 있는 거나 다름없잖아. 얼마나 외로울까……. 내가 마침 적절할 때 찾아온 것 같아 다행이다.”

“그러게요. 정말 언니가 찾아와 줘서 너무 기뻐요.” 

화기애애한 대화가 몇 번이고 더 오갔고, 어느새 창밖은 서서히 해가 저물고 있었다.

“세상에 내 정신 좀 봐!”

아사블랑이 힘차게 말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제 가방을 번쩍 들었다.

“급히 올라오느라 수도에 숙소를 못 구했거든. 더 늦어지기 전에 어서 나가서 숙소를 구해 봐야 하는데.”

그러면서 힐끗 시선을 던지는데 기대감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속 보이는 행동에도 에블린은 오히려 그러지 말라며 아사블랑을 막았다.

“언니, 오늘은 시간이 너무 늦었잖아요. 우선 오늘은 이곳에서 묵고 후에 일정을 조정해 보는 건 어때요?”

어차피 이 정도 호의는 베풀어야 했다고 생각했기에 에블린은 자연스럽게 선의를 베풀었다.

“어머, 정말 그래도 될까?”

“그럼요.”

“고마워, 에블린. 네 덕에 편히 지내다 갈 수 있겠구나.”

그 후로는 별것 없었다.

에블린은 해야 할 일들이 있다며 내일마저 이야기를 나누자고 한 뒤, 하녀들에게 아사블랑에게 방과 식사를 내어 주라 명하고는 먼저 자리를 떴다.

밝게 웃으며 내일 보자는 아사블랑을 향해 에블린 또한 환히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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