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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37)화 (37/159)

 37화

대화도 섞기 싫어 보이는데 괜히 나선 것은 아닌지 걱정이었다.

‘그나마 쿠키를 버리지 않았단 것을 다행히 여겨야 하는 건가.’

에블린이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트리자 마야가 다급히 그녀를 달래 주었다.

“아니에요, 아가씨. 데몬스 도련님께서는 워낙 낯을 많이 가리셔서 그럴 것이에요.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셔요.”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아무리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어색하다고 하지만 곧 가족이 될 사이인데 이래도 되는 걸까.

잠깐이었지만 어쩔 줄 몰라 하던 앳된 얼굴이 이상하게 마음에 쓰였다.

“데몬스 님은 아직도 식사를 거르나?”

“조금이나마 드시긴 합니다만 아무래도 그렇지요.”

“다음에도 간식거리를 챙겨 드려야겠네.”

에블린보다 고작 세 살 어릴 뿐인데 저만큼 마른 몸을 보니 동생들이 떠올라 버렸다.

이 또한 오지랖이겠지만 그래도 가족이니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한숨을 내쉬니 하얀 김이 주위에 사르르 퍼져갔다.

“곧 깜깜해지겠으니 이만 들어가자.”

에블린과 마야는 사이좋게 다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밖과 달리 훈훈한 공기가 두 사람을 감싸니 피곤함에 절은 몸이 절로 노곤해져 왔다.

‘이대로 목욕하고 푹 쉴까?’

에블린이 오래간만의 여유를 즐길까 하는 마음으로 방에 들어서니 그곳에는 마담 그랑티를 배웅한 로피가 돌아와 있었다.

로피는 은쟁반을 들고 있었는데 평소와 달리 긴장된 얼굴이었다.

“무엇이길래 그리 얼굴이 굳어 있어?”

에블린이 웃으면서 물었고, 로피는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 아가씨 앞으로 온 편지가 있다 해서 가져와 봤어요.”

“로피, 아가씨 앞으로 온 편지는 우선 소가주님께 가져드리기로 했잖니.”

마야의 타이름에도 로피는 경직된 얼굴로 쟁반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건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아서요.”

에블린은 편지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쟁반 위에는 기다리고 기다렸던 바이아르도 백작가에서 온 편지가 놓여 있었다.

***

벌써 자정이 넘어가는 시간이었건만 오늘따라 잠이 오지 않았다.

에블린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벌써 몇 번이나 읽어 본 편지지를 매만졌다.

‘오늘따라 밤이 참 기네.’

자꾸만 떠오르는 가족들의 기억에 어렸던 그때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가족들과의 마지막이었던 숲속에 묶여 버리기라도 한 듯 그때의 기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에블린은 편지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소파에 앉아 다리를 모아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이런 혼란을 안겨다 준 편지지를 괜히 노려보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을까.

“웬일로 이 시간까지 안 자고 있어. 날 기다리기라도 했나?”

얼마나 편지에 정신이 팔렸으면 노크도 문이 열리는 소리도 못 들은 걸까. 

오래간만에 듣는 반가운 목소리에 에블린이 무릎 위에 파묻었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이제 막 퇴근하고 돌아왔는지 체이서는 기사단 정복 차림을 한 채 에블린의 앞에 서 있었다.

“오셨어요?”

“보아하니 날 기다린 건 아닌 모양이군.”

에블린의 힘없는 목소리에 체이서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편지를 발견하였다.

“바이아르도인가?”

에블린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편지에 뭐라고 쓰여 있길래 이리 기분이 안 좋아.”

체이서는 편지를 읽는 대신 여전히 다리를 끌어모아 앉아 있는 에블린의 옆에 앉아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달래 주었다.

“그냥 별거 없었어요.”

편지에는 정말로 특별한 내용이 없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오라버니더라고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숙부께서 가주 대리를 하다 정식으로 성인식을 치른 후 물려받았다네요.”

“그래?”

“가주로서 또 오라비로서 부모의 역할을 이행할 의무가 있다면서 가족들과 의사소통도 없이 결혼을 진행한 점이 서운하다며 저를 탓하고 있네요.”

시일 내에 수도에 방문할 예정이며 그때 얼굴을 보고 싶다는 내용을 길게 풀어 쓴 편지는 안부 한마디 없이 그렇게 마무리되어 있었다.

정말 별거 없었다.

10년 만에 연락이 닿은 동생에게 하는 편지가 이리도 볼품없다니 우스워서 속이 메스꺼웠다.

“어차피 가족으로 여기지도 않았으니 어떤 내용의 편지가 와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체이서는 덤덤히 제 이야기를 하는 에블린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마치 위로하듯 가볍게 토닥이는 손길에 에블린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그제야 두 사람의 두 눈이 마주쳤다.

에블린은 먹먹한 눈빛으로 체이서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말했다.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쁜지 모르겠어요.”

체이서는 붉게 물든 에블린의 눈가를 살살 매만지며 자연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어떤 점이 기분이 나빴는데?”

“그냥 모든 게 다요. 무려 13년 만의 닿은 연락치고 너무 볼품없잖아요. 저를 가족이 아니라 물건으로 생각한 게 이렇게 티가 났었는데 왜 어린 시절의 저는 몰랐을까요? 도대체 뭐가 좋다고 그리 웃고 다녔는지 멍청했던 제게 너무 화가 나요.”

에블린은 슬픈 눈으로 힘없이 웃어 버리고 말았다.

제 한심함을 탓하는 목소리에 체이서에게서 볼멘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잘못도 아닌데 왜 이렇게 성이 났어. 그때 너는 고작 7살이었잖아. 가끔 보면 너는 스스로에게 너무 엄격해. 조금 더 관대하게 대해 주라고.”

체이서는 위로를 해 줬음에도 여전히 우울해 보이는 에블린의 모습에 그제야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편지를 들어 읽어 보았다.

과연 에블린에 대한 걱정은커녕 가문과 상의 없이 결혼을 올리려는 그녀를 은근히 탓하는 말들이 대부분이었다.

“편지를 보낸 것도 양심이 없는데 내용은 더더욱 기가 막히는군. 착한 네가 화날 법도 하겠어.”

에블린은 답을 하는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로 침묵이 오갔다.

시무룩한 에블린을 가만히 바라보던 체이서는 편지를 내던지고서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없애 줄까?”

“……네?”

마치 식사했냐는 듯 평온한 목소리를 담은 물음이었지만 내용은 그렇지 못했다.

잘못 들었나?

“거슬리면 없애 줄까 물었어.”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에블린의 두 눈이 거칠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 왜, 왜요?”

“네가 그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니까.”

진지한 얼굴로 내뱉는 말이 어찌나 살벌한지.

에블린은 괜히 제 목을 매만지며 침을 꿀꺽 삼켰다.

“없어졌으면 좋겠다 할 정도로 싫은 건 아니에요.”

“그래?”

괜찮다고 했는데 오히려 체이서는 더더욱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지?’

에블린은 혹시나 그가 정말로 가문을 없앨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황급히 입을 열었다.

“네. 그러니까 그런 무서운 소리는 하지 말아 주세요. 소문이 더 악랄하게 퍼질까 봐 걱정이니까.”

“……악랄하게라니? 누가 너를 험담이라도 한다던가?”

“저 말고 체이서, 당신이요. 안 그래도 수도에 당신이 저를 납치했다는 소문이 파다한데 갑자기 제 가문이 없어져 봐요. 아, 바이아르도 백작가가 기어코 루이사 소공작의 눈 밖에 나서 가문이 화를 입었구나 하고 악명만 올라가지.”

도대체 납치했다는 소문은 어떻게 퍼져 나간 것인지.

‘체이서가 일부러 낸 걸까, 아니면 입이 가벼운 이들의 소행일까.’

“내 걱정 때문에 하지 말란 거였나?”

“그럼 제가 연이 끊긴 가족을 걱정해서 뭐 해요?”

“……그렇네?”

“그렇죠?”

그제야 체이서의 얼굴에 서려 있던 불만이 풀어졌다.

“어차피 이번 일 아니면 볼 사람들도 아닌걸요. 연락을 이어 나갈 생각도 없어요. 제 이름 가지고 허튼짓 못 하게 직접 만나 주고, 겸사겸사 원래 신분도 찾으려는 것뿐이지.”

에블린은 조금 전보다 편안한 얼굴로 다시금 부탁했다.

“그러니까 가문을 없앤다든가 그런 무서운 말은 하지 말아 주세요. ”

“생각해 보지.”

체이서는 가볍게 코웃음을 뱉었다.

그의 극단적인 말에 충격을 받은 탓일까.

가슴을 꽉 채우던 답답하던 느낌이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다.

에블린은 슬쩍 눈을 굴려 체이서를 몰래 훑어보았다.

이제 막 퇴근했는지 옷도 갈아입지 않았고, 내색하지 않았지만, 지난주에 보았을 때보다 얼굴에 피곤함이 얹어져 있었다.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잠은 제대로 자는 건가?’

에블린은 어찌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다 걱정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손이 가까워짐에도 체이서가 거부하려는 기색이 없이 가만히 그녀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자 에블린은 그제야 안심하고서 천천히 그의 뺨을 쓸어 보았다.

한참을 어루만졌을까, 체이서가 웃음기 띤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내 뺨을 오래간만에 만져 본 소감은 어때?”

“전보다 조금 더 까칠해요. 잠은 잘 자고 있어요? 피곤할 텐데 왜 방으로 가지 않고 제 방에 온 거예요.”

“글쎄. 왜 그랬을까.”

체이서는 자기 뺨을 매만지는 에블린의 손 위에 그대로 얼굴을 기대었다.

“나도 잘 모르겠네.”

“…….”

피곤함이 진득이 배어 있는 목소리에 에블린은 괜히 빈손을 움찔거리다가 결심한 듯 체이서의 등 뒤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는 힘을 주어 제 품으로 그를 끌어당겨 안았다.

“잠시 어깨 빌려 드릴게요.”

부끄러워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최대한 담담하게 내뱉은 목소리에 화답하듯 가벼운 웃음소리가 돌아왔다.

“그럼 조금만 빌리지.”

에블린은 조심스럽게 그의 등에 손을 올려 천천히 토닥여 보았다.

체이서는 거부하지 않았고, 에블린 또한 예전보다 친근한 스킨쉽임에도 더는 어색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진짜 연인이라도 된 것처럼 누구도 먼저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서로가 맞닿아 있을수록 고통과 피로가 치료라도 된다는 듯이. 

고요한 치유의 시간이 흐른 후, 고개를 든 체이서는 조금이나마 피곤이 가신 얼굴이었다.

“에블린. 네 가족을 만나기 싫다면 만나지 않아도 돼. 내 선에서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으니까.”

한결 부드럽게 풀린 목소리는 에블린을 걱정하는 말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에블린은 체이서를 도닥이다 말고 해맑게 웃어 버리고 말았다.

“괜찮아요. 제 가족 일은 제가 해결해 볼게요.”

“과연 좋게 말한다고 해결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해.”

에블린의 힘찬 말에 체이서는 마땅치 않은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차라리 네가 시험에 함께 통과했더라면 이런 소소한 일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텐데.”

아쉬움이 가득한 말에 에블린은 어이가 없어졌다.

“시험을 함께 통과했더라면 우리는 약혼이 아닌 남매 사이로 지내고 있었을 텐데요?”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좀 묘한걸?”

그것도 재미있었겠다며 체이서는 농담이라도 들은 듯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그렇죠? 남매였다면 결혼은 생각하지도 못했겠죠.”

“글쎄. 과연 못 했을까?”

갑자기 미소를 지우고 진지한 낯을 띤 체이서를 보며 에블린이 한숨과 함께 두 손으로 그의 입술을 틀어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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