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소문이 퍼지는 속도는 생각보다 더 빨랐다.
큰 사교 모임부터 시작에 소소히 열리는 사적인 모임까지.
루이사 소공작의 갑작스러운 결혼 발표는 사교계를 뜨겁게 달구었다.
하지만 소문의 주인공인 에블린은 그런 사교계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영애.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해진 커리큘럼을 모두 끝낼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그럼 결혼 후, 다시 수업이 재개될 때 뵙겠습니다.”
에블린의 역사 선생님인 레버튼 소남작이 인사를 마치고 방을 빠져나갔다.
“하아아.”
그가 방을 나가고서야 에블린은 책상 위에 쓰러지듯 엎드리며 한숨을 내뱉었다.
‘힘들다.’
에블린이 수도 오티에로 올라온 지도 어느덧 두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평생 이러고 살아야 하는 건 아니겠지?’
에블린은 바빴다.
그것도 무지하게 바빴다.
어릴 적 이후로 받지 못했던 예절 수업을 새로이 받기 시작했고, 제국의 역사부터 시작하여 귀부인이라면 갖추고 있어야 할 교양 수업 또한 함께 시작하였다.
이뿐만이 아니라 체이서와 신전에 찾아가 약식으로 약혼식을 치르고, 다가올 결혼식 준비하느라 더더욱 정신이 없었다.
와중에 소문이 널리 퍼져 수도의 귀부인과 영애들의 초대장도 수북하게 쌓이고 말았다.
일정이 너무 바빠 시간을 내기가 어려워 모두 거절했다는 것만이 이 시간을 버틸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이 되고 말았다.
“아가씨, 마담 그랑티가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불러들일까요?”
“그래? 시간이 그렇게 됐구나.”
에블린은 다시 꼿꼿이 허리를 세워 앉고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로피가 후다닥 방을 빠져나갔고, 마야는 에블린의 앞에 새롭게 차를 따라 주었다.
“피로 해소에 도움이 되는 차입니다.”
“고마워, 마야.”
에블린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서는 힘없이 눈을 깜빡였다.
‘정신없네, 진짜.’
평민으로 살 시절에는 먹고사느라 바빴는데 다시 귀족이 되려고 하니 삶 자체를 아예 뜯어고쳐야 했다.
마야의 부름에 아침에 눈을 떴고, 하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씻고 옷을 갈아입는다.
어차피 저택에는 혼자 있는 시간이 대부분인지라 방으로 올려다 주는 식사를 하고, 그 이후로 귀부인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수도원에서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 밥을 준비하지 않아도 됐고, 잠든 가족들을 깨우지 않아도 됐으며 이른 시간부터 빨래할 필요도 없었다.
이렇게 바쁜 것도 잠시뿐 결혼식을 올리고 나면 이보다는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때가 그리웠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간임을 알기에 추억을 끝끝내 놓을 수가 없었다.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찢길 만큼 슬픈 기억임에도 말이다.
“아가씨.”
마야의 낮은 부름에 에블린은 눈을 떴다.
마담 그랑티가 왔다는 로피의 목소리가 문을 타고 넘어 들어왔다.
에블린은 곧 자신의 약한 모습을 지워 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영애!”
마담 그랑티는 활짝 웃으며 힘차게 등장했다.
평소 눈 밑으로 다크서클이 짖게 내려와 힘겹게 미소를 짓던 것과 달리 오늘따라 활기차 보였다.
그리고 곧 그 이유를 알 수가 있었다.
바로 웨딩드레스가 완성이 된 것이었다.
에블린은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이 입은 드레스를 감상하였다.
어깨가 드러난 새하얀 드레스는 가슴과 허리를 감싸 주었고, 허리 아래로 내려온 드레스 자락은 적당히 부피감을 유지하면서도 무겁지 않아 보이며 사락사락 부드럽게 흩날렸다.
가슴 윗부분과 소매에 연결된 레이스는 등 뒤로 길게 늘어지며 하늘하늘한 드레스 자락과 퍽 잘 어울렸다.
“정말 아가씨를 위한 디자인이에요! 너무 아름다워요!”
어린 로피가 기쁨을 숨기지 못한 채 하염없이 감탄했다.
마담 그랑티는 뿌듯한 얼굴로 설명을 이어 갔다.
“물론 아직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곳곳에 부족한 포인트를 주기 위해 순백색과 잘 어울리는 진주와 다이아몬드로 장식할 예정이에요. 물론 영애께서 부담스러워하지 않을 정도로 말이죠.”
과해 보이지는 않지만 많은 보석을 장식하겠다는 뜻이었다.
“일주일 이내로 완성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만큼 기쁜 소식이 또 있을까.
바쁜 일 중 가장 번거롭던 일 하나가 줄었기에 에블린은 반색하며 만족스럽게 드레스를 살펴보았다.
“그이의 예복은 다 완성이 되었나?”
“예, 며칠 전에 완성하였습니다. 세기의 결혼식에 이렇게 제 의상이 함께일 수 있다니. 디자이너로서 이보다 큰 영광이 있을까요.”
“세기의 결혼식이라.”
에블린은 저도 모르게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에블린이 이렇게 고생하는 이유는 바로 결혼식을 하고 차기 루이사 공작 부인이 되기 위해서였다.
그와 동시에 자연스럽게 체이서의 얼굴이 떠올랐다.
‘벌써 얼굴도 못 본 지 1주일이나 흘렀네.’
에블린이 바쁜 만큼 체이서 또한 바빴다.
체이서는 아침 일찍 나가 새벽이 되어서야 귀가했고, 늦은 새벽까지 가문의 일을 처리하고 잠시 눈을 붙이고 출근하였다.
기사단의 단장으로서 책무를 다할 뿐만 아니라 병이 깊은 루이사 공작 대신 가문의 일 또한 함께 처리해야 했다.
와중에 결혼식을 위한 준비까지 함께하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을 것이다.
‘바이아르도 백작가에서 연락이 오면 찾아온다더니 소식도 없고.’
처음 그랑티 살롱을 나갔을 때를 제외하고는 함께 시간을 보내지도 못해서일까.
틈날 때마다 얼굴을 보며 짧게 대화하는 것이 아쉬웠다.
덕분에 반갑지 않은 바이아르도 백작가의 소식마저 목 빠지게 기다리게 되었고.
‘조금 보고 싶네.’
든든한 사람이 옆에 있어 주면 더더욱 힘이 날 것 같은데.
에블린은 아쉬움을 속으로 삼키며 드레스는 이대로만 진행해 달라 하고는 다음 일정을 위해 이만 환복까지 마쳤다.
지친 몸을 이기지 못하고 소파에 기대듯 앉아버리자 마담 그랑티는 결혼하기가 참 어렵다며 호호 웃었다.
“이럴 때 소가주님께서도 함께 봐 주시면 정말 좋을 텐데.”
어린 로피가 아쉽다며 중얼거리는 말은 에블린 또한 격하게 공감하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겉으로 내색할 수 없었기에 로피를 부드럽게 타일렀다.
“웨딩드레스를 미리 보여 주면 재미없지 않겠니? 오히려 난 결혼식 당일 내 모습에 깜짝 놀라 줬으면 좋겠구나.”
아니, 이건 로피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저 스스로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꺼낸 말이었다.
“너무 아름다우셔서 놀라 기절하시면 안 될 텐데 말이죠.”
마담 그랑티가 자연스럽게 끼어들며 아부하였고, 이내 훈훈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마담 그랑티는 다음 주에 다시 오겠다며 약속을 잡은 뒤에야 돌아갔고, 이로써 오늘의 일정은 끝이 났다.
벌써 창밖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바쁠 때는 참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는구나.”
아무것도 안 할 때는 참으로도 지루했는데.
“아가씨, 많이 피곤하시죠? 목욕물을 준비해 드릴까요?”
걱정스러운 마야의 물음에 에블린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씻기 전에 오늘 배운 내용을 복습해야지. 체이서도 바쁜데 내가 태평히 놀아서는 안 되지.”
에블린은 자리에서 일어나다 말고 순간적으로 밀려오는 어지러움에 휘청였다.
“아가씨!”
‘이놈의 저혈압.’
마야의 호들갑에 에블린은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다.
“아무래도 복습하는 건 힘들 것 같네. 해가 저물기 전에 바람이라도 좀 쐬고 싶은데 괜찮을까?”
“날씨가 많이 추울 텐데요. 감기에 걸리실지도 모릅니다.”
처음 수도에 왔을 때 마주친 초겨울 날씨는 더욱 깊은 한기를 품고 매서운 바람을 일으키는 강추위가 되어 버렸다.
“잠깐만도 안 될까? 단단히 입을게.”
“정말 조금만이에요.”
마야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재빠르게 외투를 가져왔다.
하얀 담비털로 만들어진 외투를 입고 혹 찬바람이 파고 들어갈까 목도리까지 단단히 매고 나서야 드디어 정원에 발을 들일 수가 있었다.
“여기서 차도 마시면 좋을 텐데.”
차디찬 바람은 매서웠지만, 에블린은 바쁜 일정 속에 쌓인 스트레스를 홀연히 해소해 버릴 정도로 상쾌하게 다가왔다.
“차가 다 식고 말 텐데요?”
“그럼 어쩔 수 없이 창가에서만 마셔야겠구나. 어서 그런 여유가 찾아오면 좋으련만.”
“아가씨는 정말 겨울을 좋아하시네요. 곧 여유가 찾아올 터이니 조금만 더 힘내세요.”
마야와 소소한 잡담을 나누며 조금 걸었을까.
정원에는 선객이 있었다.
벤치 위에 무릎을 끌어모은 채 가만히 앉아 있던 얇은 옷차림의 사내는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화들짝 놀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몬스 님?”
추워 보이는 옷차림의 선객은 데몬스 루이사였다.
‘두 달만인가?’
복도를 지나가다 보면 가끔가다 블러드윈을 만날 수 있었으나 데몬스와는 오찬 이후로 첫 만남이었다.
정면으로 마주쳤으니 모른 척도 할 수 없는 법.
그나마 ‘루이사의 정원’에서 정을 줬던 캐릭터였기에 용기 내어 다가갔다.
“데몬스 님, 여기서 뭐 하고 계세요?”
“아, 그냥 있습니다…….”
데몬스는 당황한 것을 숨기지 못한 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다급한 움직임에 소맷단 아래가 슬쩍슬쩍 올라가며 큰 키와 어울리지 않는 마른 팔목이 보였다.
얇은 팔목을 보니 절로 그의 식습관이 걱정되었다.
에블린은 저도 모르게 걱정되는 마음에 말을 오지랖을 부리기 시작했다.
“식사를 잘하고 계신 거 맞죠? 오찬 때도 적게 드시던 것 같아 걱정되었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마야에게 손짓하여 당 떨어질 순간을 대비하여 챙겨 온 쿠키 주머니를 데몬스의 손에 쥐여 주기까지 했다.
“이건?”
“쿠키예요. 초코칩이 박혀 있어 조금 달긴 하겠지만 차와 함께 마시면 맛있게 드실 수 있을 거예요. 간식은 너무 많이 드시지 말고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 드세요. 한창 성장기인데 잘 챙겨 드셔야죠.”
진심이 담긴 걱정에도 데몬스는 불안한 듯 주위를 살피더니 갑자기 꾸벅 고개를 숙이고선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 사라져 버렸다.
“……혹시 나 미움받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