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두 사람의 목적지는 수도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살롱의 한 곳이었다.
‘그랑티 살롱? 쇼핑이라도 하러 온 건가?’
에블린은 3층 규모의 큰 건물과 화려한 간판을 보다가 체이서가 내민 팔에 정신을 차리고서 그대로 함께 팔짱을 끼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루, 루이사 소공작 가, 각하?”
안내를 해 주려던 직원이 단숨에 체이서를 알아보고 기겁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를 듣고 살롱의 주인인 마담 그랑티가 뛰쳐나왔다.
“인사는 됐고. 시간 없으니 자신 있는 작품 모두 내오도록.”
그녀가 언제 놀랐다는 양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다급히 두 사람을 살롱의 제일 좋은 룸으로 안내했다.
그 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자신작들을 모두 가져온 마담 그랑티는 체이서의 허락하에 어색해하는 에블린을 다독이며 드레스를 모두 입혀 볼 수 있었다.
“영애께서 피부 결이 곱고 하얘 어떤 색이든 다 잘 어울리시네요.”
마담 그랑티는 진심으로 앞에 서 있는 에블린을 보며 감탄하였다.
루비가 촘촘히 박힌 화려한 붉은색 드레스를 입혀도 잘 어울렸고, 프릴이 풍성히 달린 조금 수수해 보이는 하얀 드레스 또한 잘 어울렸다.
시원한 푸른색 드레스를 입으면 절로 상쾌함이 퍼져 왔고, 하다못해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새까만 드레스를 입혀도 고혹적인 매력을 뿜어냈다.
“과연 마담 그랑티군. 안목이 좋아.”
체이서는 에블린이 입고 나오는 드레스마다 어여쁘단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그녀가 입어 보았던 드레스를 모두와 그에 어울리는 보석과 장신구 또한 가득 구매하였다.
끊임없이 쌓이는 사치에 오히려 에블린이 안절부절못했다.
“체이서. 저는 이리 많이 필요 없다니까요. 어차피 몸도 좋지 않아서 외출도 많이 못 할 텐데…….”
“가끔 하는 외출이라도 기분 좋게 하길 원해서 그래. 잠시라도 네가 행복하다면 이깟 돈이 아깝겠어?”
사랑에 퐁당 빠진 연인과 같은 모습에 마담 그랑티는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애써야 했다.
‘연인인가?’
하지만 체이서 루이사에게 연인이 있다는 소문은 듣지 못했다.
수도의 제일가는 살롱의 주인인 만큼 사교계에 오가는 웬만한 소문은 이곳을 거쳐 가며, 때로는 이곳에서 만들어져 흘러나가기도 했다.
그렇기에 마담 그랑티로서는 소문도 들어 보지 못한 에블린의 등장에 절로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과한걸요…….”
“내가 말했잖아, 에블린. 나와 함께 하는 앞으로는 부족할 것 없이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부디 내 선물들을 거절하지 말아 줘.”
“제가 이 선물들을 받으면 저보다 체이서가 더 기뻐할 것 같아요.”
“그럼 나를 행복하게 해 주겠어?”
두 사람은 가볍게 투덕거리더니 이내 서로를 마주 보며 웃고 있었다.
‘정부라고 하기엔 여자가 너무 숙맥이야. 그렇다면 연인 쪽에 가까울 것 같긴 한데.’
하지만 루이사 소공작에게 연애라는 단어는 잘 어울리지 않았다.
‘정략 결혼할 사이인가?’
그동안 서슴없이 다가가는 여인들을 내치는 걸로 유명하여 한때는 고자가 아니냐는 소문도 돌던 그였기 때문에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그러나 에블린을 향한 시선은 꿀처럼 달콤하였고, 내뱉는 말은 하나같이 다정하였다.
여성 편력이 없는 걸로도 모자라 고자라는 소문이 돌던 소공작의 취향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의 청순한 여자였었나 보다.
마담 그랑티는 평온한 표정을 한 채 머릿속으로는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끊임없이 짐작해 보고 있었다.
“참, 마담. 내가 그대에게 제안하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야.”
그러나 곧 그 고민은 너무도 손쉽게 해결이 되었다.
“석 달 뒤에 있을 우리의 결혼식 예복을 이 살롱에서 맡아 줄 수 있나?”
체이서 루이사 본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의해서.
“예, 예?”
“말 그대로일세. 석 달 뒤 결혼식을 올릴 예정인데 아직 결혼식 예복이 마련되지 않아서 말이야. 나도 내 약혼녀도.”
“아.”
나름 친절한 설명의 마담 그랑티는 빠르게 상황 파악을 할 수 있었다.
마담 그랑티의 머릿속에 공작 부인이 될 법한 지위의 여자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중에는 자신이 공작 부인이 될 거라 어깃장을 놓는 이들도 몇 있었다.
마담 그랑티 또한 그들 중 한 명이 공작 부인이 되리라 생각했기에 당연히 앞에 있는 이를 정부라 생각했던 것인데.
“안 된다면 빨리 답해 주게. 일정이 급해 다른 이를 찾아봐야 하니.”
마담 그랑티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곧 있을 봄 무도회를 위한 예약들이 한가득 쌓여 있었으나 그들 중 누구도 루이사보다 대단한 거물은 없었다.
이건 새로운 VIP 고객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무엇보다 오늘의 모습을 보니 체이서 루이사는 사랑하는 연인에게 돈을 아끼지 않았고 앞으로도 이와 같은 행보를 보일 게 예상이 됐다.
이건 어디로 보나 자신에게 이득인 장사였다.
새로운 소문에 대해 소식을 얻기 위해 다시 많은 귀족들이 살롱에 찾아올 미래가 눈 앞에 펼쳐지니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다른 사람에게 이 기회가 가게 둘 줄 알고?’
체이서는 마담 그랑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양 너그럽게 그녀가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에블린만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확정된 결혼식 일정에 깜짝 놀라는 중이었다.
그사이 마담 그랑티는 머릿속 계산을 빠르게 끝내고는 환히 미소를 지었다.
“우선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소공작 각하. 축하드립니다, 영애. 저희 살롱에서는 두 분의 결혼 예복을 최우선으로 작업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급한 일정이긴 하지만 완벽한 결혼식으로 끝내고 싶네. 내 말뜻 이해하겠지?”
“아무렴요. 완벽한 예복을 만들어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마담 그랑티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거대한 금액이 오가는 만큼 계약서 또한 자연스럽게 오갔다.
“오늘 구매한 것들은 루이사 공작저로 배달해 주게.”
“예, 소공작 각하.”
다음 주 중으로 저택에 방문하기로 약속까지 하고서야 두 사람은 그랑티 살롱을 빠져나갔다.
마담 그랑티는 싱글벙글 웃으며 그들을 배웅하고는 문이 닫히자마자 계약서 앞으로 뛰어갔다.
계약서에는 에블린 또한 사인하였고, 그 덕분에 마담 그랑티는 그녀의 본명을 알 수가 있었다.
“바이아르도! 바이아르도 백작 영애였구나!”
마담 그랑티는 순수하게 기쁜 마음으로 웃었다.
새로운 거물 고객에 이어 수도를 뒤덮을 소문의 시작지가 이곳이 될 거라는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대로 한동안 전염병 때문에 잠잠하던 수도에 새로운 염문설이 퍼지기 시작했다.
***
“그랑티 살롱은 수도의 웬만한 소문을 퍼트리기 아주 좋은 곳이니 분명 내일 즈음이면 우리의 결혼 소식이 도시 내에 퍼질 거야.”
식당에 들어서고 나서야 체이서는 살롱에 제일 먼저 방문한 이유를 알려 주었다.
상상치도 못한 거액이 오간 쇼핑에 뒤이어 갑작스러운 결혼 발표까지.
눈을 땡그랗게 뜨며 놀라던 마담 그랑티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했다.
마담 그랑티뿐일까?
레스토랑에 들어섰을 때, 힐끔힐끔 와 닿는 시선들 또한 어찌나 많았던지 모른다.
‘오늘 외출은 소문 때문이었구나. 어쩐지.’
바쁜 와중에도 함께 있는 이유는 마야와 로피가 호들갑 떨던 첫 데이트가 아닌 그저 소문 때문이었다.
‘어쩐지 입맛이 쓴걸.’
에블린은 들쑥날쑥한 제 감정을 외면하고는 작은 목소리로 불만을 토해 냈다.
“결혼식 같은 중요한 일정은 이왕이면 제게 먼저 알려 주세요.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다음부터 주의하도록 하지.”
“그리고 살롱에서의 소비는 너무 과했어요.”
나름 주변의 눈 때문에 살롱에서 꺼내지 못한 말을 했지만, 이는 소용없었다.
“원래 사랑하는 이에게 아낌없이 주는 건 당연한 거야. 익숙해지도록 해.”
체이서는 뻔뻔한 얼굴로 대답하였고, 에블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고맙기는 하지만…….”
둘 사이가 계약으로 이루어진 관계이기 때문에 받기만 하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그럼 저는 당신에게 줄 게 없잖아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다 체이서의 돈으로 꾸미고 앞으로도 그의 돈으로 살게 될 텐데.
그렇다면 에블린이 줄 수 있는 건 없었다.
‘연인 사이에서 무조건 한쪽이 주기만 하는 건 건강한 관계가 아닌데. 아니, 이건 특별 경우인가?’
에블린이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체이서는 터져 나올 것 같은 웃음을 꾹 참았다.
별것도 아닌 일에 진지한 그녀의 모습을 지켜볼수록 최근 받았던 스트레스가 한결 가시는 느낌이었다.
‘주는 게 없을 리가 있나.’
체이서는 불만스러움을 숨기지 못한 채 괜히 음식이 차려진 식탁을 노려보는 에블린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 다정하게 속삭였다.
“왜 없어. 네가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해도 난 충분한데.”
에블린의 얼굴은 금세 빨갛게 달아올랐고, 일단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덧붙이며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체이서는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어 보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이 여자는 제 가치를 몰라도 너무도 몰랐다.
체이서는 지난 밤, 블러드윈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래도 시험이 끝나고 후계자가 정해지면 예정대로 죽일 거지?’
체이서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계약서가 오간 뒤 자연스럽게 에블린을 죽이겠다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는 사실을 블러드윈의 말에 의해 깨달아 버린 것이다.
체이서가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해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니 블러드윈은 그 모습을 보고는 재미있어 죽겠다며 소리 내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당연히 안 죽여야지. 형수님은 특별하잖아.’
블러드윈의 말에 체이서는 그제야 자신이 쉽사리 답하지 못한 이유를 떠올릴 수 있었다.
‘여전한 거지, 그 능력?’
‘루이사의 시험’을 거쳐 생존한 체이서와 블러드윈만 아는 에블린의 커다란 비밀.
특별한 존재가 한 배를 탔으니 죽이지 않는 것이 당연할 텐데.
블러드윈의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불쾌할 정도로 귓가에 맴돌았다.
그리 많이 손을 잡았는데 에블린은 아직도 이런 행위가 낯선지 움찔거리며 손을 빼내려 들었다.
체이서는 짜증을 내며 고개를 내젓다가 여전히 수줍어하는 에블린을 보며 눈을 빛냈다.
‘그래, 절대 못 놓아주지.’
체이서는 그리 생각하며 에블린이 빼내지 못하도록 맞잡은 손을 꽉 붙들었다.
곧 그녀의 얼굴이 다시 분홍빛으로 맴돌았고, 두 사람은 저택에 돌아가기 전까지 맞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퍽 즐거운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