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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34)화 (34/159)

 34화

이른 오후부터 에블린의 방은 정신이 없었다.

출근한 체이서에게 오늘 오후 함께 시간을 보내자는 서신이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첫 데이트예요!”

“드디어 수도 첫 나들이군요.”

로피와 마야는 첫 데이트 소식에 눈을 화르륵 불태우며, 적극적으로 에블린을 꾸미기에 나섰다.

“마부에게 듣자 하니 디센트라 거리로 향한다더군요. 사람이 참 많은 곳이죠. 후후, 저희만 믿어 주세요, 아가씨.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도록 확실히 꾸며 드릴 테니까요.”

마야의 지시 아래 로피에 이어 또 다른 하녀들의 손길까지 더해지자 에블린의 소박하던 모습은 지워지고 누가 보아도 귀족 영애로 보일 정도로 완벽히 꾸며져 있었다.

에블린은 거울을 보니 갑자기 지난 밤 체이서가 무심히 던졌던 말이 떠올랐다.

‘오늘도 예쁘다고 해 주려나?’

그러다 곧 눈을 번쩍 뜨며 고개를 휙휙 내저었다.

‘무, 무슨 기대를 하는 거야.’

부끄러움에 몸서리치고 있자니 어느샌가 치장은 끝이 났고, 눈을 깜빡이니 홀로 마차 안에 앉아 있었다.

“좋은 시간 보내고 오셔요.”

체이서와는 디센트라 거리에서 만나기로 한지라 하녀들은 저택에 두고, 마부와 호위 기사만 대동한 채 마차는 출발하였다.

‘나도 참. 쓸데없는 생각에 열을 냈네.’

첫 데이트라는 말이 뭐라고 이리 사람을 들뜨게 하는지.

이른 시간부터 외출 준비하느라 피곤하였는지 몸이 벌써 피로하다 외치기 시작했다.

에블린은 등을 기대고 쉬려다 환한 빛에 자연스럽게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와아.”

그리고 저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고요한 귀족들의 타운하우스를 지나 그들이 자주 다니는 쇼핑거리도 지나고, 이번에는 평민들이 주로 모여 있는 거리도 지나친다.

작은 시골 마을과 비교가 될 정도로 수많은 사람이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는 전염병 때문에 사람들이 외출을 자제했다더니.

그런 것치고 수도의 번화가는 생기가 넘치고 아름다웠다.

에블린은 창문에 손을 얹어 창밖에 두 눈을 떼지 못하였다.

평화로운 수도의 광경에 한참 감탄하고 있으니 문득 한 사람을 떠올랐다.

라사냐가 한때 에블린을 수도로 보내기 위해서 고군분투했다.

‘이게 수녀님이 내게 보여 주고 싶었던 곳이구나.’

결국 에블린의 강경한 의지로 실패했던 라사냐의 소소한 꿈이 그녀가 죽고 나서야 이루게 되었다.

라사냐를 떠올리고 있으니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처럼 코끝이 시큰거렸다.

에블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이 슬픔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 보아도 감정을 갈무리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그때, 갑자기 벌컥 하고 마차의 문이 열렸다.

“아무리 불러도 왜 대답이 없는…….”

두 손에 묻어 둔 얼굴을 들자 활짝 열린 마차 문 너머 익숙한 이가 보였다.

“……체이서?”

눈가에 물기가 서려 흐릿해 보였으나 분명 체이서였다.

에블린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위태롭게 들렸다.

그 모습을 보던 체이서는 마부에게 무어라 명하더니 이내 마차 안으로 훌쩍 들어왔다. 그리고는 아무런 말 없이 에블린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체이서?”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누군가는 불편할지도 모르는 이 침묵이 에블린에게는 오히려 위로와 같이 다가왔다.

착각일 수도 있다지만 마치 제 감정을 이해해 주는 것만 같았달까.

결국, 에블린은 버티지 못하고 몸에 힘을 풀고서 체이서의 품에 편히 얼굴을 묻었다.

“매번 이런 모습만 보여서 미안해요.”

괜찮은 모습을 보여 주려 노력해 보았으나 애처롭게 떨리는 목소리는 숨길 수 없었다. 

체이서는 그런 에블린의 턱을 붙잡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래도 울지 않으려 노력했으니 많이 발전했지.”

그가 붉게 물들어 있는 눈가를 매만지며 물었다. 

“수녀를 떠올렸나?”

“어떻게 아셨어요?”

에블린이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수도원에 있을 적에 얘기했잖나. 수녀가 너를 수도에 보내고 싶어 했다고.”

“……그걸 아직도 기억하세요?”

“네가 한 말이니 기억하지.”

에블린은 울던 것도 잊은 채 저도 모르게 함박웃음을 지었다.

자기도 모르게 체이서의 말에 감동을 받아 버린 것이다.

“그게 뭐예요. 그냥 기억력이 좋으신 것 아니고요?”

‘그냥 기분 좋아지라고 하는 말이겠지? 확실히 기분은 나아지네.’

하지만 체이서는 무슨 소리냐는 양 그녀의 잘못된 말을 짚어 주었다.

“에블린, 내가 기억력이 좋기는 하지만.”

당연하다는 듯, 아주 대수롭지 않게. 

“필요 없는 말은 새겨듣지도 않아.”

담담히 뱉은 말에 순간 찌릿하고 가슴께가 울렁였다.

‘뭐지?’

에블린은 반사적으로 가슴 위쪽에 손을 얹어 보았다.

‘왜 이리 심장이 빨리 뛰지?’

두근거리며 빠르게 뛰는 심장에 에블린이 당황해 버렸다.

수도원에 잠시 머물 때 했던 말을 지금껏 기억해 줬다는 일이 뭐 별거라고 주책없이 이러는 걸까.

어느덧 가슴을 먹먹히 뭉개던 생각들이 모두 가셨다.

에블린이 한참이나 말이 없자 다시 기분이 안 좋아졌다고 생각했는지 체이서가 멍하니 굳어 있는 에블린을 보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 말이 네 기분을 상하게 했나 보군. 알다시피 나는 위로를 해 본 적도 없고, 할 줄 아는 사람도 아닌지라. 그러니 그만 익숙해지도록 해.”

물론 체이서의 말처럼 루이사는 위로가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에블린은 그 말에 동의할 수는 없었다.

“그럴 리가요. 저는 당신에게 많은 위로를 받았는걸요.”

에블린은 혼란스러운 생각을 저리 밀어 둔 채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체이서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당신이 이렇게 다정한 사람인 줄 몰랐어요.”

“다정이라. 내 형제들이 들으면 기겁할 소리를 정말 아무렇지 않게 하는군.”

체이서는 질색하는 얼굴을 지우고서는 창가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이 주제에 대해서 더 이야기하기 싫다는 듯 마지막 말을 덧붙이면서.

“나는 그저 내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할 뿐이야.”

꾸밈없이 솔직한 말이었다.

‘이상하지. 분명 재수가 없는데 나는 왜 기분이 나쁘지 않은 걸까.’

대화를 주고받으면 받을수록 에블린은 기분이 묘해짐을 느꼈다.

체이서 본인도 모르는 그의 다정한 모습을 에블린이 먼저 깨달았다는 사실에 즐겁다가도 왜 즐거운지 이유를 잘 몰라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이제 울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네.’

에블린은 저도 모르게 그의 품에 편히 기대고는 헤실헤실 웃고 말았다.

그런 와중 체이서는 자신이 했던 말에 뒤늦게서야 놀랐다.

스스로의 의지로 제 품에 기댄 에블린의 모습이 만족스러웠으나 동시에 의문이 든 것이다.

‘굳이 이런 말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지.’

에블린이 기분이 좋아 보여서 다행이지.

그녀의 기분이 여전히 침울해 있었더라면 위로를 못 한다느니 쓸데없는 말로 분위기가 더욱 가라앉을 뻔했다.

체이서는 자신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이라도 하고 싶었나?’

충동적으로 꺼낸 말은 진심이었기에 더더욱 불쾌함이 몰려왔다.

잘못했다간 기껏 가까워진 두 사람의 사이가 어색해질 수도 있었다는 사실에 화도 났다.

‘말을 조심해야겠군.’

체이서의 목표는 에블린이 제게 서서히 빠져들게 하여 이혼 따위 생각지도 못하게 하는 것.

그러니 그녀의 눈에 차도록 완벽한 모습을 보여 줘야 했다.

‘그래도 심성이 착해서 다행이지.’

체이서가 무심코 내뱉은 말에 에블린이 진심이 섞인 답을 하여 두 사람을 감싼 분위기가 더욱 화기애애해졌다.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에블린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 주며 다정다감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신께 맹세컨대 네가 아닌 다른 이에게 이런 친절을 베푼 적은 없는 것 같군. 그건 인정해.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다정함과 거리가 가까운 사람은 아니지만.”

에블린이 소리 내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제게만 다정하겠다는 뜻처럼 들리는데요?”

꽃망울이 터지는 듯한 맑은 웃음소리에 체이서도 그녀를 따라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럼 그런 거겠지.”

체이서는 묵묵히 대답해 주며 머리를 정리하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머리를 쓸어 주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지 손길이 투박했지만 마치 소중한 물건에 흠집이라도 날까 조심스럽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에블린은 자신에게만 다정한 것 같다는 체이서의 말이 진심 같아 더욱 환히 웃었다.

*** 

프리스리아 제국의 수도 오티에.

디센트라 거리에 있는 그랑티 살롱의 주인 마담 그랑티는 예전보다 한가해진 제 살롱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의 전염병이 문제야, 이놈의 전염병이.”

마담 그랑티, 1황자비가 데뷔탕트 시절부터 함께해 온 장인으로 뛰어난 솜씨와 고객들을 만족시키는 훌륭한 태세에 수도에서 가장 유명하고 바쁜 살롱의 주인은 이 사태에 대해 굉장히 불만스러운 상황이었다.

“왜 그리 화가 나셨어요, 마담? 거리에 사람이 많지 않다 하더라도 주문은 꾸준히 들어오잖아요? 또 곧 열릴 봄 무도회 주문 건도 마찬가지고요.”

지나가던 직원이 그런 그랑티의 모습에 의아한 듯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원인 불명의 전염병 이후 사교 모임이 줄어들고, 거리의 이동 인구가 줄었다지만 주문량은 오히려 더 폭주했기 때문이다.

“집 안에만 있으니 갑갑해서 더욱 소비하니 즐겁다고 얼마 전까지 그러셨으면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다시 사람들이 거리에 돌기 시작했는데 예전과 같이 손님이 들끓지 않잖니.”

사치품의 소비가 늘어난 덕에 다행히도 살롱은 다른 상인들에 비하여 수입이 줄어드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우리 살롱은 귀부인과 영애들의 소규모 사교 모임의 장이나 다름없는 곳이야. 이곳에서 소문이 만들어지고 널리 퍼져 나가는 곳인 것을 알고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았지. 외출을 자제할 때는 괜찮았어. 하지만 다시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는 지금도 예전과 같지 않게 서서히 발길이 끊기고 있잖니? 그럼 어떻게 될 것 같니?”

직원은 잘 모르겠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랑티는 한심하다는 시선과 함께 직원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모임을 목적으로 이곳에 찾아오는 이들이 줄어들겠지! 모임이 없으면 다른 살롱이랑 다를 바가 없는데 굳이 귀족들이 이곳을 이용하려고 하겠니?”

아름다운 의상과 화려한 보석, 갖가지 장신구들은 다른 살롱에도 많다.

하지만 그랑티 살롱을 업계의 독보적인 일인자로 올려 줄 수 있던 것은 ‘소문’에 꾸준히 관심을 가져다준 귀족들 덕분일 터.

이제야 깨달은 멍청한 직원을 뒤로한 채 그랑티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위기를 넘기게 해 줄 귀인이 나타나 줬으면 좋겠구나.”

이때의 그랑티는 몰랐다.

체이서 루이사, 거대한 화염의 주인으로 능력자들을 거느리는 1기사단의 단장이자 루이사 공작가의 차기 가주.

수도에서 황족 다음으로 버금간다는 대귀족이 평소 눈길조차 주지 않던 살롱에 처음 보는 여인을 옆에 끼고 찾아오고 있음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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